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35화 (235/300)

#   236-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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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그것이 시선의 문제였던 것은, 선생님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었기 때문이지. 선생님이 그녀를 원했던 것은, 단지 친구를 정말로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친구가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녀를 원하게 되지.

민성은 오늘 아침 일찍 왔다. 득의양양한 얼굴로 일찍 왔다. 그래서 쿠로사카가 오길 기다렸다가, 그녀의 도착과 함께 자신이 어제 발견한 ‘마음’의 의미를 그녀에게 설명했다. 민성은 그녀에게 이렇게 썼다. ‘여자는 중요하지 않았어. 주인공은 그저 친구를 이기고 싶었던 거야. 그렇지?’ 쿠로사카는 오자마자 자신을 향하는 단촐한 한 줄 문장에서 놀란 표정을 보였고, 다음 순간 웃으면서 위처럼 평해 민성의 발견을 긍정했다.

-그 결과 선생님은 친구를 죽이게 되고, 주인공의 호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지. 그는 그것을 두려워해. 자신이 주인공과 같은 입장에 한때 있었으니까.

쿠로사카는 또한 그렇게 적는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완성해 나가면서, 그녀의 마음에서도 한 글자, 한 글자가 떠오른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かつてはその人の膝の前に跪いたという記憶が、今度はその人の頭の上に足を載せさせようとするのです。'(일찍이 그 사람의 앞에 무릎 꿇었다고 하는 기억이, 이제는 그 사람의 머리 위로 발을 올리도록 하는 거지요.)

아프다. 지독하게 아픈 문장이다. 선생님은, 친구를 존경했고, 그의 의미를 자신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결국 큰 관심이 없던 그 여성을 열렬히 원하게 된다. 왜냐하면, ‘친구가 그 여성을 의미 있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그 여성을 취함으로서 의미를 획득하고 싶었고, 그 의미를 획득을 통해 마침내, 노예에서 주인으로 이동하고 싶었다.

쿠로사카는 그러한 선생님의 논리를 아주 잘 안다. 왜냐하면, 그녀야 말로 지난 긴 세월 동안 그러한 논리를 통해 자신을 구성해 왔기 때문이다. 시선이야 말로, 그녀를 바라보는 노예된 시선들이야 말로, 그녀의 주인이었다. 그래서 ‘마음’은 시선에 대한 걸작이고, ‘마음’은 ‘마음’이란 제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다른 어떤 단어도 이 걸작을 위한 제목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신을 잃어버린 근대의 인간은 이제 어디서 의미의 원천을 찾는가.

“......”

쿠로사카는 눈을 감는다. 눈물이 흐를 것 같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아프다. 역시 은결을 알게 된 것은 불행이다. 그를 몰랐다면, 그런 것을 직시하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알았더라도, 그것의 남의 일로 차갑게 내려다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자신에게 세상은 얼마나 쉽고, 단순하고, 즐거울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알아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 낙원은 사라졌고, 황폐한 대지를 자신을 바라보며 걸어야 한다.

“쿠로사카?”

민성이 부른다. 쿠로사카는 눈을 뜬다. 평소와 한 점 다르지 않은 얼굴로 그녀는 아름답게 웃으면서 글을 쓴다.

-미안. 잠시 글을 되새겨 보느라고. 그런데 어떻게 알아낸 거야? 나는 그걸 알기 위해서 꽤 시간을 들여 여러 번 읽어야 했는데, 일주일 만에 찾아내다니, 억울한걸. 혹시 민성은 문학에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후후. 에이, 뭐 나도 좀 그렇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지만, 은결이나 너에 비할까. 그리고 내가 그걸 포착한건 사실 집에서 일어난 전쟁을 정리하다 보니, 우연히 영감이 스치고 지나간 덕분이지. 두 분을 화해시키면서, ‘설거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걸 실감했으니까. 그걸 알게 되니까, 그 글도 쉽게 이해가 되더라고.

민성은 자랑스레 말한다. 민성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쿠로사카는 가냘프게 마주 웃어 보인다. 그의 미소가 부럽다. 그는 소설 ‘마음’은 이해했지만, 그 이야기의 의미를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걸, 그래서 사실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은 모른다. 민성은 계속 글을 쓴다.

-그리고 너하고 은결이 옆에서 많이 이야기 해 주기도 했고.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민성은 웃을 수 있는 것이겠지. 그는 은결과 자신에게 인도받아 그 소설의 의미를 퍼 올리는데 성공했다. 자신도, 은결의 인도가 있었기에 겨우 도착했다. 많은 인도가 있을수록, 퍼 올린 의미는 자신과 분리되는 것 같다. 힘들여 얻지 않았으니까. 힘들여 나를 거기 던져 넣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제 스스로, 어떠한 인도도 없이 그것을 퍼 올린 은결에게 이 소설은 어떻게 읽혔던 것일까? 조용한 눈물일까? 서글픈 미소일까? 한없는 광소일까? 공감의 미소일까? 안타까운 한숨일까? 정적의 무심일까? 쿠로사카는 그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녀는 은결의 높이를 모른다. 쿠로사카는 상상력의 부족을 느낀다. 그녀는 그저 그가 가엾다고 느낀다.

-그런데,

라고 민성이 글을 다시 연습장 위에 글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오늘 수업 끝나면 같이 영화라도 보러 가지 않을래?

-미안.

쿠로사카는 담백하게 거절한다. 물론 민성은 포기하지 않는다.

-에이, 어차피 따로 사귀는 남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왕에 외국에 왔는데 이것저것 체험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그건 그렇지만... 별로 내키지 않아.

쿠로사카는 다시 거절한다. 의지의 한국인 민성은 굴복하지 않고 그녀가 기분을 상해하지 않을 것 같은 범위 안에서 지속적으로 데이트를 신청해 본다. 하지만 번번이 퇴짜다. 흔들릴 기색도 하나 안 보인다. 알고 지낸지도 오래됐고, 그간 친하게 지내온데다, 호의가 있다는 건 쭉 보여줬는데도 이렇게 가드가 튼튼하다니, 서글픔을 느끼며 민성은 묻는다.

-혹시 사귀는 사람은 없어도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적혀진 문장을 보고, 종이 위로 향하던 쿠로사카의 펜이 흠칫, 뒤로 물러선다. 그녀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희미한 간격을 두고 그녀는 ‘아냐.’라고 적는다. 그러나 민성은 이제 알았다. 그녀는 사귀는 사람은 없더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좋아하지만 스스로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이 있다. 누구일까? 일본인이리라. 미남에 집안도 좋고, 친절하고, 그런 용서할 수 없는 인종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음, 시시한 놈이면 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시시껄렁한 놈이 쿠로사카 같은 아가씨를 꿰어 찬다면 틀림없이 심한 박탈감에 시달리게 되리라. 그럴 때는 차라리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은 녀석이 채어가는 게 마음의 고통이 덜한 법이다. 납득(포기)하기 좋으니까. 하지만 이어서 민성은 다짐한다.

‘기브 업 한건 아냐. 아직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 음!’

그가 각오를 다지던 중에 뒷문으로 학생이 한 명 들어선다. 속이라도 좋지 않은지 얼굴이 핼쓱한 소년이다. 쿠로사카와 민성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 소년은 은결이니까. 민성은 어디 아픈가 싶어 다가가 용태라도 묻고자 천천히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쿠로사카가 일어나 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괜찮아?)”

“(아, 응. 대단한건 아냐.)”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가방 내려놓고 나가서 얘기하자.)”

은결은 고개를 끄덕인다. 민성은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며 ‘혹시?’라는 의혹을 떠올린다. 아니, 터무니없는 것 같지만, 아니, 진짜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아니,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싶은 것 같기도 하지만...

‘으음, 하지만 저 녀석 여자 친구 있잖아?!’

용서하기 힘든 기분이다!

민성은 미묘하게 얼굴을 찡그린다.

*지난 화 댓글이 적어서 의기소침!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몰라도 제게 글쓰기는 좋은 취미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에 수반되는 스트레스와 짜증도 상당해서 취미로 삼기에는 좀 하드코어 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가령 글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죠. 글에 관한 생각이 쭉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으음- 수양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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