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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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늦었네?)”
교실의 아이들이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책상을 옮기며 부산하게 시험칠 준비를 하는 가운데 은결은 옆 자리의 쿠로사카에게 물어본다. 그녀는 조례 시간을 넘기고서야 교실로 들어왔다. 드물게 지각한 셈이다. 은결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그녀에게 물어볼 기회를 찾고 있었다. 돌아온 대답은 담백했다.
“(할 일이 있었어.)”
“(뭔데?)”
“(그건... 다음에 이야기 해 주지.)”
약간 망설이는 뜸을 두고 쿠로사카는 대답을 피한다. 은결은 호기심을 느끼지만 채근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말해줄 것이고, 아니라면 말하지 않을 것이다. 쿠로사카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응.)”
“(그보다 너는 괜찮아?)”
쿠로사카가 진지한 얼굴로 물음을 되돌린다. 은결은 웃으면서, 그러나 웃음 끝으로 쓴맛이 배어 나오는 미소로, 그녀에게 이야기한다.
“(응. 여우가... 웃으면서 이야기 해 줬어. 내가 재수 없다고. 하지만 그런 걸 포함해서 친구라고. 너처럼 말야. 나는, 그런 거 도저히 못할 거 같은데.)”
“(가능한 부분에서 솔직해 지는 것 뿐이야. 도저히 못할 건 뭐가 있어. 나는 훨씬 더 어려운 것도 네게 솔직하게 이야기 했잖아.)”
은결은 피가 얼굴로 몰리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한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쿠로사카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쿨뷰티라는 형용이 그녀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세상을 다 뒤져도 얼마 없을 듯하다. 그는 이어서 진심 위로 진심을 덮어 말로서 마음을 돌린다.
“(솔직해 지기- 라. 잘, 모르겠어.)”
“(나도 잘 몰라. 그렇게 많은 것을 아는 네가 모르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어? 그래도 덕분에 네게 이야기 할 수 있었어. 만일 말하지 않은 채로 쭉 지내 왔다면 나는 그저 너를 싫어하고, 열등감을 느낄 뿐이었을 거야.)”
쿠로사카는 그렇게 말한다. 은결은 그녀의 이야기를 되씹어 생각한다. 떠오르는 ‘하지만’에 목이 메인다. 마음이 말에 걸려 넘어지는 느낌이다.
정연하게 책상이 줄을 맞추고, 아이들은 고요하게 그 앞에 앉았다. 그들의 앞에는 배부된 회색의 시험지와 건조한 답안지가 놓여지고, 침묵 가운데 펜을 놀리는 소리만이 꾸준하다.
은결도 그 고요의 행렬 가운데 앉아 펜을 들고 시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와 답의 항목을 바라보면서, 그는 어쩐지 허망한 기분을 느낀다. 1이거나 2이거나 3이거나 4이거나 5이거나, 혹은 그들 가운데 몇 가지의 조합이거나. 어쨌거나 이들 문제는 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선택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해 주기만 하면 아무런 염려 없이 ‘옳다’는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답한 자가 그 답을 어떻게 여기든, 문제 낸 자가 그 답을 어떻게 생각하든, 특정한 선택은 다른 것들과는 차별되는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고, 그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거기에는 답한 자와 문제 낸 자의 다른 의도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옳거나, 그르거나. 동그라미이거나 곱표이거나.
‘나는-’
-다 실패했는데. 마음을 사로잡는 허망을 왈칵 느끼며, 은결은 이어 억울함 비슷한 것을 맛본다. 저 아래에 있거나, 저 높은 곳에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아래 도 위도 아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군중 가운데 몸을 숨기거나. 주어진 항목 가운데 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보았지만 실패했는데. 아니라고 냉정하게, 조소하듯, 세상은 내게 고해왔는데. 심지어 침묵조차 허락하지 않는데. 네가 어디로 가든, 그곳에는 타자가 있을 거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 회색빛 텍스트 가운데는 그런 게 없다.
“---”
말이 지극히 낮은 신음으로 바뀌는 듯 뜨거운 감정이 가슴으로 밀려든다. 문제를 읽고, 답을 맞추기. 그리고 문제를 읽고, 답을 맞추기. 기계적인 반복으로 정보를 끼워 맞추고 비교해서 답을 찾아가는 그 과정은 비록 정답을 맞추지 못하더라도 고뇌할 필요가 없다. 틀렸다면, 다시 익히고, 맞추면 되니까. 정답 자체의 존재에 대해 고뇌할 필요는 없다. 틀림없이 있다. 그러나 자신이 풀고 싶은 문제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후우.’
은결은 심호흡을 한다. 달아오른 마음이 찬바람이 쓸고 지나간 것처럼 조금 가라앉는다. 그래도 여우는 웃어 주었다. 쿠로사카는, 좋아한다고 말해 주었다. 는, 사실이 떠오른다. 답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할 수 있는 선택은 다 해 보았지만, 모두 다 실패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이 택한 선택의 실패와 무관하게 옆에 서 주었고, 특히 쿠로사카는 자신의 실패를 딛고 더 높은 곳 까지 성큼 걸어 올라가 있었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 뻗어 주었다. 그녀는 솔직해 졌을 뿐이라고 한다. 다시 ‘하지만’이 엄중하게 주춤거리는 생각의 길을 막는다.
‘아아, 역시 모르겠다.’
결국 은결은 마음이 헝클어지는 가운데 한숨을 쉬고 만다. 그는 책상에 몸을 기대며 멍한 눈길로 시험지를 바라본다. 쉽다. 눈앞의 시험지가 제시하는 문제와 그것의 답을 찾는 것은 쉬운데. 이런 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자신은 언젠가 쿠로사카에게 이야기 했었다. 여우라던가, 민성이라던가, 고릴라는 친구지만 친구라고 할 수는 없다고. 왜냐하면, 자신의 내밀한 부분들을 투명하게 내보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솔직함이라.’
무미건조하게 답안을 채워가며, 은결은 솔직함을 생각한다. 역시 그는 그것이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실패하리라. 패배는 예정되어 있다. 그래도...
역시 은결이 싫다. 여우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녀석을 보면 심술이 난다. 하지만 그 심술의 진정한 정체가 열등감이라는 것도 잘 안다. 나는 그 녀석처럼 빛나고 싶은 거야. 다른 누구처럼이 아냐, 그 녀석처럼 빛나고 싶다. 그래서 이길 수 있는 부분이 발견된다면 악착같이 이기고 싶어진다. 그 녀석을 넘어선다면, 나는 적어도 그만큼 빛날 수 있을 거라고 여겨지니까.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그게 더 분해. 그 녀석은 어디에 서 있든 나를 봐주지 않는다. 내가 그를 보듯이 그는 나를 보아주지 않는다. 나만 일방적으로 보고 있을 뿐이야. 그는 결코 내게 열등감을 가져주지 않는다. 심지어, 내가 정말로 모든 면에서 은결 그 녀석보다 높은 곳에 있더라도, 그 녀석은 나를 내가 그를 보듯이 보아주지 않을 거다. 그게, 무엇보다 마음을 한층 괴로운 열등감에 불태운다. 하지만, 은결의 가장 빛나는, 그리고 부러운 부분은 사실 그 점인 것 같다.
그래서 이리세와 잠깐이지만 사귀었던 것은 그런 면에서 내게 좋은 약이 되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와 만나서,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가 은결에 대해 취하는 태도들을 보면서, 은결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들을 깨끗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 다소 쓴 경험이었지만 없었던 것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아. 은결과는 친구로 쭉 지내고 싶다. 여우는 그렇게 생각한다.
시험이 끝났다. 으레 그러하듯, 시험이 끝나고 쉬는 시간은 답안을 맞춰보는 아이들로 소란스럽다. 일각에서는 어차피 일주일 뒤면 싫어도 답이 나올 텐데 서두를 필요가 뭐 있느냐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지만, 대게 성적의 높낮이에 대해 초탈한(주로 낮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로, 성적에 관심이 있다면 아무래도 다음 시간 시험을 준비하는 게 더 생산적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초탈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은결 일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고릴라마저도 쿠로사카를 중심으로 포진해 답을 맞춰보고 있었다. 쿠로사카는 국어를 제외하면 학년 최고 성적 보유자의 한명이고, 그나마도 이번 시험에서는 많이 만회했을 거라는 것이 선생님을 비롯한 일반의 예상이다.
“어! 그거 5번이야? 제기랄 틀렸다!”
민성이 과장되게 좌절된 표정을 짓는다. 쿠로사카의 답안이 자신의 답과 틀렸기 때문이다. 늑대와 여우는 그것을 보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보이고, 고릴라는 그저 휴- 하고 한숨을 쉴 뿐이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걸 보니 초조함에 끊었던 담배가 끌리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때 은결이 끼어든다.
“아니야. 네가 맞아. 이 문항 답은 4번이야. 문제 내용을 잘 봐. 5번은 치사한 함정이야. 필기는 안 해줬지만 교과서에는 나와 있던 내용인걸.”
여우가 은결의 말을 듣고 확인한다. 그리고 “어-” 하고 당혹어린 목소리를 낸다. 모두의 표정이 일순간에 희비가 엇갈린다. 쿠로사카도 약간 당혹한 표정을 짓는다. 한글 읽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교과서 읽기는 충실히 하지 못한 편이었는데, 여기서 그게 드러났다. 여우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민성을 바라본다.
“쳇. 그런데 네가 어떻게 이걸 맞췄지? 교과서를 열심히 읽었을리도 없잖아!”
“사람을 뭘로 보고! 뭐, 찍었던 건 사실이다만.”
민성은 태연히 답했고, 주변은 ‘니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응대해 줬다. 이어서 답안을 맞춰보는 작업은 계속 됐고, 다소 답이 애매한 문제에 가서 모두의 답안이 갈렸다. 다른 공부 잘하는 녀석들에게 가서 물어봐도 이렇다할 정확한 답안은 나오지 않았기에 그냥 넘어가려는데 은결이 끼어들었다.
“3번이야. 교과서 170, 183페이지 하고, 지지난주 수요일 수업 필기 부분을 잘 살펴봐. 문제가 명확하지 않아서 다소 헤메도록 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을 연결하면 확실히 알 수 있을거야.”
일동은 반신반의 하면서, 동시에 갑자기 평소 책 이야기 하듯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은결을 어리벙벙하게 바라보면서 그가 말하는 대로 확인했다. 잠시 시간을 들여 여우와 쿠로사카는 함께 확인을 끝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결 말이 맞아.”
“것 봐.”
은결은 웃으면서 어울리지 않게 뻐기는 모양새를 내 보였고, 주변은 어리둥정함을 느끼면서 작업을 지속한다. 계속해서 몇몇 문제에서 답이 애매하거나 오해하기 쉬운 문제가 나왔다. 그때마다 은결이 답을 규정하고 이유를 설명했다.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두 맞다는 것이 드러났다. 정답확인을 끝내고 점수를 확인하는데 문득 생각난 듯, 민성이 놀란 얼굴로 은결에게 묻는다.
“어? 너 그러면, 시험 점수가 어떻게 되는 거지? 애매하다 싶은 건 다 맞췄잖아. 나머지는 그냥 거저 주는 것들이었고. 그러면... 100점 아냐?”
“글쎄.”
은결은 확실한 답을 피한다. 늑대는 “흥, 뭐 겨우 백점 하나 나온 거 가지고! 한두 과목 치는 것도 아니고!” 라고 질시어린 평가를 내렸고, 고릴라도 옆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가끔 소도 뒷발로 쥐를 잡는다. 그렇다고 소가 쥐잡는 생물은 아니잖는가! 두 사람과 대조되게 여우는 그저 “헤-” 하고 감탄할 뿐이다.
“(잠깐.)”
쿠로사카가 일어나 은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간다. 두 사람이 나서는 모습을 보며 고릴라가 민성 옆구리를 쿡, 찌르며 심술궂은 얼굴로 웃으며 말한다.
“줄 옮길 때도 그렇고, 둘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괜찮냐?”
“음.”
민성은 곤란한 얼굴로 턱을 긁는다.
“(무슨 일이야?)”
복도에서, 주변의 시선을 무시하고, 쿠로사카는 약간 옾은 목소리로 묻는다. 은결은 쓰게 웃으며, 주저하는 태도로, 그녀의 물음에 대해 대답한다.
“(실제 답안은 예전처럼 작성했어.)”
“(실제 답안은 예전처럼 하고, 가답만 정답으로 채웠다고?)”
은결은 고개를 끄덕인다. 왜 그렇게 했는지, 쿠로사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 내게 해 줬던 네 말이... 정답이라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아. 그렇지만, 적어도 함께 곁에 있어주는 이들에게는, 조금 더 솔직해, 볼까 하고. 나는 실패했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너는, 그리고 여우는 일어났으니까. 그러니까 말야...)”
어려운 고백을 하는 것 처럼 겨우 은결은 말을 끝낸다. 그제서야 쿠로사카는 은결의 의도를 이해하고 기쁨을 느낀다.
“(응. 그래. 응원할게.)”
그리고 그녀는 슬쩍 은결의 손을 위로하듯, 그리고 응원하듯 잡아본다. 은결은 잠깐 놀란 것 같지만, 피하지는 않는다.
*겨울바른 님의 추천에 감사. 훌륭한 낚시 스킬이었습...(...)
*역시 키워 이야기가 반응이 좋군요. 저도 소재는 우왕ㅋ굳ㅋ 라고 생각합니다. 쓸지 안 쓸지는 모르겠지만. 음; 호러물은 제가 본 것도 없고 해서 좀 무리. 가장 최근에 본 게 클레이브 바커의 데몬네이션 게임이었던가. 아니다. 검은 집이군요. 하여간 제가 호러하곤 좀 안 친함.
*외전은 일단 완결내고 생각을...
*저는 모르고 살았는데, 폴아웃2의 완전 한글패치가 나왔더군요. 걸작 롤플레잉을 체험하고 싶으신 분은 필히 해 보세요. 초반 난이도가 개작살인데, 초반 넘기면 좀 괜찮아 집니다. 3편은 언제 나온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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