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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28화 (228/300)

#   229-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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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교실에는 팔찌의 개수가 늘었다. 팔찌를 끼고 온 소녀들은 자랑스러이 내어 놓으며 꺄르르,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은 젊음의 여울에서 부서지는 빛살인양 그늘 없이 밝았다. 세연은 유행처럼 번진 친구들의 팔찌를 보면서 한 사람과, 한 단어를 떠올렸다. 사람의 이름은 베블런이고, 단어는 과시소비다. 계급과 소비행태를 분석함으로서 소비의 목적은 사들이는 물건 자체의 효용에 있다기 보다 지위의 우월성을 과시하는데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베블런이 만들어낸 게 과시소비라는 개념이다.

그래서 아우라에 대한 갈망은 끊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좀 좁다.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을 테지. 타자에 대한 열망은 도처에 깔려 있다. 그것은 ‘계급’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계급으로 나누기에 그것은 너무 촘촘하고, 너무 거대하다. 그래서 그늘 없는 이 모임에도 사실 그늘은 잠재한다. 언제든 일어설 준비를 하고 도사리고 있다. 어떤 풍요도 그것을 지우지는 못한다. 세연은 그렇게 느낀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닐 텐데. 살짝, 세연은 자신의 팔목을 드러내 본다. 은결이 만들어준 팔찌가 채워져 있다. 이 팔찌는 소중한가? 소중하다. 다른 모든 이들이 무시하더라도? 다른 모든 이들이 무시하더라도. 다른 모든 이들에게 하찮아도, 내게는 소중할 수 있다. 그러니 너 없이 나를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는 그렇게 많은 장미가 있지만, 어린 왕자에게 소중했던 장미는 단 한 송이의 장미였다. 그가 길들였던 그 장미. 즉자와, 외화와, 대자와, 소외와. 그런 것들일 텐데. 헤겔. 물론 세연은 그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친구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마주 웃으며 그 그늘을 무시하는 모임에 참여할 뿐이다.

오전 세계사 수업 시간이다. 미래는 지루한 눈으로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업이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아빠나 오빠에게 드는 것이 열배는 자세하고, 스무 배는 더 재미있다. 하긴,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은 수업이 없는 것 같다 싶기는 하지만 역사에 관련해서는 한층 더하다. 역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건과 인물에 대한 단순한 나열로 공책에 끄적거리며 공부해 봐야 시시할 뿐이다. 사건과 사건의 연결. 그 사이에 피어나는 ‘왜’라는 의문과 ‘이래서’라는 대답들의 교차. 그 딱 들어 맞춰지는 맞물림. 시간과 공간을 오가는 거대한 퍼즐게임. 미래는 역사라는 과목을 공부하는 재미는 그런데 있다고 생각한다.

‘뭐, 이건 아빠 견해지만.’

한 단락의 필기가 끝나고, 설명이 이어진다.

“...그렇게 볼테르, 루소, 디드로와 같은 사상가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위한 이론적 토대가 마련되지. 특히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지. 여기서 인간불평등기원론은 자연 상태의 인간은 완전하고 평등했는데, 그것이 사회에 의해 파괴되고 지금처럼 되었다고 하는 주장이지.”

미래는 살짝 하품을 한다. 인간불평등기원론. 미래도 안다. 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워낙 이것저것 많이 알기 때문에 어지간한 건 주워듣게 된다. 이른바 고귀한 야만인이라 이야기되기도 하는 가설에 근거한 이야기다. 하지만 참 순진한 이야기다. 자연상태의 인간이 그렇게 완전하고, 악은 모두 사회에 의한 것이라니, 더구나 그런 순진한 생각이 프랑스 혁명의 뿌리중 하나라니, 구구장창 이야기되는 프랑스 혁명도 참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야생의 고릴라도 동족을 살해할 줄 아는데, 야생의 인간이 고귀할 리가.

그녀는 아빠에게 언젠가 들었던 뉴질랜드의 두 부족 이야기를 기억해낸다.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의 이야기. 모리오리족은 평화롭게 분쟁을 해결하는 전통이 있는 선량한 수렵채집민들이었고, 마오리족은 땅을 걸고 살해하고, 살해당하든 전쟁을 무수히 경험한 농경민이었다. 마오리족이 모리오리족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배를 타고 건너갔고, 모리오리족의 대부분을 학살해 죽였다. 죽이고죽이고죽였다. 이야기 끝.

어쩌면 먼 옛날에 고귀한 야만인은 정말로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기꺼이 자기 것을 양보하고, 갈등의 해결을 위해 싸움보다는 대화라는 방법을 사랑하는 사람들. 하지만 있었다고 해도 소용없다. 기꺼이 죽이고 약탈할 줄 아는 자들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약탈해 승리했을 테니까. 고귀한 그들은 멸종됐겠지.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멸종시킨 자들의 후손일 것이다. 결국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이들도 기꺼이 죽이고 약탈할 줄 알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연약한 나도 공책 사수하려고 무거운 가방 들고 낑낑거리는 거지. 응.

“아!”

교실의 모든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된다. 그곳은 미래의 자리다. 무수한 시선 가운데서 미래는 얼굴을 붉힌 채 양손으로 작은 입을 가리고 있다. 무언가에 크게 놀라기라도 한 듯, 그녀는 방금 전 큰 외마디 소리를 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불안한 눈동자가 귀엽다. 칠판에 필기를 재개하려던 선생님이 반 전체를 대표해서 물었다.

“미래야, 무슨 일이라고 있니?”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헤헤”

크게 손을 내저으며 미래는 앙증맞게 웃는다. 선생님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린다. 우등생이라는 것은 이럴 때 꽤 편리하다. 미래를 향하던 시선들도 흥미를 잃고 각자의 책으로 돌아간다. 미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손이 걸리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 아니,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본다.

점심시간에 민성의 우울한 집안상황 보고가 있었다. 이번에는 비웃지 않고 모두들 위로했다. 이쯤 되면 웃으면서 놀 수 있을 만큼 사태가 가볍지 않다고 여겨진 때문이다. 친구들의 걱정에 사의의 뜻을 표하고, 그는 화제를 다른 곳, 여우에게로 돌렸다.

“그런데, 너는 어때?”

“응? 내, 내가 왜?”

여우는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말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민성은 표정을 찡그린다.

“왜 그렇게 놀래?”

“아니, 갑자기 묻길래.”

“역적모의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놀랄 거 없잖아. 그저 수수께끼니 뭐니 열심히 하더니, 상과가 있냐고. 토요일이면 얼마 안 남았잖아.”

여우는 안도한다. 민성이 말한 ‘어때’가 가리키는 지점을 착각했던 모양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민성이 사람 마음을 들여다보는 재주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의 부모님 이야기에 조금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여우는 그렇게 이해한다.

“어느 정도는. 여전히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대충 맥락을 꿸 수 있을 것 같아.”

“와, 어떻게? 그 수수께끼가 왜 선악과가 지혜과인가- 하는 요상한 질문이었지? 워낙 유명하니 나도 창세기 정도는 안다만, 전혀 모르겠던데.”

민성이 놀라며 묻는다. 조금 득의양양한 얼굴로 여우는 설명했다.

“음,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이 이성이고, 이성이 창조하는 거잖아. 그게 지혜라는 것과, 그리고 선악이라는 것과 연결되는 것 같아.”

“그게 뭐야? 그걸 어떻게 꿰겠다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도리어 더 복잡해진 거 아냐? 엮어야 할 게 두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났잖아.”

듣고있던 고릴라가 뚱한 얼굴로 반문한다.

“아냐. 그러니까 그건...”

말이 흐려진다. 여우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고 싶다. 그것들은 모두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어져있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이해하지만 논리로 구성하지는 못한다. 답답하지만, 논리로 구성되지 못한 직감은 상대를 설득할 수 없다. 고릴라는 끼득끼득 조소하는 얼굴로 말한다.

“그냥 포기하고 은결이 한테 부탁하는 게 어때? 지금 당장이라도 알려줄텐데.”

욱, 하고 치솟아 올라오는 감정. 여우는 강한 태도와 큰 목소리로 고릴라를 부정하고 싶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다. 옳지 않다. 너는 틀렸다. 그때 은결이 끼어든다. 그는 고릴라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여우는 방향을 잘 잡았어. 거기까지 갔다면 이제 금방인걸. 나한테 부탁할 이유가 없어. 여기까지 왔다면 부탁해도 알려주지 않는 게 도리겠지.”

“에? 그래?”

은결은 고릴라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확인한다.

“그래.”

“뭐, 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고릴라는 물러선다. 그 물러서는 모양새를 보고 여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거기에 민성이 참여한다.

“아, 나도 하나 묻자.”

은결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민성을 돌아본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어제 공부도 안 되고 해서(여기서 주변에서 언제는 공부 열심히 한 것 처럼 지껄인다고 수군댔다. 민성은 무시하고 꿋꿋하게 말을 이어간다.) 마음을 다시 읽었거든. 그런데 말야, 쿠로사카는 그게 시선에 대한 소설이라고 했고, 너도 그게 옳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그저 개찌질한 청춘담으로 밖에 안 보이던데. 선생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괜히 질질 끌다가 친구 죽이고 자기도 죽는 이야기 밖에 안 되잖아. 뭐 그게 모든 인간의 속성이니 뭐니 하는 거라면 알겠지만, 시선이라는 거 하곤,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던데.”

‘개찌질한 청춘담...’ 일본근대소설 최고걸작으로 손꼽히는 ‘마음’이 단숨에 개찌질한 청춘담으로 추락하는 장면에서 은결은 예술 감상의 오묘함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다. 변기가 걸작이 될 수 있는 세계에서, 걸작이 쓰레기가 되는 것 역시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예술작품의 불투명성. 은결은 그 불투명성을 생각하며 답을 했다.

“왜냐하면, 네가 말한 ‘질질 끌었’다는 건 사실 ‘질질 끌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야. 그때는 시선이 없었지. 행위는 시선이 탄생하고야 일어났던 거야.”

“...그거, 선문답?”

민성이 곤혹스런 얼굴로 되묻는다. 주변에서는 동감한다. 은결은 여전히 쓴웃음을 짓는다.

“그렇진 않은데... 솔직히 내가 이런저런 얘기 다 해주면 소설 보는 보람이 없잖아. 소설 감상에서 너 자신이 소외되어 버리니까. 이 정도는 감춰 둬야지. 기왕에 시간 들여 읽었으면, 그런 정도의 수고는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네가 펜 돌리기에 자부심을 가지는 건, 그걸 잘 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실력을 쌓았기 때문이잖아? 예술 감상도 같은 거야. 금방 이해되는 건 어지간해선 그만큼 잊혀지기도 쉽지. 투자한 게 없는 만큼, 버리기도 쉬운 거니까. 그래서 고생해서 겨우 움켜쥐는 한 주먹만큼의 가치가 더 소중한 거지.”

“쩝, 뭐 그렇긴 하겠다만.”

무의식중에 손을 움직여 펜을 돌리는 동작을 취해 보이며 민성은 동의한다. 여우는 은결을 바라본다. 그의 눈동자에는 옅게 친절한 웃음을 띄우고 있는 은결의 모습이 망막의 굴곡을 따라 왜곡되어 담겨 있다. 은결은 그 시선을 모른다.

*alenoa님의 추천 감사!

*비밀글로 만드는 것은 전자북으로 만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멋있는 여성 캐릭터를 다뤄보고 싶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영웅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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