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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53화 (253/300)

#   254-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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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숨을 크게 쉬고, 교실로 들어간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긴장된 안색으로 학생들이 앉아 있다. 여느 때와 같이 부산하지만, 초조하게 날선 부산함에서 오늘이 시험이라는 것을 여실히 읽을 수 있었다.

“여, 왔냐.”

뒷문으로 들어온 은결을 보고 일단의 학생들이 반겼다.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인 것은 그들 중 가장 몸집이 큰 학생으로, 흔히 고릴라라고 불린다. 은결은 “응.” 하고 밝은 목소리로 그의 인사를 받으며 그들을 향해 걸었다. 그의 옆에 있던 튼튼한 인상의 소년, 늑대가 음악의 리듬을 잇듯이 은결을 향해 말을 건다.

“야야, 여기 와서 이 불쌍한 중생의 이야기 좀 들어봐라.”

그리고 늑대는 자신의 앞의 한 소년을 가리킨다. 양팔로 몸을 감싸고 어딘가 추운 것 처럼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 갸름한 인상의 소년이다. 그를 보고, 은결은 가슴이 두근- 하고 크게 박동치는 것을 느낀다. 한 순간, 시계가 무너지려 하는 것을 그는 겨우 견뎌낸다. 은결은 아무 것도 아닌 척 걸음을 옮겨 자신의 책상 위로 가방을 올리고, 일행이 모인 교실 뒤편으로 간다. 민성, 고릴라, 여우, 늑대가 모여 있다. 쿠로사카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아니, 그게 말야- 데이트 갔다가 실연의 충격에 시내 벤치에서 엎어졌다가 그만 감기에 걸렸단다.”

은결이 근처의 한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민성이 웃는 낮으로 설명한다. “저런.” 은결은 마음이 혼잡하게 엉킴을 느끼며 의례적인 말을 한다. 민성은 ‘이 녀석 재미없게.’라고 투덜댄다. 이럴 때는 좀 놀려먹는 대답이 나와줘야 재밌는 법인데. 하지만 여우가 버럭 화내며 반발한다. 놀리는 민성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은결이 더 걸렸던 모양이다.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친구라는 것들이 위로는 못해줄 망정 놀려먹기나 하고! 은결 이 녀석은 니놈들 뻘소릴 그대로 믿잖아! 그래서 헛소문 퍼지면 책임질래!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차인 것도 아냐. 에취!”

어쨌거나 감기에 걸린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모양이다. 여우는 품에서 휴지를 한 장 꺼내 팽-! 하고 코를 푼다. 민성은 낄낄거리며 손을 흔든다.

“아, 정말로 먼 곳에 이사를 가는지, 아니면 니가 싫어서 그런 핑계를 대고 학원을 옮기는지 알게 뭐야. 그리고 갑자기 졸려서 시내 벤치에 등 좀 기대고 있다 깨어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더라고? 말 같은 핑곌 대라. 날씨가 이런데 잘도 자겠다. 실연의 충격에 안 어울리는 고독을 벤치에 앉아 씹다가 이 꼴이 되신 거겠지.”

“으...”

여유로운 민성의 설명에 여우는 분한 표정을 보이지만 뭐라 반론하지 못한다. 사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이 날씨에 시내의 벤치에서 잠들고 말았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어딘가 이상하다. 자기 자신의 일이고, 그때는 정말로 피곤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만 것이 당연하지만, 돌이켜 보면 좀 어색한 일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실은 사실인 법이고, 사실이 사실이 아니게 되면 자기 입장이 곤란해진다.

“그래도 그게 사실이라니까! 콜록, 콜록.”

그래서, 이렇게 항변하는 수밖에 없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은결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그 소란스런 대화를 지켜봤고, 일의 전말을 파악한다. 리리스는 여우의 기억을 조작해 사태의 아귀를 맞물린 모양이다. 민성이 어깨를 으쓱이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까지 읽어가며 점수 따려고 했던데 비하면 너무한 결말이군. 이사가게 되어서 더는 못 만난다니!”

“평생 안 읽을 책을 끙끙대며 읽어 하나 얻은 게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어쨌거나 데이트 까진 갔단 말씀이야. 에취.”

여우가 날카롭게 돌린다. 동시에 주변에서 끅끅대는 웃음이 넘쳐흐른다.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민성의 표정이 쓰려진다. 그는 과장되게 이죽이죽이죽 거리며 여우를 놀려먹으려 하지만 한발 앞서 고릴라가 입을 열어 그걸 막아버린다.

“그러고보니, 수수께끼는 풀었어?”

순간, 여우의 동작이 움찔 멈춘다. 하지만 그것은 여우만이 아니었다. 은결도 순간적으로 동작이 멈춘다. 그 수수께끼를 이야기 하는 것은 꺼내기 싫은 것을 다시 바라보도록 만든다. ‘네가 나를 창조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걸 피하기 위한 행동조차 그렇게 귀결되어 버린다. 내가 아무리 화폐를 경멸해도, 타자가 인정하기에 화폐는 여전히 화폐일 수밖에 없듯이.

“...큼, 풀었어. 말이 세상을 창조했듯, 말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거야. 그래서 말을 가진 인간은 무엇이 좋고 나쁘다고 판단하게 되고, 그런 판단이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올바른 것이 되어야 하고, 올바른 것이 되려면, 적어도 판단의 근거가 될 지식이 많아야 하겠지. 그래서 사람은 많이 알아야 하는 거야.”

“......”

고릴라와, 늑대와, 민성은 침묵한다. 세 사람은 마음 속으로 ‘이 새끼 무슨 말 한 거지?’라는 동일한 감상을 떠올리고 있다. 이런 건 그냥 프로페셔널에게 맡기면 되는 법이다. 민성은 고개를 돌리고 은결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묻는다.

“맞냐?”

은결은 다시 머뭇거린다. ‘맞아.’ 하지만 그 말을 해도 괜찮은걸까.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맞아. 왜 맞냐하면, 이러저러 하기 때문에 맞아. 모르겠어? 이러저러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리저러한 현상들 말야. 그래서 이러저러한 책과,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말을 함으로서 그 생각이 ‘맞다’고 이야기 해 왔지. ‘맞아.’ 하나님의 언어가 세상을 만들었듯, 그렇게 한 마디의 단어가 사태의 가치를 규정한다. 그 규정을 위해 한 단어가 뒤에 응축하고 있는 세계는 넓거나 좁고, 내가 그 판정을 위해 드러내어야 하는 세계의 진실한 넓이는 다른 이들에게 순결한 정보일 수만은 없는데. 나의 논리와 나의 해석은 나의 권력이 되어 그들의 말과 해석과 권력을 억압하게 될 지도 모르는데.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뇌리를 전기처럼 핥고 지나가지만, 은결은 입을 연다.

“맞아.”

“것 봐!”

여우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목소리를 올린다. 그것을 보고 은결은 고통 같은 것을 느낀다. 내가 가진 화페에 대한 나의 판단과 무관하게 화폐가 화폐로 작동하듯, 내가 가진 내 의견에 대한 판단이 어떠하듯, 저들에게는 내 의견이 시선으로 작동하고 있다. 은결을 제외한 셋은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늑대가 짜증스레 폭탄을 던진다.

“쳇! 언제는 은결도 대단할거 없다고 하던 놈이 맞다고 하니까 어깨 올리긴.”

은결은 약한 어지러움을 느낀다. 여우는 약간 쑥스러운 듯, 훌쩍거리던 코밑을 킁, 하고 한번 손가락으로 긁고는 이야기한다.

“그야 되게 재수 없으니까 그렇지. 여기서 솔직히 평소에 은결 이 녀석이 하는 얘기 들으면서 재수 없다고 안 느낀 사람 있어?!”

“음.”

모두 동감하는 듯, 반론이 올라오지 않는다. 은결은 혼란을 느낀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은 걸까. 자신의 시도가 여우에게서 실패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실패했을 거란 이야기임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좀 재수 없지.” “나는 관대하니까 같이 있어 주는 거야.” “그렇고말고.” 기껏 이어지는 말은 이런 것들이다. 아무 것도 아닌 양,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 한다. 은결의 마음 한 구석에서 어- 하는 당혹성을 낸다.

“뭐, 그래도 그 재수 없는 부분이 저 녀석 대단한 부분이기도 한 것 역시 사실이니까. 내가 저 녀석이 대단하지 않다고 한 것은 전자의 영역이었던 거지. 사람을 짜증스럽게 만들잖아. 하지만 왜 짜증스럽게 만드느냐 하는 걸 보면 대단하지.”

고릴라가 심통 맞게 그 말을 받는다. “맞는 말이긴 한데, 말하는 투가 너도 좀 재수 없다는 건 아냐? 지가 무슨 은결인 줄 아냐.” 동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러게 말야.” “저런 놈이 나중에 제 놈도 한국인인 주제에 ‘이래서 한국인은 안 돼!’같은 뻘소리나 하지.” 하지만 여우는 굴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가장 은결 저 녀석의 장점과 단점을 가장 잘 파악하고 계시다는 말씀이지. 결과적으로 다른 놈들보다 내가 진정한 친구랄까. 바닥에 처박혀서 짜증스럽다고 찌질대는 너희보다는 그걸 딛고 상승을 시도하는 내가 더 생산적이라고. 안 그러냐.”

여우는 은결을 바라보며 ‘맞잖아.’ 하고 채근하듯 강렬한 눈빛을 보내온다. 그의 눈을 보며, 은결은 무어라 답하면 좋을지 또한 모르겠다고 느낀다. ‘응’ 혹은 ‘아니야.’ 하지만 이 ‘응’ 혹은 ‘아니야.’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뒤에 더 붙여야 하는 걸까. 어떤 말을 해도 농담처럼 가벼워질 것 같은데, 그렇게 지나갈 수 있는 종류의 문답인지, 은결은 알 수가 없었다. 훨씬 더 무겁고, 진지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물쭈물하는 은결을 민성의 말이 잡아챈다.

“생산적은 무슨 얼어죽을 생산적! 그렇게 따지면 저 녀석과 지내면서 개성을 지켜 나가고 있는 내가 훨씬 더 생산적이지. 현대는 다양성의 시대라고!”

“개성을 지켜! 콜록. 웃기시네! 안 읽던 책 읽으면서 찌질대던 게 누구인데.”

소란은 줄어들지 않는다. 늑대와 고릴라도 얼마 있지 않아 소란스런 담화의 가운데로 끼어든다. 그저 은결만이 멍청하게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다. 무언가,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이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지만, 불쾌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이상하게 유쾌한 어긋남이었다. 그 솔직한 공허가 좋았다.

결국 은결은 큭큭거리며 웃음을 흘리고 만다. 마음의 앙금이 버려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은 굳이 앙금을 모두 버려야만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회피일지도 모르지만, 가라앉은 앙금 위로 떠오른 물은 여전히 맑다. 이상한 개운함에 쿡쿡거리고 웃으면서, 그는 쿠로사카가 자신을 보며 해 주었던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린다. ‘비탈에서 굴러 만신창이가 될 것을 뻔히 알지만, 그래도 올라가길 멈추지 않을 거야!’ 그녀의 이야기가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 이야기에 많은 힘을 얻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유리에가 늦네.’

은결은 시계를 본다. 조례가 시작하기 까지 10분도 남지 않았는데. 드문 일이다.

*이대로 이런 스타일의 글을 계속 써 가면 장래에는 지금 적는 이 글보다 훨씬 좋은 글을 적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훨씬! 말이죠. 이 글이 못쓴 글이라는 말은 아니고!

*슬슬 완결이고 해서 다음에는 어떤 글을 적을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찌질한 악플러가 위대한 키보드 워리어(...)가 되어가는 본격코믹키보드논쟁물이라던가, 보이밋걸의 이계대딩로봇물이라던가, 좀 본격적인 SF스타일의 글이라던가, 뭐 생각은 이것저것 생각은 해 보고 있는데, 딱 오는 건 없군요. 원래 저지르긴 쉬워도 완료는 무진장 힘들기 때문에 쉽게 선택하긴 힘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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