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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69화 (269/300)

#   270-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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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수행의 눈을 본다. 시선. 아버지의 시선. 은결에게는 그 누구에게 보다 의미 있는 시선. 그 시선이 기뻐하는 것을 보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 시선이 칭찬하는 것을 보기 위해 노력했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러한 것 처럼 은결에게도 자신을 규정하는 시선이 있었고, 그 시선은 지금 이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내의 시선이다. 은결은 아버지의 시선은 무척이나 민감하게 느끼면서 이야기를 잇는다.

“...그들이 그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인정받아야 한다는 당위를 제가 말하지 않는 것은, 이 ‘당위’가 옳지만 실제로 또한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에 속한 모든 개인을 산산이 흐트러뜨리고, 해체시키는 힘을 가집니다. 이 논리를 인정할 경우 우리는 아무도 내가 좋기에 이것을 하겠다는 이에게 다른 것을 하라고 이야기 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개인에게 ‘좋은’ 것 만이 진실로 ‘좋은’ 것일 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종결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특징이 욕망한다는 것인 이상, 개인이 공동체에 떨어져 자신의 행위에 홀로 만족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지만-”

은결은 이야기를 하면서 시큰하게 가슴이 아픈 것을 느낀다. 쭉 홀로 있었고, 쭉 견뎌왔지만 사실은 그런 것을 진정으로 바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쭉 바래왔던 것을 얻어냈다 생각했던 순간, 그것은 손의 거죽을 뜯어내며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흘리는 뜨거운 피를 느낀다.

“-특정한 개인이 그것을 ‘좋다’고 본다면 여기에 굳이 반론하면서 그를 공동체로 끌어와 모두와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폭력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모든 개인이 단지 자신이 ‘좋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할 경우, 이때 무수한 개인을 연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적인 고리는 욕망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눈을 감는다. 은결이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 알 수 있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과거에도 쭉 알고 있었다. 은결이 투쟁하고 싸우는 문제는 바로 수행 그 자신이 껴안고 살아왔던 문제이기도 했다. 깊게 숨을 쉬면서 그는 아들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타자군.”

“-그렇습니다... 타자만이, 남습니다.”

은결은 크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타자만이 남는다.’ 어떤 대의나 이념도 초월해 각자의 ‘좋음’에 따라 각자의 고치에 파묻힌 이들은 거기서 끝난다. 그들은 집결하지 않는다. 이들의 반대편에 그 ‘좋음’을 통해 집결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좋음’은 욕망이다. 기게스의 반지라는 우화가 보여주듯, 욕망은 제어될 수 없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 공유지쯤 파괴되는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신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그 파괴를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선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선으로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뿐이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선이라던가, 정의와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개인의 연합일 뿐이지만, ‘좋음’에 굴복한 개인들은 각자의 ‘좋음’에 열중한 채, 피곤하고 지루한 ‘대의’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알게 뭐란 말인가. 글라우콘의 질문은 대답되지 못했고, 남아 있는 것은 ‘욕망’일 뿐인데. 고로 이기를 위한 ‘욕망’만이 추구되며, 욕망하는 자들을 막기 위한 대의 아래 집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로서 ‘역사’는 끝났고, 공유지의 파괴는 막을 수 없다. ‘좋음’을 추구하는 개인들을 최고의 원리로서 인정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지닌다.

“...거기서 주체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주체는 다만 타자의 흐름에 맞춰 자신을 재단해야 합니다. 타자에 앞서 효율적이 되어야 합니다. 타자에 앞서 이기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할 수 없다면 효율적인 타자의 행동에 맞춰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을 포기하고 타자의 선택을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여야 할 뿐입니다. 그래서 ‘좋음’이 승리하는 세계에서 주체에게 남아 있는 길은 자신을 ‘타자’화 해서 타자에 맞서는 길 일 뿐입니다. 이곳에서는 비극만이 재생산될 뿐입니다...”

“......”

수행은 다만 듣는다.

“고로, 그것이 비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상을 말해 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감각적인 ‘좋음’을 최고 원리로서 인정함으로써 그런 일을 함께 인정하?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제 손에 아무 것도 쥐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입에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염원하는 것은 소외 없는 노동. 피그말리온의 신화가 모든 이의 일상이 되기를. 그러나 피그말리온의 신화가 모든 이의 일상이 되기 위해, 피그말리온의 신화는 포기되어야만 한다는 역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기 위해, 신이라는, 낙원이라는, 진리라는, 확실성이라는, 슈퍼에고라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해야 한다는 모순.

“......”

수행은, 여전히 듣는다. 은결은 수행을 본다. 그의 눈을 본다. 자신의 향하는 아버지의 눈빛을 느낀다. 가라앉은 호수의 푸르름처럼, 아득하다. 그는 그 평온함에 문득 뜨거움을 느낀다. 저 가라앉은 눈빛으로, 이 거인은 어떤 글을 썼던가. 은결은 마음속으로 그의 글이 마지막에 이야기 하던 것을 되새겨 본다. ‘우리가 우리의 연대를 위해, 그 연대로 이루어질 다른 세계를 위해 진정으로 대결해야 하는 것은 자본도 국가도 아닌 우리들 자신일지도 모른다...’ 대결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 타자를 욕망하는 우리 자신. ‘너는 나를 창조했다.’ ‘이제 아는 척 하지 말자.’고 말하고야 하는, ‘내 편’이라고 말하고야 마는, 그런 슬픔들.

일그러진다.

모든 것이.

치미는 뜨거움은 이내 달아올라 고통과 함께 속을 태운다. 은결은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문다. 그리고 아버지의 눈을 보면서 뚜렷하게 말한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 당신이, 그런 글을 적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은결은 스스로 놀란다. 자신의 발언에는 뚜렷한 ‘증오’의 감정이 아로새겨져 있다. 아버지에 대해 자신이 언제 이런 감정을 품었던가 놀랐을 정도로, 그것은 검고 깨끗한 적의였다. 하지만 은결은 자신의 토해진 감정을 철회하지 않는다. 그것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간다.

“이 세상 다른 사람이 모두 그런 글을 적더라도, 아버지는, 그런 글을 적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외의 다른 것이 불가능 했다고 해도, 그런 글을 적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아버지 당신만은, ‘역사의 끝’을 인정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수행은 '그런 글'이 무엇인지 단번에 이해한다.

“오해하고 있구나. 역사의 끝을 인정한 적은 없단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은결은 그 말을 인정할 수 없다. 아니라니! 치솟는 뜨거움에 몸을 맡긴다. 그는 이것이 ‘분노’라는 것을 명백히 이해하고 있다.

“아니라니요! 그렇다면 어째서 파블로프가 우리의 희망이 아니란 말입니까? 파블로프가 우리의 희망일 수 없을 때에, 역사는 어쩔 수 없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파블로프가 우리의 희망일 수 없을 때,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했던 것 처럼 야생의 논리는 문명의 논리와 차등이 없고, 무한을 향해 치솟는 정반합은 무의미하기에, 이 지점에서 변증법적 역사관은 붕괴합니다. 슈퍼맨은 침묵해야 하고, 기게스의 반지는 반박되지 못하기에, 트라시마코스가 이야기한 것 처럼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 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계시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싸워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기호이론의 최종 심벌이 품는 의미의 전혀 다른, 어쩌면 진실된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손’은 자신의 자유로 타자의 자유를 성립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을 벗어나는 최종적인 가능성의 양태가 아닙니다. 도리어, 손은 ‘타자’에 대한 굴종의 최종적인 양태를 드러냅니다. 어떠한 확실성도, 어떠한 기반도 마련하지 못했기에, 온전히 타자의 행위에 맞춰 자신을 재단하기 위해 얻게 된 궁극적인 보편성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에 맞춰 자신도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손과 이성과 언어라는 트리니티는 타자의 승리를 증거하는 최고의 물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수행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슬프게 은결을 본다. 슬픈 아버지의 눈길을 은결은 피하지 않는다. 그는 죄책감과 분노가 뒤섞인 혼란 가운데서 아버지의 시선을 마주 응시한다.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당신을 미워합니다. 왜 당신은 무너졌습니까! 당신은 무너져선 안 되었는데!

은결은 자신의 감정에서 심한 모순을 느낀다. 그러나 모순을 알면서도, 감정은 멈춰지지 않는다. 수행은 말한다.

“은결아, 언젠가 네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예전에, 나는 분노로서 세상을 보았다고. 하지만 돌이키건데, 그런 분노는 ‘틀린’ 것이었다고. 분노로서 세상을 보며 그것을 틀렸다고 이야기한 이유는 분노라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분노는 저열할지라도 언제나 ‘정의’와 연결되어 있는 감정이고, 정의를 추친하는 중요한 힘이기도 하기에, 그것이 없다면 세상은 끝없이 비참해진다. 문제는 ‘진실’이다.

너도 알 것이다. 분노는 그 자체로 성립하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특정한 사실 위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감정이지. 강한 분노의 문제는, 이 감정의 뜨거움에 그것이 서 있는 사건이라는 기반이 일그러지고 녹아버릴 수 있다는데 있다. 인식은 저열하기에, 분노가 사실을 보게 만들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언제나 비판했고 걱정했던 것은 그러한 왜곡이었다. 타오르던 분노가 진정되어 그 기반의 흉물스런 꼴을 보게 되었을 때, 정당했던 다른 분노들 역시 모두 함께 부정되는 것을 나는 걱정했었다.

그러니까 은결아, 내가 파블로프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어쩌면 테제 3번을 부정하는 것은 역사를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최대한 가능한 ‘역사’를 얻어내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이상을 쓰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금언을 어기는 꼴이 될 뿐임을 너도, 그리고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넘어서는 것들은 스스로 드러날 뿐이고, 그것이 진정으로 신비로운 것이다. 우리에겐 침묵의 기회조차 흔하지 않다. 침묵할 수 있을 때조차 침묵하지 않는다면, 유일하게 올바른 철학하는 방법을 스스로 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

말이 토해지지 않는다. 마음은 ‘그래도’를 말하지만 아버지의 이야기에 은결은 ‘그래도’가 끼어들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래도’의 열망은 크고 높다. 그는 아버지만은 자신의 ‘그래도’를 인정해 주고, 받아들여 주고, 극복해 주기를 바란다. 염원한다. 기대한다.

무의미한 것을 앎에도.

수행은 계속 말한다.

“은결아. 나는 신도 아니고, 역사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다. 나는 그저 네 아버지일 뿐이지. 그것이 나의 대답이다. 이것으로 부족하겠느냐?”

“--부족하지, 않습니다.”

겨우, 은결은 말한다. 갈망은 채워지지 않지만, 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의 이성은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은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내 제안에 대한 너의 대답은 무엇이냐?”

아무런 갈 곳이 없음을 이해하면서 은결은 말한다.

*답하지 않은 이유는 본문에 이미 사용자가 재생능력을 임의로 조절할 수 있고, 복구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부분이 있음을 드러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성독자분도 있을 테고, 그런 이야기에 거부감을 가지시는 분도 있을 테니 과한 이야기는 피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반기는 것처럼 잡담을 썼던 저부터 반성하겠습니다.

*감상이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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