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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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고 소녀는 말했다. 아름다운, 아름답다고 인식되는 소녀다. 아름답다와 아름답다고 인식된다는 것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 차이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의 아름다움은 일종의 기적이다. 그런 기적 같은 아름다움으로 인식되는 소녀가 손을 내밀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손을 잡으라는 이야기인 것 같다. 은결은 잡지 않는다. ‘다른 사람’(타자)의 손을 잡는다니? 지금의 나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은결은 지금 자신조차 잡기가 두렵다. 이것도 저것도, 이곳도 저곳도. 은결은 갈 곳이 없다고 느낀다. 그는 찰칵, 하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누구지?”
그리고 손을 잡는 대신 묻는다. 자신의 목소리지만, 은결은 그것이 남의 목소리 같다고 느낀다. 혼탁하고 거슬리는 목소리다. 물으면서 은결은 자신의 향하는 깨끗한 말을 듣는다.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먼 곳에 떨어져 자신을 자신이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관의 관객처럼, 자신의 행동을 모두 느낀다. 쿵쿵 뛰는 심장과, 지끈거리며 아픈 머리와, 고통스런 위와, 차가운 손바닥과.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지각되지만, 어느 것 하나 자기의 감각인 것 같지 않다.
“너와 손을 잡고 싶어.”
질문에 대한 답 대신에, 소녀는 말했다. 은결은 빙그레, 하지만 허무하게 웃는다. 손을 잡는다고?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는다고? 소녀는 말한다.
“나와 손을 잡으면, 너는 초조하게 걷지 않아도 괜찮아. 잰걸음으로 어깨를 좁히며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괜찮아.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걸으면 돼.”
은결은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 여우가 이야기 했다. ‘네가 나를 창조했다.’ 창조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도리어 창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창조를 피하기 위해, 얼마나, 이제까지 얼마나 어깨를 좁히고, 잰걸음으로, 쓸쓸하게 지내왔는데. 결국 실패했다. 은결의 허망한 얼굴을 보며, 소녀는 손을 거둔다. 그리고 은결의 주변을 원을 그리며 발랄하고 기품 있게 돈다.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구든 상관없어. 그는 아주 많은 사람이 오다니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을 거야. 그 책이 어떤 책이든 상관없겠지. 어렵고 치밀한 학술서일 수도 있고, 심오하고 깊은 소설일 수도 있어. 그게 아니라면 쉬엄쉬엄 읽을 수 있는 펄프픽션인지도 모르지. 노골적인 욕망이 드러난 관능 소설 혹은 만화책이라도 좋아. 아름다운 이야기, 추악한 잡설, 저열한 이론, 화려한 체계. 무엇이든 상관없어. 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편안하게 앉아 책을 펼칠 수 있어.”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은결은 침을 삼킨다. 고통에 일그러졌던 세계가, 이야기에 소란스러웠던 세계가, 그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을 느낀다. 찰칵, 하는 소리에 맞춰, 세계의 상이 맞물려져 가는 것 같다.
“그저 자신이 즐거워서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는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칼에 잠시 고개를 들어. 그리고 잔디 뜰 위에서 아이와 놀고 있는 부모를 보지. 그는 그것이 보기 좋다고 웃으면서 바라봐. 그러다가, 아이와, 그리고 그 아이의 부모와 눈이 마주치지. 그는 놀라지 않아. 그 사람들을 향해 목례를 해. 아이와 아이의 부모들도, 그렇게 목례를 하고 웃음을 교환하겠지. 그리고 하던 놀이를 계속해. 처음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은결은 침을 삼킨다, 외침이 진득한 침에 섞여 겨우 목구멍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 역시, 그들의 모습을 기분 좋게 지켜보겠지. 그러다가, 마음이 족해지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는 거야. 학술서, 소설, 포르노 포토, 관능소설, 만화-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의 앞을 많은 이들이 지나다니고, 그들은 그가 읽는 책을 알아보지. 하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아. 왜냐하면, 그건 개성조차 아니거든. 숨 쉬는 것 같은 거야.”
소녀는 이야기를 끊는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소녀는 다시 은결의 시선 정면에 와 있다. 은결과 눈이 마주친다. 은결은 자신이 그녀의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음을 이해한다. ‘어디에도 없는’ 곳. 가슴이 먹먹하게 징징 울린다. 그녀는 기적 같은 아름다움으로 생긋- 웃는다. 그리고 후읍- 하고 짤막한 한 단락의 호흡을 하고, 거두었던 손을 다시 뻗으며 말한다.
“네게 그런 세계를 줄 수 있어.”
이를 악 물고, 긴 틈을 둔 다음,
"...불가능해."
라고, 은결은 아주 느리게 답한다.
“가능해.”
“불가능해!”
은결은 강하게 부정한다. 양 손으로 땅바닥을 내려친다. 거대한 힘에 타격지점이 두부처럼 바스라지고, 일대가 흔들린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다는 거지! 절망과 닮았지만 다른 답답함에 함몰된 가운데 그는 분노와 닮은 감정을 느낀다. 잰걸음으로, 주변을 힐끔대며, 어깨를 좁히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왔는데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창조했고, 그는 나를 다시 창조한다! 내 손이 닿는, 그 작은 범위에서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헌데 너는 어떻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세상 모든 이들에게 불가능해도, 영지를 가진 우리에게는 가능해.”
그러나 소녀는 은결의 모든 아우성을 절단하고 자신의 단정을 그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그리고 존재할리 없는 직선이 느껴지는 답이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걸릴 것 없는 당당함. 모든 것을 포섭해 들어가는 지(知)에 대한 욕망. 그녀의 말끝에는 타자를 위한 아무런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 울림을 깊이 담으며 은결은 소녀가 누구인지를 깨닫는다.
“너는─ 이리세구나.”
“맞아. 함께 걷지 않겠어?”
이리세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이리세는 웃는다. 은결은 이리세의 손을 본다. 고운 손이다. 그녀와 이야기 하는 것은 즐거웠다. 그녀 앞에서 은결은 움츠리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그녀와 이야기 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린다. 이기적인 유전자, 도스토예프스키, 성경, 플라톤, 반지- 그런 것들. 해결할 수 없어서 껴안고 있을 수밖에 없던 것들. 그리하여 결국 여우의 자신에 대한 외침이 되었다. 두려웠던 것은, 무의미일 뿐인데, 돌아온 것은, 결국 무의미일 뿐이었다. 너는 내게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이건 도피인가?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고, 이곳도, 저곳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갈 곳이 없다면─
찰칵, 하는 소리를 들으며, 은결은 덜덜 떨리는 손을 뻗는다.
푸른 이빨은 진 안으로 들어선다. 그가 들어오자 파괴되었던 결계의 벽이 복구된다. 내부는 고요했다. 아무도 그를 눈치 채지 못한다. 자신의 기척이 새어나가는 것을 술법으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쪼잔한 짓을 좋아하지 않지만, 지난번 이치들이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았다. 푸른 이빨은 자존심이 강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판단을 그르치지는 않는다.
꽤 떨어진 곳에서 꼬맹이와 웬 계집애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보인다. 집중하면 대화의 내용도 들을 수 있겠지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만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본다. 공간을 전체적으로 인지하고, 상을 만들어 가능하면 한 방에 적을 척살할만한 기습을 해야 한다.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정신병자 꼬맹이를 구하는 거지만, 안이한 투쟁심으로 상대할 수 있을 놈들이 적이 아니다.
'응?'
그의 시야로 평소라면 이죽거리며 웃어줬을 것이 보인다.
‘키리야미의 후계자군.’
피가 맛있는 계집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찢어죽이고, 그 피와 살을 취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아마 다시 맛보기 힘든 만찬이 될 것이다. 물론 나중으로 미뤄둘 일이다. 지금은 저 계집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지. 꼬맹이를 구하는데 훨씬 큰 여유를 얻을 수 있을테니까. 그는 조용하게 그녀를 향해 움직인다.
멀리서, 소녀와 은결이 이야기 하는 모습이 보인다. 겨우 호흡을 잇고, 흔들리는 시야를 조정하면서, 그러나 꺾이지 않는 의지로, 그녀는 은결과 소녀의 대화를 들으려고 한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앙 다물린 입술 사이로, 후- 하- 후- 하-, 하는 단절적인 호흡이 이어진다. 힘은 흩어졌고, 육체는 분쇄당해, 지금의 자신은 생각할 줄 아는 넝마인형과 별반 차이가 없다.
“크으-!”
소녀가 은결의 주변을 돌고, 소녀가 다시 은결의 정면에 서고, 소녀가 자시 그에게 손을 뻗어내는 장면까지가 모두 보인다. 그녀는 그 장면에서 마음이 깊이 타오르는 것을 느낀다. 어떤 이야기를 했던지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지금 저 모습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손을 내뻗지 마! 그건 네 역할이 아냐! 그건- 입술을 물며, 쿠로사카는 그런 말을 외치려 한다. 하지만 쿨럭, 하고 부서진 내장과 피를 토하는 기침이 말을 구성하는 걸 허락해 주지 않는다. 고개가 기침을 따라 자연스레 아래를 향했고 앞섬과 땅바닥으로 후두둑, 피가 쏟아졌다.
쿠로사카는 지친 고개를 든다. 밤하늘이 보인다. 혼탁에 젖어 별빛을 잃은 하늘이다.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어딘가에서 자신을 향해 물어온다. 이상하게 이 장면에서 생각나는 것은 자신의 자신에 대한 어떤 감상도 아니다. 분함도, 안타까움도 아니라, 한 소설에 대한 생각이었다. 소세키의 ‘마음’이다. 가슴 아픈 소설이다. 왜 승리한 자가 패배하고, 억압받던 자가 억압하는지, 그런 것들을 담담하게 이야기 해주는 그 소설이었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게 읽어, 겨우 자신의 의미를 건져낼 수 있었던 그런 글이었다. 그걸 은결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에헴, 하고 이야기 해 주고 싶었다. 바보야. 그러니까 이야기해도 괜찮아.
쿵, 하는 큰 울림이 느껴진다. 고개를 내린다. 은결이 바닥을 내리친 모양이다. 그 앞의 소녀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다. 은결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본다. 쿠로사카는 초조함을 느낀다. 은결은 느리게, 떨리는 손길로, 그 손을 향해 자신의 손을 뻗기 시작한다. 쿠로사카는 초조함과 안타까움이 물밀듯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바, 보야...)”
쿠로사카는 이를 물고, 억지로 힘을 짜내, 말을 구성해 본다. 바보야. 이야기 해 줄게. 내가 네게서 얻은 것들을.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것들을. 그러니까 저런 건 잡으면 안 돼. 너는, 너는 그때 그 해변에서 이야기 했잖아- 하지만 차오르는 것은 마음일 뿐이고,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무력하게 흩어질 뿐이다.
“--!!”
그때 쿠로사카는 자신의 손을 잡는 섬세한 손의 감촉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있다. 그녀도 알고 있는, 세연이라는 소녀의 얼굴이다. 하지만 그 소녀의 얼굴은 그녀가 알던 평소의 이미지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파괴적이고 저열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잡힌 손을 통해 들어오는 막대한 힘이라니! 쿠로사카는 자신의 상세가 급격히 나아짐을 느낀다.
“여.”
소녀는 히죽 웃으며 쿠로사카에게 말한다. 쿠로사카는 순식간에 깨닫는다.
“(-푸른 이빨!)”
*겨울바른님은 오랜만에 보는군요. 시험기간인가 했음.
*순수이성비판을 재밌게 읽다니, 텔러님은 좀 천잰듯? 나중에 높은 자리 올라가면 홍보나 굽신굽신.(...) 그리고 염세주의자를 양산하기 위해 쓰는 글도 아니니 그런 부분은 결국 괜찮으리라고 여깁니다. ...음. 괜찮습니다. 아마도.(...)
*다음 화는 이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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