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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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은 자기 전에 이런 일기를 썼다.
-완벽한 독자를 상상한다. 그에게는 어떤 텍스트도 필요하지 않다. 완벽한 그의 독해는 일그러진 무질서, 무의미한 난삽. 심지어 부재 가운데서도 의미를 읽어낼 것이다. 그가 읽어낸 무의미 속의 의미는 텍스트의 처음과 끝을 무한히 확장하면서, 마침내 하나로 통합할 것이고, 그 거대한 해석과 이해의 건축물은 텍스트 그 자체보다 거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작가가 필요하지 않다. 그의 독해 아래 무의미하거나 시시한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가장 하찮은 것도 가장 위대한 것으로 바꾸는 해석을 할 수 있다. 그의 해석은 가장 하찮은 것도 우주 전체와 연결해 그 의미를 읽어낸다. 모든 소설가의 독창적인 작품이 실은 모자이크 된 세계의 파편에 불과하듯, 그의 해석은 차라리 창조에 가깝다.
완벽한 독자. 그래서 그것은 완벽한 작가의 등치어가 된다. 하나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그래서 완벽한 독자와 작가는 마침내 창작 까지도 폐기한다. 텍스트에 제한되지 않기에 ‘이런 해석은 불가능하다.’고 외치지 않는 그의 무한한 해석은 결국 텍스트의 존재의의를 부정한다. 모든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기표는 무의미한 기표일 뿐이니까.
그래서 완벽한 독자의 해석이라는 행위는 신적인 행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완벽한 독자(작가)가 해석(창작)을 폐기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푸른 이빨은 책상에 앉아 그 페이지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앞으로 페이지를 돌린다. 평범한 일기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표피에 머무른 순진함 같은 것으로 마음을 따스하게 만드는 내밀한 기록들이다. 그것들은 어느 한 순간을 기점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더니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세연은- 푸른 이빨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를 간다.
“크-”
이런 개 같은 글을 쓸, 혹은 써야 할 정도로 그 정신병자 좆병신 새끼에 대한 이 소녀의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이 그를 견디지 못할 울화로 치밀어 넣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이 소녀가 아까웠다. 그런 개병신 쪼다는 ‘찌질찌질개찌질’거리다 혼자 뒈지게 놔두는 것이 모든 면에서 상책이다. 그게 인류평화와 세계 복지를 위해 최선이다. 아마 멀지 않은 미래에 그렇게 되리라. 그 쪼다는 사회, 아니 세계와 불화한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병신의 갈 길이란 그런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 계집은-!”
꽉 주먹을 쥐고 허공으로 치켜 올린다. 스탠드의 새하얀 불빛 가운데서 곱게 쥐어진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차마 내려치친 못한다. 지금 내려지면 책상이 박살나는 정도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이 집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건 잘 안다. 책상이 박살나면서 이 집에 짧은 시간을 통해 전달될 에너지의 총량만으로도 그 정도 사태는 간단히 일어난다. 한마디 고함을 거대한 섬전으로 바꿔 세계를 향해 ‘아니다!’는 부정의 주장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하아- 후.”
푸른 이빨은 심호흡을 한다. 그를 한결 못 견디게 하는 것은, 이 소녀가 간절히 열망하는 대상이, 그러니까 그 병신 새끼가, 실은 이 소녀를 전혀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감히, 감히 말이다. 세연의 팔목에 채워진, 은결이 만들어준 팔찌는 무심하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다. 찾아든 계절이 스며들어 세계를 왜소한 황갈색이거나, 과잉된 다채색으로 바꾸어 가고, 하늘은 높고 맑아 차라리 혀 안의 돌기를 확인하게 하도록 메마른 풍경. 아직 이렇다 할 도로도 시설도 들어서지 않아, 마치 홀로 버려진 듯 한 그 마른 세계에서 옹기종기 형성된 마을의 한 집에서 소녀가 걸어 나온다.
그녀는 머지않은 곳에서 깨끗한 정장을 입고 신문을 읽고 있던 중년의 남자에게 다가 간다. 그는 막 신문의 마지막 페이지에 기재된 사설을 다 읽고, 다시 처음의 헤드라인으로 돌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소녀의 접근에 보고 있던 신문을 접고 고개를 돌린다.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위해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후후. 역시 기표, 아니 기호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군.”
남자는 웃었다. 그윽한 만족이 경외와 함께 한다. 남자의 말에 소녀는 갸웃거리는 표정을 보였다. 남자는 들고 있던 접은 신문을 순식간에 재로 바꾸어 가을바람의 결 사이로 흘려보내면서 말했다.
“곧 알게 될 것이다.”
말하는 남자의 표정은 자애롭다. 약간은, 슬프거나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진실한 사랑에 충만한 표정으로 소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소녀는 그 대답에 만족하고 고개를 기품 있게 끄덕인다.
“시험공부는 잘 되가?”
언제나처럼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길에 은결이 미래에게 물었다. 미래든 덤덤한 표정으로 오라비의 물음에 답했다.
“뭐, 언제나 그렇지. 일부러 가방을 무겁게 하는 수고를 택한 보람이 있어서 이번에는 교과서와 공책이 안전하거든.”
“헤, 그럼 이번에도 전교 1등?”
찔러보듯 은결은 묻는다. 후훗! 하고 웃으며 미래는 살짝 자부심이 깃든 어조로 괜히 겸양을 떤다.
“그건 모르지. 근데 일등 하면 뭐 해 줄꺼야?”
“일등 하면 좋은 건 너지 내가 아닌데 뭐 해줄 거냐고 물어봐야.”
은결은 담백하게 말한다. 미래는 삐진다. 삐지고서는 등 뒤에서 쳇쳇툴툴거린다. 은결은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는 오빠는?”
“나도 평소 같지.”
“흐응-”
미래는 콧소리를 낸다. 의혹과 불만 같은 것이 담겨 있다. 그녀는 오빠와 오랜 시간 함께 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똑똑한지 알고 있다. 물론 똑똑하다는 것도 여러 의미가 있고, 그 가운데 어떤 것들, 사람을 대하는 방식 같은 것에 대해 자기 오빠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책에 관한 이해력에서 그녀는 오빠를 넘어서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너무 괴수라서 그냥 논외)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사항이긴 해도 의혹이 가슴 어딘가에 계속 쌓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 다 왔다.”
곧 은결은 그렇게 말하며 자전거의 속도를 줄인다. 학교의 교문이 머지않았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무산하게 등교하고 있었다. 교문 근처에 이르러 두 사람은 자전거를 세워 내렸고, 느긋하게 걸었다.
“(안녕.)”
갑자기 등 뒤에서 약간 망설이는 듯한 분위기의 일어가 들려온다. 미래와 은결은 뒤를 바라본다. 늘씬한 미소녀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서 있다. 쿠로사카였다. 미래는 도끼눈을 뜬다. 은결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아, 좋은 아침.)”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결 옆에 선다. 세 사람은 함께 걸었다. 걸으면서 두 사람은 미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일어로 종종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모습에서 미래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과거에도 이렇게 교문 즈음에서 만나 함께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그때와 분위기가 어딘가 다르다. 어디라고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무언가, 뭐라고 할까- 어쨌거나 ‘수상함’ 같은 것이 읽혔다. 특히 쿠로사카라는 사악한(주관평가) 여자에게서 느껴지던 예리함 같은 것이 무뎌진 분위기가 다른 의미로 예리하게 미래의 마음을 쿡쿡 찌른다. 미래는 초조함에 엄지손가락을 문다.
은결과 미래는 학교에 갔다. 이제 집 안에서 홀로 된 수행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있다. 그는 깊은 숨 가운데서 생각을 한다. 생각과 생각의 이어짐은 무한하다. 사고 가운데 관념의 연결이 이루어 완성하는 거대한 건축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열락은 여럿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패턴이 이어져 완성되는 구조에 대한 인식 이상 가는 쾌락은 거의 없다.
그는 언제나 그런 세계에서 살았다. 그의 눈 아래서 그래서 세계는 언제나 아름다웠다. 모든 무질서는 질서였고, 모든 질서는 다시 무질서로 해체되어 다른 질서로 편입될 수 있었다. 무미건조한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한 가지 현상에서 백만 가지의 다양함을 읽는다. 천만 가지의 다양함에서 한 가지의 질서를 읽는다. 그는 한 가지 관념을 어떤 방식으로도 재조정 할 수 있다. 확장, 축소, 단순화, 다양화, 이미지, 음률, 논리, 번뜩임, 동작-
생각들 가운데서 그는 시지포스를 떠올린다. 영원을 향한 반복을 선고받은 자. 영원과 반복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길가메시가 들어선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물음은 언제나 ‘자살’이다. 수행은 시지포스가 운반하는 그 거대한 바위의 이름을 생각한다. 그 바위에 이름을 붙인다면, 역시 ‘타자’가 어울리는 것 같다.
*추천해 주신 니나노 님과 사문님께 감사~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연재된지 꽤 시간이 되어서 지명도가 있는 편이라 추천 등등에 조회수가 낮은 편인데, 나중에 관련글 쓰실 분들은 제목에 낚시 스킬을 좀 발휘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좋은 장문의 글 써주신 분들 조회수 낮고 이런거 보면 마음이 좀 짠함. 결코 이 글의 선작이나 조회수를 하나라도 더 올려보고자 하는 발악이 아님!! 암. 그렇고 말고요.
*지난 화 성경은 쉬운 우리말 성경을 긁어 인용했습니다. 기존 성경 번역은 ‘가라사대’ ‘가로되’라고 나오는 게 싫어서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리세의 해석은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실한 신자분들은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어려우리라 여깁니다. 말하자면 이단의 해석이죠. 가령 영지주의의 관념에서 뱀은 사악한 사탄이 아니라 진정한 메시아입니다. 그가 지식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를 쓴 이후로 때때로 저를 여자라고 의심 없이 믿는 독자 분들이 때때로 있었습니다. 사실 그런 오해 받으면 좀 기쁘죠.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글에서 여성성 같은 것이 느껴졌다는 거니까. 그래서 나중에 아이디를 하나 더 마련해 여자인척 하고 로맨스 소설 같은 걸 써보는 것도 재밌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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