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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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경이와 공포에 젖었던 마음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굳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하고, 겨우 한숨을 쉰 은결은 몸을 돌렸다. 뒤에는 쿠로사카가 세연은 안고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은결은 시선을 피했다. ‘(너를 좋아하는 것 뿐이야.)’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기억에 마음이 붉어진 탓이다.
우스운 일이다. 은결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일들을 겪은 다음인데도, 그리고 그것들은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그런데도 이렇게 부담과 쑥스러움을 느낄 여유가 자신의 한 구석에 남아 있다니. 더구나- 아니야. 깊게 생각하지 말자. 은결은 약간 크게 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쿠로사카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음, 유리에, 고마워. 그- 농담도 포함해서. 정신을 차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
은결이 생각하기에 그때 쿠로사카가 보여줬던, 행했던 행동은 일종의 쇼크 요법 같은 거였다. 그 잔재를 길게 잡고 있는 것은 서로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깨끗하게 털어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농담 아냐.)”
하지만 돌아온 쿠로사카의 말은 망설임 없이 깨끗했다. 은결은 마음을 휘감는 모든 생각들 위로, 당혹이 불쑥 솟아오르며 모든 것을 휘감아 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녀가 무어라 말한 거지? 이건, 또 다른 농담인 걸까? 하지만 차갑게 식어 지금은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이 명료하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장난치지 마. 그녀는 정말 ‘그대로’ 말하고 있다. 그 잔혹한 실패와 고통을 겪고도, 너는 아직도 배우지 못한 거야? 이건 ‘상상’조차도 필요 없다.
“(나는 너를 좋아해.)”
거칠게 딱지가 앉은 마음을 사포로 긁어내는 말이었다. 쑥스럽지만 감격스럽고, 기쁘지만 곤혹스럽고, 눈물이 흐를 것 같지만, 고통스러운- 묘한, 말이었다. 가장 강하고 아픈 위로. 감정과 감정이 뒤섞였고, 어느 감정도 그 감정 사이에서 우세를 주장할 수는 없어서, 목에 걸린 채 말의 덩어리들은 명확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 곤죽이 되었다. 그럼에도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삼켜지지 않는 말들은 부스러기가 되어 계속 흘러내렸다. “에-” “그러니까-” “음.” 하지만 그것들은 말이라기보다 멍멍이나 야옹, 음메와 같은 울음소리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런 울음이 반복되면서 은결은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어떤 강박적인 초조감을 느꼈다.
“쯔, 씨발 못 애새끼들 지랄하는 꼬라지하곤.”
하지만 은결이 말을 꺼내기 전에 푸른 이빨이 은결의 자아를 차지해 그의 입을 막았다. 쿠로사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푸른 이빨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쌍년아. 눈 꼬리 내려라. 어차피 너는 내 상대도 아니고, 너 따위와 실랑이 하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별 더러운 꼴을 다 보는군. 정말로 더러운 기분이다. 이 개새끼와 만난 다음, 씹같은 기분을 맛보는 일이 너무 많군.”
천박한 욕설로 뒤덮힌 그의 말에서 쿠로사카는 적의나 불쾌보다는 도리어 의아함을 느꼈다. 푸른 이빨의 지금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인생의 이런 저런 굴곡을 겪을 만큼 겪은 평범한 한 남자가 그날의 고뇌를 술 한 잔에 녹이며 토해내는 신음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느낌이, 푸른 이빨의 말에서 느껴졌다.
“아아. 싫군.”
푸른 이빨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고, 순간적으로 은결의 표정이 바뀌었다. 쿠로사카는 그 순간 푸른 이빨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보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이해하기 전에 강력한 전격에 감전되는 것 같은 전율에 얼른 세연에게서 떨어졌다. 물론 그녀는 몸을 떼면서 반사적으로 키리야미를 들어 자세를 잡았고, 세연, 푸른 이빨과 완벽한 대치를 이루었다. 둘 사이로 긴장 같은 것이 흘렀다. 키리야미의 후계자와 푸른 이빨. 이 대치는 숙명이란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면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지만 대치하는 양자는 그 숙명적인 대치가 어딘가 결여된 긴장으로 허전함을 이해한다.
“(그만둬.)”
은결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고, 부족한 긴장은 그것만으로 무너지며 모든 추진력을 잃었다. 쿠로사카는 칼을 거두며 걸음을 물렸고, 푸른 이빨은 “치!” 하고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고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 은결은 떠나가려는 푸른 이빨을 보고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가벼운 발돋움으로 아득한 곳 까지 도약하면서 푸른 이빨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병신 새끼야! 고맙다고 말하면 아가리를 찢어버릴테다! 나는 너를 도우려고 온 게 아냐! 씨발! 크, 씨발!”
그의 엄포에 은결은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푸른 이빨은 그들의 시야를 벗어나 사라졌다. 쿠로사카는 능숙한 동작으로 키리야미를 칼집에 집어넣으며, 은결에게 물었다.
“(푸른 이빨이 힘을 가지고 있다니, 어떻게 된 일이지?)”
“(나도, 잘은 몰라.)”
“(푸른 이빨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미안. 하지만 네가 세연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 다는 걸 생각하면 말할 수는 없었어.)”
망설인 끝에 답하는 은결을 보고 쿠로사카는 약간의 씁쓸함을 느낀다.
“(네 판단은 이해해. 하지만 기분이 좋진 않군. 지금은 푸른 이빨이 문제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지. 그노시스트라니. 그들은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장미기사단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더구나 그렇게 강력하다니.)”
“(그는... 아버지에 비할만해. 물론 아버지에 비할만할 뿐 어깨를 마주하지는 않을 거야. 아버지는 서울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영역을 지배했는걸. 그렇지만 그가 내게 보여준 것 역시 그의 전력은 아니었을 거야. 어쨌든 그가 나로서는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강자라는 것은... 명백해.)”
“(역장이라는 건가. 그런 엄청난 짓이 가능한 기술이었을 줄이야. 네게서 신적인 것을 느끼고 푸른 이빨과 착각했던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그노시스트의 수장이라는 자가 힘을 전개할 때 푸른 이빨의 것 조차 넘어서는, 신적인 것에 대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쿠로사카는 그가 보여주었던 기적에 가까운 장면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판단을 이야기한다. 은결이 사용하는 역장이 지극히 응용도가 높은 기술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거의 모든 면에서 역장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술법일 것이다. ‘술법의 하나일 것이다.’ 가 아니라 그냥 ‘세계 제일’ 말이다. 하지만 방금 보았던 장면은 ‘뛰어나다’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나도 그런 건 몰라. 그런 역장의 용법은 상상도-)”
쓰게 중얼거리던 은결은 말문이 막힌다. 단편적인 기억이 벼락처럼 점멸한다. ‘좀 더 상상하도록 하게.’ ‘네가 창조했다.’ ‘상상하지 않았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말문이 껄끄럽게 막힌다. ‘영지는 그 너머에 있는 것이지.’ ‘상상하게.’ 막힌 말문을 은결은 겨우 뚫어낸다.
“(-해 본 적이 없어... 그리고 역장을 사용하는 것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야. 아마 역장과는 무관할거야.)”
“(그런가.)”
잘 모르는 영역이기에 쿠로사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어서 그녀는 품에서 종이 인형을 꺼내 허공에 날리고는 양 손으로 인을 맺으며 영창을 했다. 종이 인형은 영창이 끝나자 사람크기의 인형이 되었고, 이곳저곳의 파괴된 시설과 도로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약간 부럽게 바라보면서 은결은 쿠로사카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
“(뭐지?)”
“(오늘 있었던 일은 이세에 연락하지 말아 줘.)”
“(최악의 경우 혼자 죽으면 그만이라는 둥의 생각이라면 두들겨 패서라도 고쳐줄게.)”
자상하게 싱긋 웃으며, 쿠로사카는 답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웃음에서, 그러나 은결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둘러 손을 흔들며 설명했다.
“(그, 그런 건 아냐. 그들의 목적이 나인 이상, 최악의 경우라도 내가 죽을 필요는 없을, 거야. 그저 나는 그들이 있는 곳에 가게 되겠지. 물론 그렇게 하겠다는 것도 아냐. 그저 어차피 그가 보여준 힘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인 이상, 먼저 아버지에게 물어 방법을 강구하고 싶어. 그리고 아버지가 주변의 힘이 필요하다면 연락하시겠지. 하지만 그들이 있거나 말거나 아무 소용도 없는 종류의 대결이 된다고 하면, 굳이 시끄럽게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그들과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굉장히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을 테니까. 다른 것은 없어.)”
“(......)”
쿠로사카는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녀는 그것이 ‘최악의 경우 혼자 죽으면 된다.’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고 이 바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동시에 이 바보가 제안하는 것은, 만일 다 같이 죽는 것과 혼자 죽는 두 선택만 있다면 후자를 선택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기에 그녀에게도 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쿠로사카는 한숨을 쉬면서 선량한 멍청이의 선택을 긍정한다.
“(...알았어.)”
“(고마워. 그리고 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 그- 말에 대해선데...)”
머뭇머뭇, 은결이 말하려고 했다. 쿠로사카가 막았다.
“(말 하지 마.)”
“(어-)”
그러면 그렇지. 역시 그것은 그저 극약처방 같은 것이었구나. 자신의 대답을 막는 쿠로사카에 대해 은결은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안도가 섞인 달콤 쌉싸르한 감정을 맛봤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대답은 은결의 예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무서우니까.)”
“(......!)”
용맹하게, 쿠로사카는 안정된 목소리로 말했고, 은결은 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쿠로사카는 또한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 무서워. 심장이 두근두근 뛰게 기대도 되지만, 그것보단 훨씬 더 무섭기도 해. 그러니까 지금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아. 만일 네게 좋지 않은 대답을 듣게 된다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아. 하지만 그럴 순 없어. 그러니까, 나중으로 미뤄둬. 그노시스트도, 푸른 이빨도 다 해결된 다음이 좋겠어. 내가 키리야미를 쥔다는 것이, 네가 박수행의 아들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된 다음에, 그런 시간 가운데서, 다른 곳을 바라볼 수 없는 마음으로 네 대답을 듣고 싶어.)”
아아. 그녀는 정말로 비탈에서 굴러 떨어지길, 망설이지 않는구나.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은결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솔직한 감상을 입에 담는다.
“(...너는, 정말로 강하구나.)
“(아니야. 말했잖아. 나는 그저 너를 좋아하는 것 뿐이라고.)”
흥. 하고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보여주며 쿠로사카는 은결의 말에 대답한다.
*게쁘리 님의 감상에 감사~ 한 가지, 히로인들이 신분이 높은 것은 우선적으로 그게 독자를 낚기 좋기 때문(...) 입니다만, 그 외에 그걸 통해 계급의 문제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는 면도 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우스 학원의 진정한 히로인은 역시 알렉(...) 참고로 저는 유능한 히로인을 좋아합니다. (대전제는 물론 미소녀!)
*챕터 끝. 길었다~
*외전은 일단 포기하거나 뒤로 물릴까 싶기도 합니다. 칠레가 무대이니 만큼 아옌데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는 글이 될 텐데, 좋아하는 사람도 몇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빨리 완결도 보고 싶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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