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36화 (236/300)

#   237-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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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는 교실에 들어선다. 가방을 자리에 두고 일당의 영역으로 걸어간다. 다른 이들은 아직 등교하지 않은 모양이다. 민성이 혼자 뚱한 표정으로 고심하며 앉아 있다. 여우는 변비에 시달리는 표정이 저러하지 않을까, 라고 훌륭한 감상을 떠올리면서 그의 근처에 앉는다.

“왜 그러고 있어?”

“아, 왔냐.”

민성은 표정을 풀고 여우를 맞이한다.

“왔지. 왜 그러고 있냐니까?”

“좀 불길한 생각을 하게 돼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고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뭐 대단한 건 아냐.”

다시 찝찝한 표정을 보이며 민성은 말한다. 여우는 그의 표정에 흥미를 느끼고 묻는다.

“뭐길래?”

“그건 됐고, 너 수수께끼는 풀었냐?”

민성은 대답을 회피하고 다른 것으로 냅다 화제를 돌린다. 기분 좋은 예감도 아니고, 별로 말하고 싶진 않다.

“아, 응. 풀었어.”

“헤- 대단한데. 뭔지 좀 들어볼까.”

“나중에. 그보다 너 뿐이야?”

여우는 대답을 회피한다.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수수께끼의 의미를 말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아픈 일이다. 왜냐하면... 한숨. 거기에는 자신의 모습이 숨길 수 없는 깨끗함으로 드러나 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는 눈이 밝아져 제 몸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 그런 건 한 번만 이야기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은결하고 쿠로사카는 왔는데, 같이 나갔어. 은결 그 녀석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서. 함께 양호실에 약이라도 받으러 갔겠지.”

민성은 별반 더 추궁하지 않고 건성으로 답한다. 사실 쓸데없는 질문을 피하려고 반대로 물은 거지 별로 그 수수께끼에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

문득, 여우는 민성은 앞에 놓여진 연습장을 본다. 그 연습장에는 쿠로사카와 민성이 나누었던 것으로 보이는 필담이 많이 적혀져 있다. 그중 한 문장이 유독 여우의 시선을 끈다. 그는 잠깐 그것을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피한다. ‘마음’ 이란 소설에 대한 의견을 나눈 것 같은데, 알게 뭐람. 사람은 자신의 마음조차 모른다.

민성의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이 함께 간 곳은 양호실이 아니라 학교 옥상이었다. 차가운 바람을 한동안 씌면서 깊은 심호흡을 한 은결은 처음 교실에 들어설 때 보다 한결 나은 얼굴을 하고 있다. 마지막 큰 숨을 내뱉고 난 은결은 고개를 돌린다. 멀지 않은 곳에 묵묵히 서 있는 쿠로사카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은결을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괜찮아 진 것 같군.)”

“(응.)”

은결은 안정된 안색으로 쿠로사카에게로 걸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네 상태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무리는 하지 마.)”

“(고마워. 무리 같은 건 안 해. 유리에 너도 있고.)”

그렇게 말하고, 은결은 그녀의 옆에 주저앉는다.

"(전이라면, 이런 일에 대해 누군가와 이렇게 이야기하는건, 정말 기대도 못했던 일인데.)"

“(......)”

쿠로사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뜨거움 같은 것을 느낀다. 가을바람의 차가움과 싸늘함이 앗아갈 수 없는 종류의 열기다. 그것은 간지러움과도 닮았지만, 결국 가 닿게 되는 지점은 해소하기 힘든 공허라는 점에서 기쁨이라기보다 슬픔이다. 문득, 은결이 묻는다.

“(내가 진을 해제하고, 푸른 이빨을 제거하는데 성공하면 너는 이제 한국에서 떠나겠지?)”

“(그래.)”

은결의 말에 스며든 가득한 아쉬움에서 기쁨 같은 것을 느끼며 쿠로사카는 답한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지금 불고 있는 가을바람과 닮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이면에 담는 의미는 아마도 외면과 다를 것이다. 이 바보가 그렇게 이야기 하듯, 기표와 기의는 언제나 불일치하니까. 그러니까.

“(쉽진 않겠지만, 시간이 허락하면 언젠가 찾아갈게. 그때 문전박대 하지 말고 하룻밤 정도는 따뜻하게 맞아줘라. 이왕 먼길 무릎 쓰고 친구가 방문한 거니까.)”

은결은 웃는 얼굴로 쿠로사카를 올려다보며 부탁한다. 유독 ‘친구’에 강한 방점이 찍혀 있다고 느끼는 것은 우연이거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쿠로사카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고는 “흥.” 하고 시선을 돌린다.

무심한 듯 고개를 돌리지만, 사실은 생각하고 있다. ‘친구’라. 좋은 것 같다. 이 바보가 ‘친구’라는 단어를 진실로 입에 담기 위해 필요했던 것을 그녀는 안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기에, 아무도 친구일 수 없다고, 그는 절망적으로 이야기 했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그 모든 소통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이 바보가 ‘친구’를 이렇게 입에 담는다는 것,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 그것은 그 교통의 불모에 대해 적어도 자신은 벗어나 있다는 말이다. 아니, 여전히 불모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단어는 아련하게 슬프기도 하다.

“(오늘도, 그 세연이라는 아가씨와 데이트지?)”

“(응.)”

“(잘해.)”

“(노력할게.)”

가을바람이 분다. 은결은 가을바람 너머를 바라본다.

말갛게 물든 가을 산이 넓다. 희미한 향기마저 느끼게 하는 다양한 색의 발작적인 조합으로 충만하다. 그 위로 펼쳐진 하늘은 대조적으로 시리다. 이질을 허용하지 않는 순결한 푸르름 아래, 녹음의 생이 무수한 이질로 마지막 호소를 한다. 그 메마른 죽음의 화려함 아래서, 건물과 사람은 그저 묵묵하다. 그들은 산과도, 하늘과도 유리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눈 돌린 채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하나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가을바람이 분다. 가로수의 잎이 무럭무럭 떨어지고, 산이 전율하며 죽음처럼 잎을 토해 놓는다. 희망을 전했기에, 절망과 닮았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하지만 규정할 단어가 없기에 어둠이라고 불릴 수 밖에 없는 공간에서, 소녀는 어여쁘게 차려입고 한 남자 앞에 선다. 소녀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를 지닌다. 악마인 것 같은 천사. 혹은 천사인 것 같은 악마. 세계를 지배할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할 자애를 품고, 끝없는 분노로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제 몸을 태워 스러진 것들을 다시 세워 올리는 성의를 지닌다. 흔들리지 않는다. 무릎 끓지 않는다. 선악을, 결국은 모든 가치를 넘어서서, 그는 그러한 분위기를 품는다.

“(어떤가요?)”

“(예쁘구나.)”

조용한 손길로 책을 쓰다듬던 남자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는 그의 끄덕임에 꽃처럼 피어나는 웃음을 보여준다. 그 웃음에 이끌리듯, 남자는 한 손을 들어 얼굴의 한 쪽을 기대며 나른하고 느긋한 모습으로 묻는다.

“(자신 있느냐?)”

“(마스터께서 생각하시는 만큼.)”

“(그렇다면, 나는 오늘 전설의 아들을 만날 수 있겠군.)”

마스터는 웃으며 말했다. 소녀는 그 웃음을 보며 그 웃음의 한 끝에, 보이지 않는 유감 같은 것이 실려 있다고 느낀다. 왜일까? 소녀는 그 느낌의 이유를 알 수 없다. 소녀가 의아해하는 사이, 마스터는 생각난 듯, 한 마디를 추가한다.

“(그 아이는 최고지.)”

소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말했던 전설의 아들에 대한 평가다. 이어서 소녀는 말을 추가한다.

“(마침내 전설 또한 만나게 되시겠지요.)”

“(그렇겠지.)”

그의 웃음이 커진다.

*이번 챕터 끝나면 쿠로사카 좋아하시는 분들이 더 늘어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은결은 천재면서 그 천재성을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울화통을 터지게 하는데 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아주 기념비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ㅋㅋㅋ

*요즘 외전 ‘은결’을 완결 이후로 적어야 하나, 하고 좀 고민하고 있습니다. 외전까지 다 포함하면 한 300화 될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내년 초 까지 끝을 보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발생하게 되기에. 얼른 끝내고 쉬고 싶은 생각이 좀 있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아웅.

*주변에 홍보를 해서 개인지 신청자 수를 늘리도록 합시다~ 댓글도 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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