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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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는 이런 세계를 모른다. 모든 것이 다른 것과 같지만, 모든 것이 다른 것과 다른, 이런 세계를 모른다. 그것은 틀림없이 일상의 풍경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비일상의 풍경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웃음, 음악, 자동차, 어둠, 네온사인. 어느 것 하나, 일상이라는 단어와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 흔해빠진 것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흔’하지 않은 낯섬으로 충만해 있다. 까무러칠 것 같은 낯섦음. 어느 날 갑자기 퍼뜩 지나가는 한 가지 의문의 감각이 극대화 된 세계. 왜 ‘밥’은 ‘밥’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기표에 대한 의문의 극대화가 세계를 오염시켰다.
“신은 허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지. 무엇으로 창조하지? 그것은 말이었지. 말은 곧 이성이야. 이것은 결국, ‘이성’이 ‘없던 것을 만들었’다는 의미지. 그래서 이성은 창조의 권능과 가장 닮은 힘이지.”
이리세는 이야기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와 주변 세계의 이질성에 압도당하면서, 여우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없던 것이 만들어졌다. 사과를 먹자, 그 끔찍한 사과를 먹자, 없던 것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쫒겨났고, 나는- 보지 않아도 좋은 것을 보았다.
“이것이 없을 때는 아무 상관도 없었지. 하지만 그것을 가지는 순간, 인간은 낙원에서 쫒겨나야 했고, 앎을 도무지 포기할 수 없게 되었지. 왜냐하면, 그 금단의 열매를 입에 넣은 순간, 그는 ‘눈이 밝아 졌’기 때문이야.”
그 금지된 것을 먹고, 신과 같아진 아담과 이브가 맨 처음 했던 것은 무엇이었더라? 여우는 고통을 느낀다. 큰 고통이다. 바라보고 싶지 않던 고통이다.
“그들은 열매를 먹고 ‘알몸’인 것을 알게 되지. 그래서 잎을 엮어 몸을 감추지. 그들은 짐승을 벗어나. 그러나 그들이 옷을 만들어 입고 나신을 감추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짐승을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좋다’와 ‘나쁘다’라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짐을 짊어지게 되지. ‘좋다’와 ‘나쁘다.’ 벌거벗은 것은 ‘나쁘고’ 옷을 입은 것은 ‘좋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쁘고’ 그러니까 아버지의 눈에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야’ 하는 것이 ‘옳고’ 말야.”
‘좋고’ 그리고 ‘나쁘다.’ 나는, 좋고, 너는 나쁘다. 나는 옳고, 은결 너는 그르다- ‘눈이 밝아져 알몸인 것을 알고’ 파편들이 떠돌아다닌다. 이 파편도, 저 파편도 잡지 못한다. 눈이 밝아져 돌아본 그곳에는 짐승 같은 네 눈이 있었다.
“시선이 대상이 향할 때, 그러한 가치판단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지. 반드시, 인간은 그러한 판단을 하고 말지. 하지만 왜 그것은 좋고, 왜 그것은 나쁜 거지? 이 ‘왜?’의 앞에서 인간에게 앎은 하나의 의무가 되지. 인간만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하기에, 그 좋음과 나쁨을 설명해야 하고, 그 설명을 위해서는 알아야만 하니까. 그것이 없다면 그 판단은 단순한 폭력이 되어버리고 말겠지.
이것은 ‘의미’있어. 이것은 이런 ‘좋은 의미’가 있어. 이것은 이런 ‘나쁜 의미’가 있어. 그래서 ‘손’은 ‘손’이라 지칭되지. 사실 손은 그 한 덩어리로 이루어지지 않은 무수한 세포의 집합인데. 그 개별적인 세포들은 없는 것 처럼 무시해 버리고 ‘손’만이 남지. 그러니 인간은 알아야만 하지. 규정한다면 그 규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책임은 앎이라는 수단으로만 정당화 되고,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
이리세는 이야기를 정리한다.
“노동으로 세계를 대상화한다는 금단을 범하고 인간은 지혜를 얻었지. 그러나 모든 지혜는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가치판단이고, 세상을 의미로 분절하는 폭력이기에, 그 폭력에 대한 책임을 위해 앎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의무가 되었지. 선량한 현자가 주장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와 무위(無爲)는 안타깝지만 인간의 길이 아니야. 의무를 거절할 수도 있지만, 의무는 수행과 무관하게 우리에게 영원히 남는 것이지. 그것이 ‘원죄’의 진정한 의미. 때문에 대속(代贖)은 영지의 영역.”
여우는 침을 삼킨다.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가?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그저- 짐승 같은 네 눈이 있었기에, 아담과 이브가 알몸인 것을 알았듯, 내가 알몸인 것을 알았고, 그들이 잎을 엮어 만든 옷으로 나신을 가렸듯, 너를 부정해 나를 가렸다.
“그래서 나는 알아. 너는 은결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야. 왜냐하면, 네가 그의 높이를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누구보다 그를 흠모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의 의미를 너 자신의 의미로 받아들였을 테니까. 아담과 이브가 금단을 범하고 알몸인 것을 알았듯이.”
여우는 그녀의 말이 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주업되어 들어온다. 신의 망치가 대지를 내려찍어 일으키는 지진처럼 그녀의 말은 폭력적으로 여우의 마음을 진동시킨다. 그 격렬한 진동 가운데, 그는 무수한 이미지로 절단되어 휩쓸리는 자신의 사고를 느낀다. “나는...” 자신에 대한 희미한 주장만이 그 의미를 엮어 자신의 서사로 바꾸고자 절망적으로 노력한다.
“다른 누구도 중요하지 않아. 너는 은결이 너를 인정해 주길 바랬지. 그것이 네게 있어 진정한 의미였어. 그의 의미가 너의 의미였기에,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네가 좋다고 생각했고,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짐으로서 네가 뛰어나 지고 싶었지. 사실은, 그래서 나와 사귀려고 한 거잖아. 왜냐하면, 그가 내게 ‘대단하다’고 말했으니까. 그가 내게 ‘매력적이다’고 평가했으니까.”
“-----”
새초롬한 웃음이 비수처럼 날카롭다- 고 여우는 느낀다.
“하지만 네 의미는 너 자신의 의미가 아니었기에, 그 의미의 추구는 마침내 그 의미의 원천을 넘어서는 것이지.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보다 먼저 취득해 내는 것, 그래서 마침내 그를 넘어섬으로서 그의 의미를 진정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그래서, 너는 앎이 의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
그녀의 이야기는---
옳다---
고 여우는 무의식중에 답한다.
사진에 찍힌 상 처럼 마음에 떠오르는 문장. ‘일찍이 그 사람 앞에 무릎 꿇었다고 하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의 머리 위로 발을 올리도록 하는 거지요.’ 어디서 봤지? 오늘 아침에 보았다. 민성의 연습장에서. 무엇에 대한 문장이더라? 소설에 대한 문장이었다. 소설의 제목은 ‘마음’이었다. 마음. 마음. 나의 마음, 그의 마음. 그녀의 마음. 세상 사람들 모두의 마음.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게 어쨌다는 거냐고? 어쨌긴, 그건 내 이야기니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나를 짐승처럼 바라보지 마. 내가 창피한 알몸이라는 것은 네 그 시선이 아니라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다. 네가 나를 바라봤기에, 창피한 내가 존재하고 말았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듯 네가 불쌍하고 추악한 나를 창조했다. 그 전에 나는 내가 그렇다는 것을 몰랐다. 결국 그는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사고의 폭풍우 가운데서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조용하게 걸어, 그 앞에 이리세가 뚜렷하게 선다. 그녀는 주저앉은 여우를 바라보며 연인처럼 감미롭게, 어머니처럼 자애롭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너는 나쁘지 않아. 죄를 묻는다면, 이 세상을 만들어 놓은 거짓된 신 ‘데미우르고스’를 향해야 하겠지. 타자가 아니고선 자신을 세울 수 없도록 운명 지워진 무참한 족속들이 아니라. 그것이 영지를 이은자의 의무.”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우는 의식을 잃는다. 그는 넝마처럼 길바닥에 쓰러진다. 그 앞에 선 이리세는 연민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 손을 편다. 그녀의 손에는 자그마한, 아주 자그마한 검은 구가 놓여져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다.
은결과 세연은 막 레스토랑에서 간소하게 식사를 하고 밤의 시내로 걸어 나오고 있는 길이었다. 메마른 계절과 어울리는 차분한 불빛이 가을의 시내를 밝히고, 주말의 여유를 맞아 많은 이들이 즐거운 걸음을 걷는다.
“헤헤.”
팔짱을 끼고 있는 세연의 온기를 느끼며, 은결은 쑥스럽게 코를 긁다가 이제 무얼할까- 라고 차분하게 생각을 한다. 영화도 봤고, 식사도 했으니 이만 헤어져도 좋을 시점이긴 하지만 그래서는 너무 정이 없는 것 같다. 밥도 한 주걱만 퍼 주면 정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어디 가게에라도 들러 귀여운 악세사리라도 하나 사줄까 싶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악세사리가 반에서 유행한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데이트 한다고 아버지에게 받은 돈도 적지 않다.(많다.)
-생각이 끊어진다.
은결은 긴장된 얼굴을 한다.
“무슨 일이야?”
세연은 은결의 긴장을 민감하게 느끼며 걱정스럽게 묻는다.
“사념체. 오늘은 평소보다 이르게 나왔군. 뭐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지만.”
“에...”
안타까운 실망을 소리로 흘리면서 세연은 울상을 짓는다. 좋은 시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이게 뭐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이미 팔짱을 풀었다. 은결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그것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은결은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본다.
“미안.”
“으응. 열심히 해. 몸조심하고.”
“응.”
일대의 분위기가 바뀐다. 은결은 역장을 형성해 그것을 밟고 허공으로 오른다. 그는 이미 까마득한 점처럼 작아졌다. 세연은 쓸쓸하게 그가 멀어져 가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휴- 하고 작게 한숨을 쉰다.
어둡게 가라앉은 방안에서 입에 손수건을 물고, 쿠로사카는 키리야미의 날을 닦던 것을 멈춘다. 그리고 날을 위로 하고, 손수건을 떨어뜨린다. 팔랑, 하고 펼쳐진 손수건이 중력을 따라 느긋하게 춤추며 키리야미의 날 위로 내려앉는다. 곧 손수건은 키리야미의 날과 만났고, 아무런 저항없이 갈라져 바다으로 가라앉았다.
“(좋아.)”
키리야미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녀는 만족스레 웃는다.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이렇게 키리야미의 날을 살피며 살기를 가다듬는 것도 좋은 수행이 된다. 키리야미는 베란다 쪽을 바라본다. 도심의 불빛이 먼 곳까지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싸늘한 가을의 번화한 저녁 풍경.
‘(지금쯤 그 바보는 세연이란 아가씨와...)’
쿠로사카는 얼굴을 찌푸린다. 마음이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마음이지만,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역시 기분이 나쁜 일이다. 키리야미를 닦으며 진정시켰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밖으로 나가서 검무라도 추어볼까? 형을 벗어난 검식의 전개는 무척 좋은 수련이자 유희가 된다. 그녀는 그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쿠로사카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은... 이르군.)”
그녀는 베란다를 박차고 도천시의 밤하늘을 유성처럼 가른다.
*라이트 노벨이 ‘라이트’에 방점이 찍힌 채, 이 글을 까려고 쓰인 표현이라면 저도 불쾌했겠습니다만, 그렇진 않을 테니 디스피어님은 그렇게 화내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다. 하하.
*클라우스도 그렇고 이 글도 그렇고, 글을 쓰면서 가볍게 즐길만한 에피소드를 몇 적어보려는 욕심이 있었지만 해보다가 그만두고 말았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이야기를 구성할 때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이것이 필요한 이야기인가?’ ‘이것이 전체와 조화가 되는가?’ 라는 것인데, 그런 단순한 러브코메디 형식의 이야기들은 이 조건에 모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죠. 뭐 그래도 적어보고 싶기는 합니다. 이왕 캐릭터를 여기까지 성립시켰는데, 딱 할 말만 하고 끝낸다고 하면 아쉽게 여겨지기도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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