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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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그녀의 말을 음미하듯 잠시간 침묵한다. 그리고 턱을 손 위에 올려다 대고, 검지로 볼을 짧은 간격을 두고 친다. 시계의 초침 같은 규칙적인 그 움직임은 공간의 리듬을 재어 사고를 가져다 놓을 위치를 가늠하는 양 싶은 동작이다.
맞은편에서는 마음이 흐려지는 한 순간을 노리는 호랑이의 이빨을 닮은 논리와 언어의 홍수- 가 넓고 깊은 눈동자 저 편에서 언듯 언듯 보이는 것 같다, 고 쿠로사카가 느끼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쿠로사카는 자신의 마음을 위로한다. 자신에게 솔직한 말을 했어. 자신에게 거짓 없는 말을 한 이상, 그것은 내 말이야. 자신의 말이 돌려올 반향을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어.
“(-자네는 정말로 은결을 좋아하는군.)”
결국 침묵을 끊어내고 조용한 무게를 담은 말이 흘러나왔다. 평화로운 말이었다. 하지만 쿠로사카는 예리한 논리와 높은 감정의 홍수보다도 무겁게 그 말에 침몰하고 만다. 시선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수행은 한층 깊게 웃는다. 어쩌면 이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알고는 있었는데. 그날 밤, 은결에게 이 아이를 맡겼을 때, 그 때 말이다. 대견함과 애절함, 쓰림과 따스함- 같은 것들이 마음 가운데서 소리를 내며 솟아오른다.
“(하지만 지금 한 말의 무게를 알고 있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고 쿠로사카는 답했다.
“(은결은 자네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때는, 친구로서 그를 도울 뿐입니다.)”
“(친구라.)”
그럴 리가. 라는 어조로 수행은 ‘친구’라는 말을 반복해 본다. 그 반복의 뜻을 안다는 듯이 쿠로사카는 살짝 오연하게 웃으며, 여전히 볼은 붉힌 채, 의미심장하게, 어떤가요! 하면서 입을 연다.
“(그리고, 한 두 번 차인 정도로 물러설 만큼 부드러운 성격은 아닙니다. 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될 때 친구라는 것은 어쩌면 좋은 허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미소를 수행은 보인다. 찬란한 대답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찬란함을 산산히 부술 수 있는 질문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미래에 자네가 은결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지.’ 역사의 끝에 걸려있는 가정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 그렇지만 말해야만 하는 것들. 말할 수 없는데, 말을 요구하는 것들. 던져볼까? 그런 다음, 그녀를 무너뜨리는 것은 얼마나 간단하고 쉬울까. 찬란하게 박동치는 저 마음에 회색 재를 뿌리는 것은 얼마나 간단할까.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만두자. 그런 것은 사디즘에 불과하겠지. 그녀의 마음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아프게 얻은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기에 ‘견딜만한 것을 보람찬 것으로 바꾸어 보겠다.’는 마음. 수행 역시 은결이 그 아픈 시간 가운데 키웠을 것을 지키고 싶다고 느낀다. 분열증적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지만. 그래서 그는 순수하게 소녀를 위해 조언한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충고하도록 하지. 나는 은결이가 말을 하는 것을 처음으로 들은 사람이네. 내 손으로 한글의 한 글자 한 글자를 가리키며 그 아이에게 글을 가르쳤고, 작은 손에 손을 겹쳐 글씨를 가르쳤네. 함께 책을 읽고, 아이의 질문에 답하고, 그 아이의 슬픔과, 기쁨을 하나하나 일일이 바라보아 왔지. 나는 그 아이의 가장 아름다운 웃음과, 가장 서글픈 울음을 또한 뚜렷하게 기억하고, 그 울음을 내 소매로 닦아주며 얼렀지. 나는 또한 배움이 성숙해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펼치는 은결에게 대견함을 느꼈던 것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네. 그런 행위에 겹친 기억의 쌓임으로서, 은결이 이 시간에 도달하기 까지를나는 누구보다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네...)”
그 말을 들으며 쿠로사카는 그것이, 나는 은결의 아버지다. 라는 설명이라고 느낀다. 기쁨과 설레임과 슬픔과 우려와 대견함이 한 곳에 엉켜 시선이 투명한 화면이 되어가는 듯한 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웃음과 함께 수행은 말을 끝낸다.
“(...그렇지만, 나는 은결이를 잘 모르네.)”
'よく分からない' 쿠로사카는 마음 한 구석에서 둔중하게 걸리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은결은 쿠로사카를 배웅하러 밖으로 나갔다.(미래 몰래) 방을 나온 수행은 거실에 앉아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다.
“꽤 오래 이야기 했구나. 어떻더냐?”
“아버지가 이겼습니다. 설득당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제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까지 하더군요. 당차고 좋은 아이였습니다.”
쓰게 웃으며 수행은 말한다. 자신이 ‘아프게 얻은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기에 ‘견딜만한 것을 보람찬 것으로 바꾸어’ 그가 얻었을 것을 지켜보겠다고 말한 소녀의 맑고 강인한 눈망울이 기억난다. 설마 그런 어린아이의 말에 마음에 움직일 줄이야. 하지만 진심이 진실과 맞물린 언어의 울림에 나이는 무관하다. 랭보의 시가 늙은이의 것이라 영롱한 아름다움을 품는 것은 아니다.
“역시 그렇지?”
기쁜 듯 웃으며 할아버지는 말한다.
“그렇지만, 그 아이의 이야기에 찬성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감히 그것까지 기대할 수 있을까. 네 용인을 얻어낸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선택하는 것은 은결이 아니더냐. 너나 나, 그리고 그 아이의 생각 같은 것은 모두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지.”
“물론 그렇겠습니다만...”
수행은 희미하게 말꼬리를 흐린다. 쿠로사카에 대한 자신의 대응이 최선이었던지 확신은 서지 않았다. 그렇지만, 역시 그 어리고 찬란한 소녀의 마음을 산산이 바스러뜨리지 않은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믿는다.’ 그래서 그것이 역사의 끝에 걸려 있는 자들의 한계라고 해도 말이다.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밤길을 함께 걸으며 은결은 은근슬쩍 묻는다. 쿠로사카는 으- 하고 신음 같은 것을 흘린다. 피가 역류하는 것 처럼 얼굴이 뜨거워진다.
“(아, 무것도 아냐.)”
“(아버지는 가벼운 이야기를 즐기는 분이 아냐.)”
은결은 의아한 얼굴로 지적한다. 그가 아는 수행은 농담을 즐기지 않거나 위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없는 소리를 한 적이 없다. 더구나 단 둘이서 독대를 하면서 실없는 소리를 했을 리가. 쿠로사카는 이 짜증스런 둔탱이에게 버럭 화낸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냐!)”
“(아, 알았어.)”
서슬 퍼런 기색에 은결은 뒤로 물러선다.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잘 모르겠다. 무슨 창피한 대화라도 나눈 걸까? 하지만 창피한 대화라 할 만한 것들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중 아버지가 입에 올릴 만한 것은 더욱 알 수 없었다. 은결은 여기서도 상상력의 한계를 느낀다. 결국 다시 말 없는 걸음걸이의 교환이 지속될 뿐이었다.
“......”
“......”
희미한 달빛 아래, 또 다시 희미한 가로등의 불빛 아래, 어깨를 마주 하고, 소년과 소녀는 조용한 걸음을 걷는다. 은결은 문득, 참 괜찮구나. 하고 느낀다. 침묵이 결여를 보담아 따스하게 채워주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저기- 말야.)”
갑자기 기분 좋은 침묵을 깨고 쿠로사카가 입을 열었다.
“(응?)”
“(언제든 괜찮으니까, 어려운 일, 있으면 얘기 해.)”
은결은 피식 웃는다.
“(뭘, 새삼스럽게.)”
“(새삼스럽게가 아냐. 너는 정말 짜증스러울 정도로 자학적이니까. 혼자서 끌어안지 마. 이야기 해. 나는 무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최소한 들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어.)”
날선 각오가 깃든 말이라고, 은결은 느낀다. 아, 하고 그는 깨닫는다. 아버지가 유리에와 나누었던 대화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그는 조용하게 웃으면서 깊게 이야기한다.
“(나는, 네 이야기를 듣고, 네 행동을 보고, 친구들에게 나를 이야기했어. 너는 믿지 않을지 몰라도, 내게는 굉장히 큰 걸음이야. 그것으로 부족해?)”
“(-음.)”
부족하지, 않다. 은결의 이야기에 쿠로사카는 큰 기쁨을 느낀다. 그녀 역시 이 바보가 요 며칠간 보여주었던 걸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이해하고 있다. 수행 앞에서 당당하게 ‘견딜만한’을 넘어서 ‘보람찬’ 것으로 까지 바꿀 수 있다고 외친 것은 그러한 성과 역시 큰 보탬이 되었다. 그는 나와 만나 바뀌었어. 하지만 역시 불안하다. 이해하지 못한 수행의 마지막 조언에서는 희미한 위기의 내음을 맡는다.
‘잘 모른다.’
왜 수행은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건, 자신이 은결을 진실로 이해할 때만이 스스로의 선언을 진정으로 지킬 수 있게 될 거라는 예언인 것일까? 그런 것이라면 상관없어. 노력해 볼 테니까. 쿠로사카는 자신의 마음을 향해 고했다. 어느덧 버스 정류장이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그 틈새에 끼어들었다. 몇몇 이들이 그들을 힐끔 쳐다보기도 하는 가운데 곧 버스가 도착했다.
“(음, 그럼 내일 봐.)”
“(그래.)”
그렇게 단촐한 인사를 나누고, 그리고 두 사람은 떨어졌다. 쿠로사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칙- 하는 압축 공기 소리를 내뿜으며 문이 닫혔고, 버스는 둔중한 동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쿠로사카는 창문으로 은결을 봤다. 그는 잠시간 서 있다가 등을 돌렸다.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다. ‘이제까지 친구가 없었으니까.’ 단지 수행의 그 말을 듣고 난 뒤라서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쓸쓸함을 짊어지는 것이 그의 등은 아닐지라도, 그가 줄곧 쓸쓸했던 것은 부정할 길 없는 사실이다. 그는 그 쓸쓸함 가운데서 어떤 것을 아프게 쥐었을까? 때문에 은결의 등을 보면서 쿠로사카는 언제고 그가 쥔, 혹은 쥘 작은 한줌을 보고 싶다고, 그래서 지키고 싶다고 느낀다.
*만면귀님의 추천에 감사! Spieluhr님의 호평에도. 노력해서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후후후후.
*이번 화는 적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문장이나 장면을 절제하는 것은 의외로 짜증스런 작업입니다. 음-_-;
*요즘 선생님 소개로 유학생에게 중국어 강습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아가씨가 한국어를 잘 몰라서 순 영어로 수업을 하고 있다는 것.(...) 아 놔. 중국어보다 영어 듣는 시간이 훨씬 많네효. 버벅버벅. 어쨌거나 중국어가 적당히 해결되면 드디어 독어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다스 카피탈!
*성원!(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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