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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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었어.”
웃으면서 세연은 말했다. 은결은 그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세연은 이번 주에 친구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그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유행처럼 팔찌가 번져 나간 이야기.
“그걸 보면서 완벽한 독자와 작가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들더라. 무언가가 의미 있다는 것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외부와 주체의 대자적 접촉에서 발생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내 친구들은 팔찌라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을 거야. 하지만 거기에 지정된 중간점이 없는 것 같아. 그런 중간점이 확실히 존재한다면, 그 유행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을 설명하기 힘들테니까. 이건 그러니 바라봄의 한 극단에서 주체는 외부를 마침내 스스로 조정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것이 완벽한 독자에 대한 생각이었지. 헤헤, 이런 걸 본래무일물에서 비롯되는 일체유심조라고 하던가? 그런데 거기서 끝난다면 주체는 거기서 멈추지 않겠어? 외부에서 비롯되었지만 외부를 극복한 그에게 이제 외부는 무의미하고, 무의미한 외부에 대해 행동할 이유가 없는 그는 멈출테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라는 그런 것도 함께.”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이야기가 즐거우면서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러한 감상은 초조함을 느끼게도 했다. 풍성한 논리와 정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세연의 이야기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흥미를 솟구치게 하기에 즐겁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사실 모두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은결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지루했다. 세연의 이야기가 전개하는 논리와 전개는 다른 예시로 나타나지만 모두 과거 자신이 해 보았던 생각의 반복 같은 모습을 가진다. 그야,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의 태반은 사실 은결의 정보니까.
정체성 자체를 구성하는 종류의 정보는 유입되지 않았다고 푸른 이빨은 말했지만, 순수한 정보도 사실 그 순수성 이면에 그 정보가 모여 이루게 되는 논리에는 어떤 경향성 같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은결과 같은 정보를 가진 사람은 은결과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많은 퍼즐 피스가 있어도, 그것이 모두 모여 이루는 것은 같은 그림을 만들게 되듯이. 그래서 은결은 초조함 같은 것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계속 이 상태로 지나간다면 은결의 정보가 그녀에게 고착해서 그녀의 인격 전체를 재구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설령 재구성까지는 아니라도 점진적으로 그녀의 전인격을 획기적인 수준으로 바꾸어 놓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특별히 그렇게 되더라도 별로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내 얘기 재미없어?”
약간 우려하는 표정으로 문득, 세연이 묻는다. 은결은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녀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 같아서 어떤 에포크(획기 - epoch)라 할까, 엘랑비탈(생의 도약 - élan vital)이라 할까, 그런 신선한 자극이 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나 할아버지 이외의 사람에게 듣고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은결은 십년이나 그런 정도의 상대도 가져본 적이 없다.
“아냐. 재밌어.”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완벽한 독자가 독서를 그만두지 않게 하는 방법, 있을 것 같아?”
완벽은 그 개념상 정지다. 완벽한 것은 충족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종류의 운동도 필요하지 않다. 만일 완벽이 운동한다면 그 운동은 자기자신을 향하는 자기자신의 운동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철학체계에서 신을 자신을 사유하는 관념이라고 정의한다. 은결은 정말 완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주체’조차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제한을 통해서만 성립되는 주체는 제한을 극복하는 완벽에 도달하면 유지될 수 없다. 한 번 해체될 뻔 했기에 은결은 그 사실을 더욱 절절하게 안다.
“음, 글쎄. 어려울 것 같은데.”
“헤헤. 나는 완벽한 독자가 독서를 그만두지 않게 하는 것은 아마 ‘사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눈을 빛내며 세연은 말한다. 뿌듯한 표정이 은결의 칭찬을 기대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은결은 그녀의 기대에 응하지 못한다. 그는 어딘가 쓸쓸한 표정으로 세연에게 되물어볼 뿐이다.
“왜, 그렇게 생각해?”
“왜냐하면 사랑은 나와는 다른 존재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잖아. 그러면서도 그것은 ‘완벽’의 속성일 수 있으니까. 사랑은 결함이나 결핍과 같은 것이 아니니까.”
세연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은결은 이 지점에 대해서는 논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사랑이 완벽의 속성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좋게 보아도 신학의 문제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은결은 ‘침묵’하고 싶다. 어차피 세상의 무수한 것들이 말할 수 없는 주제에 침묵을 용서하지 않는다. ‘침묵할 수 있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은 그대로 놓아둘 때 가장 빛난다. 은결은 그렇게 여긴다. 은결은 그 문제를 건너뛰고 반박해 본다.
“그렇지만 사랑을 통한 독서는 텍스트에 대한 가장 거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텍스트가 품고 있는 그 자체의 의미를 무시한 채, 그것을 사랑을 통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읽고, 그렇게 읽은 텍스트를 그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로 규정해 버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확실히 사랑은 완벽한 독자가 독서를 중단하게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텍스트 자체는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위가 아닐까?”
세연의 말문이 막힌다. 그녀는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사랑을 말하는 은결의 표정이 품은 깊은 슬픔이 막힌 말문에 아교를 발라놓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주 처음에, 친구들과 나누었던 사랑에 대한 대화가 기억난다. 이야기와, 저 이야기와, 이런 저런 이야기와.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 처럼 들렸다. 그럴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되새긴다. 아마 그런 것 같다. 은결은 생각하면, 은결을 알고 싶다. 알고 싶고, 또 알고 싶다. 속속들이, 그를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아닌 것 같다. 은결은 모른다.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하, 하지만 아닌 것 같아. 사랑 그 자체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 같아. 순수한 사랑은 반드시,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모르겠는걸. 세상에는 많은 부모님들이 계시고 그들은 모두 자식을 사랑하잖아. 그 사랑 중 어떤 것들을 실패해서 자식을 옥상으로 밀어 올리지.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아니야. 사랑이 지나쳤기 때문이지. 지나친 사랑이 자식을 부모 그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강압적으로 이끌도록 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생기는 거야. 그 완벽한 사랑 앞에, 자식의 주체성은 무의미하지. 사랑이 이야기 하는 거야. 너는 틀렸다. 내 말을 들어라. 그러니까 아마 사랑은 완벽한 독자의 독서를 계속하게 하는데 대한 대답이 되기 힘들 거라고, 나는 생각해.”
나도 예전에는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플라톤이 에로스를 믿었듯이. 그러나 모든 해석은 권력이고, 그래서 폭력을 담는다. 그 해석이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더라도. 우리는 결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믿지 않는다. 은결은 소처럼 속으로 자신의 생각을 되씹는다.
“......”
세연은 분함을 느낀다. 은결의 이야기가 분했고, 분함에도 그의 이야기에 반발하지 못하는 자신이 분했다. 그녀는 은결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다. 왜 그렇게 차갑고 슬프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녀는 역시 은결을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다. 적지 않은 대화를 했고, 만남을 가졌지만, 그는 아득한 기호 같아서, 어느 것 하나 그녀에게 해답으로 다가와 주지 않는다. 이런 의미를 가진 것 같다고 그를 바라보면, 그는 그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모든 것들이 해석에 다시 해석을 겹치고, 반복에, 다시 반복을 겹쳐도 알 수가 없다. 기호가 너무 많다. 무엇이 그렇게 많은 기호를 만드는 것일까.
“가자.”
“으, 응.”
두어 발자국쯤 먼저 가던 은결이 멈추고 세연을 부른다. 세연은 서두르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두 사람은 함께 걷는다. 부드러운 따스함이 첨예했던 긴장을 일시에 녹여버린다. 세연은 은결이 좋다. 참 좋다. 그래서 그를 알 수가 없다.
영화를 보고, 식사를 했다. 밖은 이미 어둡다. 여우는 막 식당의 문을 나서며 느껴지는 차가움에 은결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도 오늘 데이트를 한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 밤하늘, 비슷한 시내 아래서 세연이라던 소녀와 길을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동안을 걷고, 인적이 비교적 드물 광장에 이르러 이리세가 물었다.
“자, 그럼 대답을 들어볼까. 왜 선악과는 지혜과인 걸까?”
“그건, 선악을 아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지혜이기 때문이지.”
여우는 억압적인 담담함으로 답했고, 이리세는 웃는다. 그의 말은 정답이다.
“그래. 선악을 아는 것이야 말로 지혜지. 어떻게 맞췄어?”
“네가 앎이 인간의 의무라고 했잖아. 그걸 연결하면, 당연한 거잖아.”
이리세의 웃음이 커진다.
“하지만 이건 철학이 과학과 함께 하고, 예술이 기술과 함께 하던 시절의 세계관에서나 이해될 수 있는 연결인데. 철학이 예술과 함께 하고, 과학이 기술과 함께 하는 이 시대의 세계관으로는 쉽지 않았을 텐데. 더구나 그것을 앎이 인간의 의무라는 관념과 연결해서 맞춘다니. 대단하잖아.”
“후후.”
여우는 득의양양하게 웃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웃음이 그렇게 자랑스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득의양양한척 하는 것이다. 앎이 인간의 의무이기에, 선악과는 지혜과이며, 그것은 금단이며, 말이며 이성이라는 것을 연결하기 위해, 여우가 바라보아야 했던 것은 달갑지 않은 것들이다. 아니,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들이다.
“어때, 설명해 주지 않을래? 어떻게 네가 선악과가 지혜과라는 것을, 앎이 인간의 의무라는 것과 연결해서 마침내 도달할 수 있었는지. 앎이 인간의 의무라는 그 힌트는, 실은 과학이 기술과 함께하고, 철학이 예술과 함께 하는 이 시대의 평범한 구성원인 네게는 심지어 힌트라기보다 함정의 역할을 했을 공산이 클 텐데.”
“그건... 그만두자. 데이튼데, 재미없게.”
여우는 웃으며 거절한다.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다. ‘눈이 밝아져 알몸인 것을 알고’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래서 인간은 짐승처럼 흘레붙지 않는다. 축복이지 않은가.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면, 짐승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짐승처럼 웃는 게 잘못된 것이지, 인간이 인간답게 갈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르지 않아. 말이 세상을 창조했다면서!
“후훗.”
이리세는 웃는다. 여우는 그녀의 웃음이 이제 초월적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세계가 변했다.
뭐지? 당황조차 제대로 인지되지 못하는 순간을 타고, 이리세는 여우의 앞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얼굴이 달라 보인다. 이건 뭘까? 이제까지 인식하던 이리세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는, 전혀 달라 보인다. 아득한, 아득한... 그것은 주입하듯 들어온다. 시공의시작전에있던하나의점은두막의충돌3초에모든것이결정되어지금을이루고절대가분화하며이데아는분열해세계를이루니인식은거기가닿지못하기에머나먼유출같은. 여우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직감한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고혹적으로 속삭인다.
“내가 이야기 할까?”
*가끔 이 글에서 라노벨의 향취를 느낀다는 분들을 봅니다. 저 자신은 라노벨을 몇 작품 보지 않았기에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분들이 계신 모양입니다.
*할 말이 없으니 별 시덥잖은 소릴 다 하는군요. 뭐 완결까지 써나갈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님들아 홍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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