# 271-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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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버지를 부정하겠습니다.”
“나를 부정하겠다고?”
뜨겁고 강건한 말이었다. 수행은 드물게도 놀란 표정을 보인다. 은결의 대답은 수행의 제안에 대한 가능한 최대한의 부정이다. 그 제안이 서 있는 세계관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결은 놀란 표정을 보이는 아버지를 향해 단호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향해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겠습니다. 언제가 되어도 좋습니다. 저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제가 해낸 것을 보며, 네가 옳았다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은 은결을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그의 눈빛에서는 많은 말들이 넘치고 있었다. 너무 많은 말이었기에, 도리어 말이 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은결은 그 눈빛을 마주 받으며, 그 눈빛이 담는 많은 의미들을 이해했다. 이해하면서, 자신의 답을 피하지 않았다. 수행은 낮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네가 하려는 것은, 보편과 특수를 조합하는 일이다. 전체와 부분을 조화시키는 일이다. 상대와 절대를 일치시키는 일이다.”
“알고 있습니다.”
수행은 혹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은결이 잘못 이해한 것이길 기대하며 앞선 세 물음을 총괄하는 무자비한 한 마디를 꺼낸다.
“불가능한 일이다.”
“알고- 있습니다.”
은결은 앞선 자신의 답을 반복함으로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한다. 아무런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수행은 눈을 감고 다시 긴 숨을 쉰다. 그는 묻는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지탱시키는지 모르겠구나.”
“......”
은결은 침묵한다. 그는 침묵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며 아버지가 묻는 ‘무엇’을 발견하려 애쓴다. 민성이 자신을 향해 말했다. ‘더는 아는 체 하지 말자’고. 그 선언을 듣고서 많이 아팠다. 길게 그어진 마음의 표피는 피를 흘리며 아물지 않고, 아물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정면으로 그 말을 듣고도 무너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고, 그것이 자신을 지탱시켜 준 것 같다. 희미하지만 안정되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눈길로 외부와 내부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위한 자신의 지지대가 되어준 마음의 부분. 은결은 그 부분을 옅게 인식하며 말한다.
“저도, 알지 못 합니다.”
은결은 그 부분의 정체는 정말로 알지 못한다. 수행은 그것이 쿠로사카라는 소녀가 말한 ‘한 줌’일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것이 그 ‘한 줌’이라면 가혹한 것이 아닐까. 수행은 스며드는 것 처럼 저린 쓴 맛을 느끼며 은결에게 미련섞인 말을 한다.
“시간은 아직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내 제안에 대해서는 계속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구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알겠다. 그만 나가보거라.”
은결은 수행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간다. 은결이 나가고 난 뒤, 수행은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자신의 책장을 본다. 여러 가지 언어로 된 많은 책들이 책장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다. 소설이거나 철학서이고, 과학에 대한 저술이거나 언어에 대한 분석이다. 지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향연. 그는 타이틀만으로 이 모든 책들을 한 줄로 이어나가는 크고 아름다운 서사를 구성할 수 있다. 그는 물처럼 시선을 흘린다.
시선의 시작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책을 태우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글이 출판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글에 대해 “막다른 골목”이라고 표현했던 것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갈 곳이 없는 정신. 그는 자살 같은 독서야 말로 진정 필요하고 중요한 독서라고 말했지만, 다른 이들이 그 골목을 맛보는 일은 원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막다름에 대해-
수행은 시선을 돌린다.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의 원서가 보인다.
-할 수 있는 답은 어쩌면 저 장중한 ‘신’에 대한 선언일지도 모른다. 신앙의 위기를 그 가운데 모두 모아 대결시킴으로서 도리어 신을 지키는 선언. 그렇지만, 막다른 골목에 대한 장중한 이 대답의 한 끝이 기껏해야 ‘위대한 슬라브 민족’이라는 오만한 특권의 선언으로 귀결될 뿐이라면-
수행은 시선을 돌려 플라톤을 찾고, 고대 히랍어로 쓰인 ‘국가’의 타이틀을 본다.
-‘정의’에 대한 시도는 저 실패했거나 혹은 숨겨진 설명으로 귀결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할 때 세상을 이끄는 원리는 기껏해야,
수행은 이어서 얇은 양장의 책을 본다. 타이틀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 이다.
-타자를 지정하는 방식의 문제, 즉, 적과 아군의 구분하는 방식의 문제로 정리될지도 모르며, 이것은-
그가 이번에 바라보는 것은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위시한 레오 스트라우스가 적은 일련의 저술이다.
-저 저술들의 저자가 플라톤에 대해 주장하는 것처럼 숭고한 거짓으로 다수를 이끄는 방식의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의에 대한 모든 아름다운 언설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선언을 숨기기 위한 어설픈 수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의견과 지식의 구분. 엘리트와 대중의 구분. 그리하여 적과 아군의 구분. 이는-
그가 이번에 보는 것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다.
-은결이가 이미 지적했듯, 근대 자유주의가 모든 개개인에게 ‘좋음’이상의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게 됨으로서 던져진 존재로서의 실존함을 마주하지 못한다는 것에 연관되어 있다. 존재를 사고하는 현존재로서 존재의 문제에 직면하게 하는 죽음의 문제를 무시한다는 것-
수행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르트르의 저술들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의 의미조차 진실로 음미하지 못하고, 고정된 존재인양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의미를-
이제 수행이 바라보는 것은 소세키의 ‘마음’이다.
-타자에게서 얻어내게 될 뿐이 됨으로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은 벗어나기 힘든 질곡이 되고 말았음을 생각할 때, 냉혹한 ‘현실’의 모습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시선을 흘려 이제 수행이 바라보는 것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다.
-본디 타자는...
‘그만, 두자.’
고개를 흔들고 수행은 시선의 흐름을 멈춘다. 비탈을 구르는 눈처럼 거대한 서사가 되어가던 텍스트의 흐름은 거기서 멈추고 만다. 언제까지고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크고, 크게, 아름답고, 멋지게. 하지만 그러하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일까? 그런 지성으로도 자신의 아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충분히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 그는 손을 손으로 가리고 눈을 감는다. 뜨거운 콧김에 손끝으로 습기와 함께 느껴진다. 손의 감촉. 은결이가 했던 이야기가 손끝의 감촉처럼 뚜렷하게 떠오른다.
‘여기서 ‘손’은 자신의 자유로 타자의 자유를 성립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을 벗어나는 최종적인 가능성의 양태가 아닙니다. 도리어, 손은 ‘타자’에 대한 굴종의 최종적인 양태를 드러냅니다. 어떠한 확실성도, 어떠한 기반도 마련하지 못했기에, 온전히 타자의 행위에 맞춰 자신을 재단하기 위해 얻게 된 궁극적인 보편성의 모습일 뿐입니다!’
손은 자유인가? 그렇지 않으면 손은 은결이가 말한 것 처럼 타자에 대한 굴종인가? 수행은 양자 모두이거나 양자 모두 아니라고 여긴다. 그는 다시 책장으로 시선을 던진다. 책장의 모서리 쪽에 비트겐슈타인 전집이 있다. 논리철학논고, 철학적 탐구, 확실성에 대하여, 라는 세 글이 다른 글들과 함께 늘어서 있다. 그것들을 보면서 수행은 생각한다.
“......”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론화 불가능하거나 지극히 어려운 삶의 영역들이 있다. 그러하기에 한담을 멈추고, 다만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것들이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드러나길 기다리거나 기대하기엔 너무 소중한 것들도 있다. 수행은 자신의 작업이 후자에 속한다고 여긴다. 이론의 소중함은 그것이 특수한 사태를 보편적인 것으로 바꿈으로서 특수한 것을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특수함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가 공유하도록 할 수 있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수행은 장래 그렇게 되길 기대하지만 현재의 모든 이들이 조시마 장로와 같은 이가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음을 이해한다.
그는 다시 은결을 생각한다. 그 아이의 성장과, 지금의 모습과, 앞일을 생각한다. 수행의 감은 눈 한쪽 끝으로 차분한 한 방울의 눈물이 흐른다.
“......”
그는 이 눈물이 ‘스스로 드러나는 신비’의 한 형태임을 안다.
박수행은 박은결의 아버지다.
*친부살해 선언이군요. 이렇게 되면 제가 계획했던 것 보다 이 글은 훨씬훨씬 신화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로이트는 문학사 3대 걸작으로 까르마조프, 오이디푸스 그리고 햄릿을 꼽습니다. 이들 작품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은 ‘부친살해’죠. 프로이트답다고 할까.
*이 다음에 글을 쓰면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의 알렉 같은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경우 어지간하지 않고선 히로인이 강한 자기 색을 가지기 어렵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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