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20)
#
민성은 꿀꿀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갔다. 뒷문을 여니 그를 맞이하는 광경은 오늘 일당들 가운데 그가 가장 늦었음을 알려줬다. 고릴라가 그를 맞이했다.
“도저히 좋은 아침이라 말할만한 얼굴은 아니군.”
“아, 뭐-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하수처리장의 오수 모아놓은 통 같은 부엌의 모습이 짜증스런 어머님 얼굴과 함께 하면 아무래도 상쾌한 아침이 될 수 없겠지. 더구나 다음 주에는 끝내주는 이벤트도 하나 대기해 계시고 말야.”
시니컬하게 답한 민성은 가방을 자기 자리 위에 올려두고 일당의 자리로 돌아온다. 늑대가 그의 답을 받아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오래 갈 것 같은가 보지?”
“어제 아빠랑 통화해 봤는데,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은 기세더라.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에휴.”
한숨이 깊다. 은결이 끼어든다.
“그럼 두 분을 네가 화해 시켜보는 게 어때?”
“아서라. 설거지도 못하게 하는데 그런 큰일이 잘도 되겠다.”
민성은 미간을 좁히며 손을 설레설레 내 흔든다. 하지만 은결은 설명을 지속한다.
“아니야. 설거지는 그 자체로서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어. 그건 두 분의 자존심이 전이된 대상이었지. 그래서 건드릴 수 없었던 거야. 말하자면 보호막으로 보호받는 적을 보호박은 해결하지 않은 채 처리하려는 꼴이지. 그리고 전이된 자존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아이콘을 없애려 하는 것은 전이된 가치를 허공으로 띄워버려. 그래서 그 자존심 자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설거지를 해결하는 것은 그 싸움을 도리어 깊게 만들 우려조차 있어. 그렇다면 도리어 그 싸움 자체를 해소해 버리도록 하는 쪽이라면 효과가 있지 않을까? 설거지가 중요하지 않은 것인 만큼, 두 분 모두 사실은 화해하고 싶을 거야.”
“음...”
들어보니 그럴듯 한 것 같았다. 주변에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당사자인 민성은 진지한 얼굴로 집중한다.
“네가 중개자로 나서면 괜찮아. 두 분이 쉽게 화해할 수 없는 것은 또 먼저 화해를 청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 시시한 공식이 그런 흔한 자존심 게임의 묵인된 룰이기 때문이야. 그러니 네가 그 사이에 끼어들어 완충재 역할을 하도록 해. 그러면 두 분이 먼저 화해를 청할 필요 없이, 그래서 두 분 모두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도록 하면서 화해를 하도록 유도할 수 있어.”
“그럴듯한데.”
은결의 이야기가 끝나자, 민성은 간단하게 그의 이야기를 평한다. 정말로 그럴듯했다. 민성은 어제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차가운 기색이긴 했지만, 마지못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화해를 워하지만 자존심에 대한 욕구가 한결 더 강했을 뿐이다. 적당한 계기만 있다면 냅다 올라타리라 싶었다.
“해 봐. 성적으로 효도를 못하면 이런 거라도 해야지.”
늑대가 킬킬대며 옆에서 부추겼다. 대부분의 어머니에게 ‘성적’이란 잔소리를 구성하는데 그야말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요소다. 그간 신경이 날카로워진 어머니에게 많이 시달린 민성은 그렇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성적’운운에 좀 민감했다. 그는 으르렁 거리며 쏘아붙인다.
“이 자식이 나하고 같은 물에서 노는 주제에!”
늑대 한 방에 깨갱. 민성은 만족스런 얼굴로 은결을 돌아본다.
“하여간 고마워. 해볼게. 잘 되면 한턱 쏘지.”
“그래. 중재하면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화해한다고 ‘지는’게 아니란걸 잘 설명해 드리는 거야. 그게 제일 민감한 문제니까. 알겠지?”
은결은 충고했다.
“응.”
민성은 그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마음에 새겼다. 근처에서 쿠로사카는 어딘가 마뜩치 않은 듯 한 표정으로 은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문제를 일단락한 민성은 이제 주제를 여우에게로 돌렸다.
“그나저나 너는 어떻게 됐냐? 교인도 아니면서 성경 붙잡고 일주일이나 끙끙거렸고, 당장 내일이 토요일인데, 뭔가 성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데드라인 아냐?”
“아직, 완전히 꿰진 못했지만, 거의 다 잡은 것 같아.”
“흐응. 어제도 똑 같은 말 했잖아. 위험한 거 아냐?”
고릴라가 책상 위에 몸을 얹으며 말한다. 여우는 자신을 향하는 고릴라의 그 말이 시니컬하다고 느낀다. 그 시니컬함 이면에 숨어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시니컬한 표정, 그리고 시선. 무슨 의미를 담고 저 시선을 나를 향하고 있는 걸까? 여우는 심장이 크게 뜀을 느낀다.
“그냥 은결한테 알려달라고 하는 게 어때? 당장 내일인데.”
늑대가 약간 나른하게 말한다. 여우는 그 나른함에서 조롱 같은 것을 느낀다. 나른함, 관심없음. 왜냐하면 나는 ‘어차피 네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늑대의 말에 담긴 나른함은 그런 의미인가?
“알아서 할 거야.”
여우의 대답. 뒤쪽 대답이 어딘가 높고 날카롭다. 마치 화난 것 처럼. 늑대는 양 손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무서워라. 알아서 해.’ 라는 듯한 제스쳐. 물론이야. 나는 알아서 할 거야. 여우는 속으로 답한다. 고릴라가 다시 끼어든다.
“그러다 차이고 피눈물 흘릴라.”
그리고 고릴라와 늑대는 킬킬거리며 웃는다. 민성도 이어서 가벼운 조롱에 참여한다. 그들의 웃음을 들으며, 또한 보며, 여우는 뜨거움을 느낀다. 불쾌하게, 토해내고 싶은 뜨거움. 하지만 그것을 토해낼 수는 없다. 여우는 그저 견딘다.
“......”
은결이 그 겔겔거리는 웃음들 사이로 끼어든다.
“자력으로 문제 풀겠다는 사람 놀리는 건 그만둬. 응원해도 모자랄 판에. 그리고 지금 뭐 어때. 내일까진 아직 충분히 시간이 있잖아. 어차피 알려주는데 필요한 시간은 5분이면 충분해. 논리에 대한 설명까지 하려면 좀 길어지겠지만. 내일 물어봐도 될 테고, 그것도 무리라면 어차피 여우도 내 휴대폰 번호 알고 있잖아. 약속시간 전에 잠깐 통화하면 되지. 뭐, 솔직하게 모른다고 해도 괜찮을 거고.”
바른생활 사나이의 바른생활 발언에 모두는 ‘그렇습니까.’하고 물러선다. 은결이 정론을 말하면 상대할 수가 없다. 여우는 은결을 바라본다. 은결은 웃는 얼굴로 얼굴에 ‘?’를 떠올린다. 왜 바라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여우는 말한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응. 너는 할 수 있을 거야.”
은결은 당연하다는 듯 긍정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는 듯 거침없는 긍정이다. 다시, 여우는 은결이 짐승 같다고 느낀다. 사과를 먹기 전의 아담과 이브처럼.
“(널 모르겠어.)”
옥상에 은결이 올라오자, 쿠로사카가 맨 처음 한 말은 그것이었다. 은결은 당혹스런 표정을 했다.
“(뭐가?)”
“(때때로 믿을 수 없게 예리하면서... 뻔한 걸 모르니까.)”
“(음, 특별히 예리한 것도, 둔한 것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은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렇게 말한다. 쿠로사카는 얼굴을 찡그리고 한 마디 해 주려다가 만다. 어차피 말해봐야 모른다. 더구나 이 멍청이는 울화통 터지게 멍청한 주제에 천재라서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에 대해서는 상대에게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그러니까, 천재의 논변을 꺾을 수 있는 논리를 상대에게 요구한다. 차라리 모르겠다고 똥고집을 피우는 게 더 낫다.
“(...그만두자.)”
그래서 쿠로사카는 결국 그렇게 말해야 했다. 대신에 이 갈곳을 찾지 못하는 분노는 대련을 통해 좀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저 키리야미를 빼들었다. 그걸 보고 은결은 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대련이야 흔히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보자니 대련에 좀 사감이 섞이리라 예감했기 때문이다.
“(간다.)”
은결의 표정을 상쾌하게 바라보면서, 쿠로사카는 말했다. 말의 끝이 흐트러지기도 전에,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다. 대기의 진동을 거의 남기지 않는 지극한 초신속. 어떤 물체라도 이 속도로 움직인다면 그 운동에너지로 인해 자체로 이미 무시무시한 무기다. 은결은 다급하게 손을 교차하며 역장을 형성한다.
-쿠앙!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역장이 해제되고, 은결의 양팔이 뒤로 크게 튕겨나간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은결은 더 이상 그녀의 공세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역장이 풀리는 순간 이미 발을 박차 그녀의 공격권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늦었다. 몸을 띄우는 그의 앞에 싱긋 웃으며 키리야미를 쥐고 있는 쿠로사카의 아름다운 얼굴이 있다.
“!!!”
은결은 경악했고, 쿠로사카는 한결 상쾌하게 웃는다. 날아드는 키리야미의 아름다운 궤적을 바라보면서 은결은 오늘 새벽 할아버지와의 이야기를 되새긴다. 역시 자신의 생각에는 문제가 없었다. 사람을 샌드백 취급 한다면, 그건 그 사람을 별로 안 좋게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 법이다.
*생각해 보면 집에 우환이 있어 글 접었다가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나 끝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글을 적기 시작했는데 그보다 더 규모가 큰 글까지 하나 더 완결 내는 시점까지 오다니, 음. 놀랍군요. 그때는 정말 다시 글 적을 거라 생각 안 했는데.
*이거 완결되면 제가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꼭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들 중 상당부분은 말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주제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에서 해방되어 훨씬훨씬 가볍고 발랄한 이야기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하기야 쓰고 싶은 이야기야 그 외에도 많죠. 그저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된다는 게 아쉽습니다.
*어쨌거나 이 글 쓴다고 사용했던 자료 값도 못 건질 텐데, 응원이나 합시다! 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