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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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미래와 함께 하교길에 대형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오늘 저녁거리부터 시작해서, 보급이 필요한 생필품 까지, 마련한 품목은 적지 않았다. 계산서에는 10만 원 이상의 금액이 찍혀 있었다.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한 골목에서 셔터를 내린 점포를 보았다. 얼마 전까지 영업하고 있던 슈퍼마켓이었다. 낡은 간판이 여전히 남아 과거의 그 곳을 설명하고 있었다. 어둡게 닫힌 셔터 문 앞의 오락기에서 동네 아이들 몇 명이 앉아 게임에 열중해 있었다.
은결은 오늘 자신이 장본 물건들을 생각했다. 큰 비닐봉지 두 개 분량 안에 담긴 물건을 모두 저런 슈퍼에서 산다면 다 합쳐 족히 12만원을 넘겼을 것이다. 또한 귀찮게 여러 가게를 들려야 했을 것이다.
‘......’
먹먹함.
은결은 중얼거린다.
“두 분이, 얼른 화해하면 좋을 텐데...”
“응?”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은결 뒤에 앉아 있던 미래는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얼른 호기심에 묻는다. 은결은 입을 연다. 그의 말은 자전거에 갈리는 바람을 타고 찢어지며 미래에게 전해진다.
“오늘 오빠 친구 민성이 자기 집에 부모님이 지금 싸워서 꼴이 엉망이라고 하소연을 했거든. 얼른 화해했으면 좋겠다고 싶어서.”
“오빠는 오지랖도 넓다. 걱정해봐야 별푼수도 없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그럴지도 모른다. 마음은 무력하다. 어떤 기도도 기대도,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바꾸지는 못한다. 소망은 한줄기 연기처럼 무력할 뿐이다. 은결은 관념이 힘으로 변할 수 있는 세계에 살지만, 그 역시도 엄격한 수단을 통해 유물론적인 변환을 거쳐 ‘기’라 부르든 ‘마나’라 부르든 ‘에너지’라 부르든 물질적인 것으로서 육체에 머물러야 한다. 결국 관념 그 자체는 아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은결은 물었다.
“그런데 미래야. 너 전에 샀던 장신구는 가지고 있어?”
“응? 무슨 장신구?”
미래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러니까 친구들이 하고 있다고 사달라고 했었던 거.”
“그런 게 있었어?”
까맣게 잊고 있던 모양이다. 은결은 희미하지만 슬픔과도 닮은 감정을 느낀다.
“있었어.”
오라비의 간결하고 굳은 답변에 한동안 미래는 기억을 이리저리 뒤졌다. 자기 방 정리는 서툴지만, 기억을 정리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녀는 이내 환한 표정으로 답했다.
“응- 아, 기억났다. 아마 내 방 악세사리 서랍에 넣어뒀을 거야.”
“요즘에는 안 하나보지?”
“그야 유행도 다 지나갔고, 이제 그거 하면 애들이 놀릴걸. 어차피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건 아냐.”
미래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한다. 은결도 그녀의 답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미래는 다른 친구들을 이야기 하며 그것을 원했다. 다른 친구들이 원하지 않을 때, 그것은 같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어차피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욕망은 타자의 욕망일 뿐이다.
“그래...”
가을을 닮은 어조로 은결은 미래의 말을 받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어쩔 수 있었다면- 세계는 좀 더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안녕.”
학원에서 이리세는 자연스럽게 여우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태도는 거침없고 당당하지만, 여성스러운 부드러움을 느끼게 한다.
“아- 안녕.”
이리세를 맞이하며 여우는 새삼 확인한다. 그녀는 기이하다. 이름은 물론, 그 당당한 태도, 고등학생이라 여기기 힘든 압도적인 지식과 논리. 그녀는 마치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은결인 것--- 그렇지 않다. 은결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으니까. 응. 그래. 대단하지 않다. 언젠가 더 높은 곳에서 그의 고도를 내려다보며 ‘역시’ 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래. 음, 그래. 확실히, 그래.
앉자마자 이리세는 여우에게 물었다.
“어때, 내가 낸 수수께끼는 알 것 같아?”
“그게 영.”
여우는 쓴 웃음을 지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다. 틈틈이 성경을 뒤적이며 생각해 보지면 역시 어렵다. 왜 선악과가 곧 동시에 지혜과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의무이기까지 하단 말인가. 여우는 그 단서 사이의 결락에서 어떠한 징검다리도 발견하지 못한다.
“후후, 어려운가 보지?”
“솔직히. 덕분에 평생 팔자에 없을 것 같던 성경도 샀는데 말야.”
여우의 푸념 같은 답변을 들으며 이리세는 상냥하게 웃는다.
“그렇게 어려운 건 아냐. 창조가 왜 ‘말씀’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생각해 봐.”
“말씀?”
“말씀은 로고스지. 그리고 로고스(logos)는 이성이야.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다.”
-희미하게, 무언가 잡힐 것 같다고, 여우는 느낀다.
여우는 그 느낌을 어렵사리 손에 쥐며 이리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리세는 그 이상 말해주지 않는다. 그녀는 짓궂은 미소를 여우에게 보내며 곱게 고개를 젓는다.
“너무 가르쳐 주면 재미없잖아. 이번 주말 네 답변을 기대할게.”
“쳇.”
“그런데 은결은 어때?”
“은결?”
여우는 자신의 목소리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느낀다. 은결. 그는 대단하지 않다. 비록 자신이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그 결락의 징검다리를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당연하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그의 대단함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단지 먼저, 좀 더 시간을 들여 이런저런 책을 읽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도 조금 더 열심히 읽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 결락은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 응. 그렇다. 여우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 요즘 여러 가지로 좋은 것 같은데. 전화로 이야기 해 보면 조금 더 밝아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거든.”
“헤- 잘도 전화로 그런 것 까지 안다?”
여우는 유쾌하게 묻는다. 하지만 심장이 불쾌하게 뛴다. 그는 그 불쾌함을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이해하지 못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리세는 어깨를 으쓱인다. 그녀는 발랄하고 차가운 미소와 더불어 여우에게 답한다.
“그런가? 하지만 틀림없을 거야. 나는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강한 어조다. 왜 알 수 있다는 거지? 너는 은결과 같은 고도에 있다는 거야? 그러나 은결은 높지 않다. 높은 것은 너다. 그러니까 너는 알 수 없어. 알 수 없어야 한다. 알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그렇고말고.
“누가 들으면 네가 은결 여자친구인줄 알겠다.”
엉망으로 친 시험의 점수를 억지로 확인하듯, 여우는 이죽거린다. 이리세는 그 말에 조금 놀란 얼굴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거려 본다. 그리고 흥미로운 듯 여우의 말을 받아 중얼거린다.
“후후.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리세의 중얼거림은 명확하게 들려온다. 감추어질 생각이 없는 명료한 의견이 피부의 솜털 위에서 잉잉거린다. 무슨 말을 던져 이 모든 이야기를 양변기에 쏟아 넣은 토악질처럼 깨끗하게 날려버릴 수 있을까? 여우는 그것이 참 어렵다고 느낀다. 물을 삼키는 하수구의 유쾌한 트럼 소리가 그립다. 끄르륵- 이 순간이라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음악보다 아름답게 들릴 텐데.
*개인지는 만들 경우 권 단위로 팔지 않습니다. ‘질’ 단위죠. 500페이지 6권정도로. 고로 학생 분들에겐 상당한 부담일 수 있겠죠. 제가 개인지에 비관적인 이유.
*아아, 무력감. 이럴 때는 이것저것 때려치우고 그저 공부나 하고 싶음. 이상은 까르마조프와 죽음의 한 연군데, 현실은 시궁창이니. 후새드.ㅠㅠ 에이, 그래도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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