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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63화 (263/300)

#   264-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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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공부가 되질 않는다. 독서실을 빠져나와 마음에 들지 않는 탄산음료를 들이키며 민성은 자신의 심정을 속으로 토로한다. 왜 공부가 되질 않을까. 하긴 언제는 열렬히 공부해 보았던가. 뜬 구름 같은 마음은 문장의 다음을 이어 문장을 잇고, 이어진 문장이 단락이 되어 정보로서 머릿속에 들어차기 전에 ‘다른 것’을 갈구해왔다. 평소, 언제나 그러했다.

하지만 이 집중력의 부재는 평소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는 것을 민성은 잘 알고 있었다. 평소의 마음이 구름처럼 들뜨며 다른 즐거움을 향해 곁눈질 하는 것이라면,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공부’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 집중이 공부함이라는 행위가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에 가 있는 것이 문제였다.

말하자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한 압도적인 공감이 무게가 되어 도리어 공부한다는 행위를 막고 있는 꼴이었다. 그래. 공부는 아무래도 필요하다. 하지만 공부가 왜 이토록 뚜렷하게 내 근처로 다가온 것일까. 더구나 이렇게 늦게, 그리고 비참하게. 그는 그 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바라보지 않는다. 마주서지 않는다. 옆으로 물러서고, 다른 것을 향한다. 그는 차가운 캔의 음료를 마셨다. 탄산의 기포가 입안으로 퍼지며 튀어 오르는 맛의 자극은 넓게 깔린 관념을 지금의 자극으로 지워버린다.

입안으로 들어오던 액체가 멈춘다. 캔이 비었다. 마음이 비었다. 민성은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독서실의 문을 연다. 부드럽게 데워진 온기가 안에서 공부하는 이들의 날선 긴장과 함께 흘러나왔다. 민성은 그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면서, 느낀다. 어떤 자극으로 그것을 지워도, 피부위에서 말라붙은 땀의 불쾌한 소금기처럼 어딘가에서 계속적으로 그것을 자신이 실은 ‘알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 온다. 숨을 쉰다. 후- 그리고 하- 이렇게 절실하게 공부가 중요하다고 느껴지다니, 몇 년 만에 해본 생각인지 모르겠다고, 민성은 쓰게 웃으면서 생각한다.

“-음. 오늘이 시험 마지막이군.”

나른한 표정으로 고릴라가 말한다. 창가에서 흘러들어오는 아침 햇살은 밝고 경쾌했다. 옆에 앉아 있던 늑대가 약간의 짜증을 섞어 그 말을 받는다.

“은결 녀석 잘난 척 하는 꼴도 오늘만 보면 되겠고.”

“말을 뭐 그렇게 하냐. 그 녀석은 그냥 잘난 거지, 잘난 척 하는 게 아냐.”

여우가 혀를 차며 지적한다. 늑대는 “아, 예. 알겠습니다. 어련하시려고.” 라고 건성으로 그 말을 받으며 양 손을 뒤통수로 가져가며 중얼거린다. “그나저나 끝나면 뭐하고 놀지?” 민성이 답한다. “피씨 방에나 갈까. 지는 쪽이 햄버거 사기 어때?” 여우가 일당에게 핀잔을 준다. “아직 시험도 안 끝났는데 벌써 놀 생각이야?” 고릴라가 비웃는다. “그렇게 말하시는 분은 왜 시간을 아껴가며 자기 책상에 안 앉아있고 이런데서 놀고 계시는지?” 할 말이 없었던 여우는 “큼.” 하고 말을 죽였다가 변명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은결이라던가, 쿠로사카라던가 와서 얘기하는 게 좋지 않겠어. 친군데 쏙 빼놓고 얘기할 순 없잖아.”

“그것도, 그렇군.”

민성은 약간 무력한 어조로 여우의 말에 동의한다. “어디 아프냐?” 늑대가 묻는다. “그런 건 아냐. 뭐라고 할까-” 민성은 여전한 어조로 그 말을 받는다. 거기 맞춰서 평소 민성에게 많이 당해왔던 고릴라가 이죽댄다. “안 어울리게 가을타냐?” 늑대와 여우가 큭큭 거리며 웃는다. 민성도 쓴맛이 느껴지는 웃음으로 그 농담을 받아넘기고 만다. 타고있는 것은 가을보다 크고 무서운 것이다. 고릴라는 약간 위화감을 느낀다. 평소라면 여기서 그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해서든 말을 되돌려 왔을 텐데. 그리고 문이 열리고 쿠로사카가 들어온다. 오늘은 은결이 가장 늦을 모양이다.

“(좋은 아침.)”

쿠로사카가 먼저 웃는 얼굴로 인사한다. 다들 손을 흔들어 보이며 그 인사를 받는다. 평소보다 약간 더 밝은 그녀의 인사에 어제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라고 민성은 느낀다. 기회다, 라고 마음 속으로 그는 이야기한다. 곧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은 그녀가 일당들의 자리로 온다.

“시험공부 하지들 안고, 뭐해?”

발음은 명확히 하기 위한 어색한 억양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 보다, 그녀의 출신을 도리어 한결 명확하게 한다. 일본인. 가벼운 저항감이 듣는 이들 모두의 마음에 정전기처럼 퍼진다. 그것은 이내 그녀 개인의 성품과 아름다움에 대한 호의, 그리고 타인에 대한 각자의 각인된 예의, 혹은 공포 같은 것들과 맞물린 덩어리에 깨끗이 지워진다. 모두들 가볍게 그 차이를 이해한다. “그저 그렇게 지내고 있어.” “오늘 시험 다 치면 뭐하고 놀까- 하고 의논했어.” 따위의 말이 대답처럼 돌아온다.

“흐응.”

쿠로사카는 슬몃 웃는 얼굴로 근처의 자리 하나를 잡으려 한다. 그때 민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말한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겠어?”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교실을 빠져나간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릴라와 늑대는 응원하기도 그렇고, 저주하기도 마땅지 않다는 미묘한 표정을 했고, 여우는 이죽거리며 잘 불지도 못하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 외의 학생들, (대다수가 남자였는데) 중에서도 그 두 사람이 함께 교실을 나서는 모습을 호기심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적지 않게 이들이 있었다.

“무슨 일이야?”

대화의 장소로 민성이 선택한 것은 그저 복도였다.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어색한 억양으로 쿠로사카가 물었다. 만일 민성이 고백이라고 하려 했다면 이런 곳에서 이야기를 꺼낼리는 없을 테니까. 민성은 한동안 머리를 긁고, 숨을 반복적으로 쉬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다가 겨우 말을 꺼낸다.

“음, 전에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했잖아. 사실은 있지?”

쿠로사카는 돌연한 질문에 흠칫, 몸을 물린다. 며칠 전에 그와는 ‘마음’에 대한 감상을 나누던 중에 이 주제로 필담을 나누었다. 자신은 그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냐.’라도 답했다. 그때는 은결에게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 않았던 때였다. 어떻게 답하면 좋을까, 라고 쿠로사카는 자문했지만 답은 금세 돌아왔다. 본인에게도 이야기했다. 주변에 밝히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녀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잇어.”

민성은 고개를 끄덕인다. “있구나.” 차분한 마음은 놀라지 않는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내심은, 확신하고 있었다. 정말 알고 싶은 것은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는 가 없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민성은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큰 지진을 느끼며 진실로 알고 싶은 것을 묻는다.

“그거, 혹시 은결이야?”

아아. 지난주부터 무슨 일이람. 이라고, 쿠로사카는 내심 탄식 같은 것을 폭발시킨다. 왜 이런 종류의 일에 많이 접하고, 또 이런 종류의 대화를 많이 해야 하는 걸까. 심장과 마음이 피를 토해내는 것만 같아.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뜨겁고 무서운 사실들인데. 그녀는 화난 말처럼 다급하게 날뛰는 자신의 마음을 잡아 안정시키기도 힘들었다.

“그, 건...”

우물쭈물. 밝혀야 할까, 그렇지 않으면 말아야 할까. 마음이 복잡하게 오갔다. 밝혀도 상관없을 것 같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은결은 세연과 사귀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자신이 좋아한다는 게 알려지면 그다지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고려와 고려가 이어졌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답변없이 시간은 흘렀고,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 끄덕임과 함께 그가 꺼낸 말은 그랬다. 뭐가, 그렇다는 거야? 쿠로사카는 놀라며 그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뭐가’의 의미는 그녀 역시 안다. 자신만만한 답을 답안지를 보고 확인하듯, 민성은 ‘역시’의 내용을 꺼낸다.

“너는 은결을 좋아하는구나.”

“-응.”

확신에 물든 진지한 어조였다. 쿠로사카는 속여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붉은 얼굴로 솔직한 마음을 인정한다. 민성은 쓴 웃음을 짓는다. 이어서 설득하듯 말을 꺼낸다.

“하지만 그 녀석, 여자친구 있다구. 굉장히 예뻐.”

“한, 국에는 이런 마리 있자나. 골키파있다고, 골이 안 들어갈까.”

어느 정도는 자포자기와도 닮은 마음으로, 쿠로사카는 솔직하게 답한다. 민성은 그 대답을 듣고 “그야, 그렇지.” 하고 말한다. 그야 그렇지. 마음은 ‘그렇지.’의 마침표에서 단절되지 않는다.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갈까. 그녀의 말은 옳다고 민성은 느낀다. 골키퍼가 모든 공을 막아내는 존재라면 축구라는 게임은 성립하지 않아. 모든 수비가 공격에 대해 무적이라면 경쟁은 성립하지 않아. 하지만 모든 공격수가 골을 넣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초등학생의 공을 프로 골키퍼가 통과시킬 리는 없는 거잖아. 골키퍼 있다고 공이 안 들어갈까! 단호하고 강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줌도 안 돼. 그리고 그 말을 성공시키는 사람은, 다시 거기서 한 줌이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 더구나 이건 골키퍼 없어도 공을 넣기 힘든 게임이야. 이 게임의 골대는 자기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이는걸. 못 넣는다고, 게임을 포기한다고 비웃지마. 그렇게까지 이기고 싶은 게임 따윈 아냐. 제기랄, ‘마음’은 이런 내용이었군.

“그럼, 응원할게.”

생각을 지우고, 망설임 없이, 미련도 없이 민성은 증류수처럼 말했다. 쿠로사카는 볼을 붉히며 그에게 말한다.

“고마워. 다른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부탁해.”

“응.”

다음 순간에, 문득 생각난 듯이 쿠로사카는 그에게 말한다.

“다음에, 다시 같은 책 읽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음, 미안.”

농담처럼 쿨한 얼굴로, 민성은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민성에게는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얻고 싶은 것은 없었다.

*쿠로사카와 수행의 대화 장면이 예상했던 것의 두 배 정도가 나와서 다른 것들도 균형을 위해 챕터 전체가 좀 더 길어져야 하는 곤란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캐릭터가 살아있다. 라고 이야기 되는 특징들은 이런 면에서 캐곤란합니다.

*저는 이 글 캐릭터 가운데 여우가 저랑 제일 많이 닮았다고 여깁니다. 저 같은 인종은 은결이나 수행 같은 인종이 20-30대 정도에 쓴 책 붙잡고 70때까지 읽고, ‘괜찮게 읽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엄청나게 성공한 인생이겠죠. 사실 ‘책 붙잡고 70까지 읽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만 해도 성공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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