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29화 (229/300)

#   230-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17)

#

쿠로사카는 기호를 해석하고 있는 은결을 바라본다. 무방비하게 등을 내보이고 해석에 열중하고 있는 은결의 모습에서 쿠로사카는 어떤 아련함 같은 것을 느낀다. 자신은 바라보고 있지만, 그러나 이 시선은 은결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렇게 그를 향해 시선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 육개월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

생각이 막혀 더 이어지지 못한다. 갈곳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은 완강하게 더 이상의 진전을 거부했다. 더 걸어가서 마침내 보게 될 것의 모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녀는 은결이 해석하는 진을 바라본다. 사물을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술식이라고 한다. 쿠로사카는 저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다. 세계를 다 뒤져도 설명 없이 저 술식의 효과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힐지 의문스럽다. 그 구조를 해석하고 풀어내야 한다는 조건을 부여하면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저 술식은 박수행이 시전 한 것이다. 천재중의 천재. 쿠로사카는 말한다.

“(거의 다 끝났군.)”

“(응. 늦어도 삼 주안에는 끝날 것 같아.)”

바쁘게 움직이던 손길이 멈추고, 은결은 몸을 돌린다. 지금 은결의 기호를 해석하는 속도는 과거와는 비교하기 힘든 수준이다. 몇 번의 사건, 특히 아담의 언어와 접촉하고 난 뒤, 그의 기호에 대한 이해는 훨씬 더 늘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더 위태로워 보였고, 안타까웠지만 그 부분은 이제 진정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정말로 그 술식을 풀어내면 푸른 이빨을 제거할 수 있는 거야?)”

“(아마도, 거의 확실하게.)”

“(어딘지 불안한 대답이군.)”

“(이 술식을 해체에 드러나게 될 것의 내용을 나는 모르니까.)”

“(모른다고?)”

조금 놀란 얼굴로 쿠로사카는 되묻는다. 모른다니.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은결은 담담하게 말한다.

“(응.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버지의 그간 연구를 종합해 놓은 정보의 집결체라는 것 정도야. 아버지는 그 이상 아무 것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어. 내가 찾고 있는 것은 그 가운데 현자의 돌을 구성하는 기본 술식의 응용방법이지. 푸른 이빨이라는 관념체 그 자체만 소거시켜 버릴 수 있는 방법.)”

“(그럼 해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얻은 정보를 다시 이해해야 한다는 거잖아. 그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거 아냐?)”

쿠로사카는 화내지 않고 묻는다. 물으면서,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동시에 은결이 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신뢰’라는 이름의 감정임을,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한다.

“(괜찮아. 가장 중요한, 그리고 어려운 것은 이미 알고 있어. 현자의 돌을 구성하는 기본 술식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나머지 응용은 방식만 알면 해결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 응용 방식이 없을 수도 있잖아. 그 경우는 어쩔 거야?)”

“(그건 상상하기 힘든걸. 현자의 돌을 구성하는 기본 술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너도 알고 있잖아. 그건-)”

은결의 말 끝이 아스라하니 바람을 타고 스러진다. 그건- 그 아스라함을 타고 쿠로사카는 기억을 환기한다. 푸른 이빨과의 전투 가운데서 보았던 그 장엄한 진식. 어떤 아름다움도, 어떤 힘도, 거기서는 무의미했다. 손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에서 영원을 읽는, 그러한 위대함이 그곳에는 있었다. 그 힘이 자재할 수 없는 우주의 현상을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누미노제, 피조물감이라고도 불리는, 과거 그녀가 이 세계에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경험해야 했던 절대적인 것과의 접촉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그렇군. 하지만 네 아버님은 그런 힘을 가지고도... 그러니까 음, 완전하게 그 사념체를 처리하지 못했잖아. 그 힘의 크기와 가능성은 어쨌든 응용에서는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은결은 어렵게 답한다. 아버지의 몰락. 그것은 되새기는 것만으로 영혼이 난도질당하듯 아파오는 기억이다. 쿠로사카의 말이 옳을까? 그때 아버지가 몰락한 것은 현자의 돌에 대한 연구가 아직 불충분했었기 때문일까? 아버지 본인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었다. 하지만 은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그저 타자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놓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내가 푸른 이빨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최소한 해체해서 원형으로 되돌리는 물질이나 사태를 선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 그 술식은 원리적으로 ‘그 무엇’도 해체해서 에너지 상태로 돌려버릴 수 있어. 그런데도 그 힘을 인도해 다른 곳으로 분출시켜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술식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구현되는 힘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그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말이잖아. 핵심은 이 지점이지. 아버지는 틀림없이 그 방법을 알고 있어. 그러니 거의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을 거야. 하다못해 최소한의 힌트가 될 만한 것이라도.)”

쿠로사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차가운 가을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를 훑었다. 속으로 깊은 안도 같은 것이 스친다. 그녀 역시 세연을 베고 싶지는 않다. 친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녀와 자신은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녀를 베고 나면, 아무리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해도 두 번 다시, 은결과 지금처럼 마주 할 수 없으리라는, 강한 확신이 든다. 그건... 쿠로사카는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넣어 살짝 깨물며 우물거린다. 육신의 입을 막아, 마음의 말을 막는다. 명확한 상이 된 것도 아닌데 상상이 상흔이 되어 마음에 덧씌워진다. 아프다.

“......”

은결은 쿠로사카를 보지 않고 있다. 그는 하늘을 보고 있다. 가을바람의 선선함을 전신으로 맞으면서, 하늘을 보는 그는 푸른 이빨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손에 힘이 쥐어지고, 그의 존재를 자신의 손에 쥐게 된다면, 그때 그를 제거해야 한다면... 그런 상상을 해 본다. 의아하게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후훗, 어때?”

저전거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미래가 자랑스럽게 은결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세계사 수업 가운데 떠올린 어떤 생각에 대한 것이었다.

“음, 맞아. 놀라운데?”

“후훗.”

은결의 평가를 듣고 만족한 듯 득의양양하게 미래는 웃었다. 그녀의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면서 은결은 가볍게 미소를 물었다. 방금 그녀가 은결에게 한 이야기는 세계사 수업 시간 가운데 모리오리족과 마오리 족의 이야기를 떠올리다가 언젠가 식사하면서 이야기 했던 휴대폰의 이야기와 등치시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휴대폰의 진보가 그 사용자에게 이득을 줌으로서 경쟁에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해 휴대폰을 싫어하는 사람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처럼,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와 발전도 그렇게 경쟁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역사를 이해하는 일반 이론으로 은결이 휴대폰을 가지고 이야기 했던 이론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미래의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논리 자체는 흔한 것이지만, 연결하기 힘든 현상을 연결해 일반화 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논리를 좀 더 구체화하면 지난세기 가장 중요한 역사가였던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기본적인 틀인 ‘도전과 응전’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진보가 경쟁을 위해 소비된다면 진보는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 힘들지. 그건 기껏해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가운데 등장하는 붉은 여왕의 이야기를 되새기도록 할 뿐이니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글의 후반에 엘리스가 붉은 여왕과 게임을 하거든. 그런데 그 게임을 하는 판 자체가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엘리스는 계속 달리지만 결국 같은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 뿐이지. 그걸 빗댄 이야기야. 멈추는 자는 멈춤으로 인해 아무런 퇴폐를 겪지 않더라도 주변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경쟁에서 패배하게 된다는 말이지...”

은결은 한숨을 쉰다. 그것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세계의 근본 원리 가운데 하나다. 타자가 너희를 구성한다. 말하자면 진정한 주체는 타자다. 주체는 언제나 타자의 찌꺼기다. 이미 가득 찬 본질로서의 주체는 결코 세계 가운데 꿋꿋하게 자리 잡지 못한다. 주체는 반드시 타자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성립하기 시작한다. 변하지 않는 주체는 타자와의 소통으로 인해 소멸할 수 밖에 없다.

그가 나를 때린다면, 나 역시 그를 때려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때리는 그는 나를 마음대로 약탈하고, 죽일 수 있다. 나는 세계 가운데 남지 못한다. 그가 비겁한 무기 ‘총’을 사용한다면 나 역시 ‘총’을 사용해야 한다. 명예로운 ‘칼’을 무기로 고수하다가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나는 세계 가운데 남지 못한다. 완고한 나의 무정부주의는 집단을 구성하는 민족주의자들의 단결된 힘 앞에 완전히 무력하다. 나 역시 환상의 공동체를 형성해 단결된 힘으로 그들에 맞서지 않는다면 패배한다. 나는 세계 가운데 남지 못한다.

그래서 주체는 반드시 타자에 의해 자신을 구성한다. 최소한 타자와 같은 걸음을 걸을 수 있어야 ‘자신’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뿐만이 아냐. 굉장히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관계야. 진화에서도, 경제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건 무척 흔해.”

오늘 점심에 들었던 민성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의 부모님 두 분은 여전히 화해하지 않고, 집안은 냉전 상태라고 한다. 기껏 손을 가지게 되었는데,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타자에 의존한다. 안타깝다.

“최소한 욕망은 자신의 욕망일 수 있어야 할 텐데...”

은결 뒤에서 미래는 아리송한 얼굴을 한다. 앞서 한 말은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지금 오빠가 한 말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어야 한다니, 욕망은 원래 자신의 욕망일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미래가 의아해 하는 사이, 자전거는 황량한 슈퍼마켓의 앞을 지난다. 얼마 전 대형 마켓의 등장으로 인해 가격경쟁력을 잃어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던 것으로 보이던 작은 슈퍼다. 스쳐 지나가듯 그 슈퍼를 보면서 미래는 이 역시도 휴대폰의 논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낀다.

스케일의 힘으로 싸고 많이 공급한다는 장점을 가진 대형 마켓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몰락시키고, 그런 장점에 대해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것들만이 남는다. 뻔하다면 뻔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논리. 미래는 생각을 이어 나간다. 그러나 패배한 이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은 쓰레기처럼 허덕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패배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붉은 여왕을 물들이는 그 붉은 색의 정체는 아마도 피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짐승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미래는 짐승이 되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초류시종님의 추천에 감사. 카프카는 물론 좋아합니다. 역사의 끝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하루키적 감성은 글의 질과 무관하게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전자북뿐만이 아니라 가능하면 종이책으로도 내볼 생각입니다. 최소 300분이 원해야 가능하겠지만.

*요즘은 얼른 글 접어버리고 한동안 어디 콕 처박혀 있고 싶은 기분입니다. 그러니까, 캐우울합니다. 자학해봐야 좋을 것도 없건만 자신의 찌질함만 맨날 명료하군요.

*댓글을 답시다. 댓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