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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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 멀지 않은 오전 시간에 수행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상대는 대학시절 은사였다. 정영철 교수. 그는 반갑게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다. 한동안 이야기 하던 가운데 이야기의 화제가 그가 쓰고 있는 사설로 옮겨가게 되었다. 교수는 이야기의 맥을 따져가며 그 글을 비판했다.
“...글에 대해 지적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기우에서 비롯된 비약이십니다. 저는 지나친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이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실제로 중국와 러시아를 여행해 봤고, 그 과정에서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가 어떤 비효율을 낳을 수 있는지 실제로 체험했습니다. 끔찍한 관료체계였지요. 그렇게 되리란건 알고 있었지만 역시 쓰더군요. 타자에 의존해 자신을 세우는 인간이기에, 시장의 역동성은 역시 중요합니다.”
수행은 쓰게 웃으며 말한다. 그가 체험한 과거 공산 국가의 관료체제는 정말 끔찍하다는 말 외에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비효율적이었다. 특별한 것도 아닌, 시시한 기차표 한 장을 얻기 위해 하루를 꼴딱 새워야 했던 것은 그곳의 일상에 불과했다.
“...때문에 자유시장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이 시스템이 질곡이 될 정도로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세간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처럼 절대적인 자유주의는 파국적입니다. 저는 그저 그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령 6.25 이후 한국이 그네들의 말처럼 자유경쟁을 했다면, 지금 한국의 일인당 소득은 천 달러나 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사실 천 달러만 되었어도 그들은 한국을 기적의 나라라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한국의 일인당 소득은 백 달러가 되지 못했으니까요. 지금은 2만 달러의 소득을 넘긴 나라 한국이 말입니다.
이야기 해 보니 새삼 기적 같군요. 6.25 직후의 한국은 지금 한국에서 아프리카의 어느 빈국을 바라보는 시각보다 훨씬 못하게 서구 대부분의 나라에게 비춰졌는데.”
수행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지금의 한국인에게, 특히 80년대 이후 출생한 한국인에게 지금의 한국은 아주 당연하고 시시한 모습을 가진 국가로 비춰진다. 그러나 세계사적 맥락으로 바라볼 때 한국은 정말 예외적인 국가다.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을 해냈다.
“...저는 자유가 시장을 성장시키고 성숙시켜 모두를 행복하게 했다는 저열한 자유주의 경제 사관을 경멸합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데다 제시되는 자료 자체도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가령 슘페터가 주장한 창조적 파괴, 기업가 정신은 자유 그 자체로만은 나올 수 없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예외적이지요.
현재 한국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제작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한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처음 한국의 기업이 반도체에 도전하는 놀라운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을 때, 국가가 그것을 보호하고 보조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성과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와서는 신화처럼 이야기 되는 도요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요타 자동차의 성공은 일본 정부의 지원과 보호를 통해 가능했습니다. 처음 그들이 만들어 냈던 자동차는 미개한 아시안의 서구 제품에 대한 모방으로 만들어낸 성냥갑 자동차에 불과했습니다.”
아시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수행은 영국 모직물 산업의 발전경로를 알고 있다. 최초에 그들은 식민지인 인도의 것에 비해서도 상품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정책적으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인도의 것을 억압했다. 그 결과 영국 모직물 산업은 강성해 세계를 장악한다. 영국에서 자유는 그때부터 주장되었다. 시장에서 자유는 언제나 강자의 이념이었고, 강자만이 추구하는 이념이었다. 약자에게 자유경쟁이란 언제나 약자로 머물라는 선고와 다르지 않다.
“예. 얘기하신 대로입니다. 굳이 ‘주의’라는 틀을 통해 구분해 말하자면 저는 우리가 케인즈 주의의 경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지요.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패권국가의 소멸로 그것이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 시간과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투기 금융의 부분을 제외하면 신자유주의의 흐름은 그렇게 까지 거역할 수 없는 힘인 것은 아닙니다.
특히 훌륭한 기반시설과 우수한 노동자를 제공할 수 있는 국가는 다국적 기업에 대해 강력한 협상력을 가질 수 있게 되고, 다국적 기업이 그곳에 투자를 시작하면 공장과 같은 쉽게 처리할 수 없는 시설을 들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빠져나가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이 자유주의 흐름을 계속 추종한다면 그러한 협상력은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벌써 한국인의 일 년 노동 시간은 2300시간을 넘기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확대로 이 노동시간의 확대를 역전시키기 어려운 형편이고... 1900시간 정도가 적정선인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산력이 높은 것도 아니고.
이런 노동 시간이 유지된다면 한국의 노동자는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고급 노동력의 소유자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이래서는 저질 노동력을 싸게 공급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방법이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로우 로드 전략입니다. 그건 파국적입니다. 하물며 로우로드는 자살이 목적이 아니라면 소득이 2만 달러가 넘는 국가의 전략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중국 옆에서.”
수행은 게임 이론을 생각하며 그렇게 말한다. 지금의 흐름을 돌리기 위한 기회는 있었다.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도 기회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 뚜벅뚜벅 걸어, 헉헉대며 달려서 도달하는 곳은 출발점.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잠시 자신의 휴대폰을 바라본다. 그 많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교수는 만족한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별로 변한 게 없구나.” 수행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다면 제가 연대를 위해 제시한 이름은 아탁이 아니라 최소한 자파티스타(Zapatista)였겠지요. 그들 역시 반세계화를 주장할 뿐 시장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전처럼 분노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의 분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로운 분노는 존재하며,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차갑게 세계를 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엄살을 좀 추가하자면 이제 나이도 있고 말입니다.”
교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웃으며 이야기를 몇 마디 더 꺼냈다. 그리고 이어서 조심스럽게 수행에게 제안했다. 그 차갑게 세상을 보는 시각을 좀 더 구체화 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다시 말해 다시 공부를 시작해 보지 않겠냐는 말이다. 그 말을 통해 수행은 처음에 왜 글에 대해 비약에 가까운 지적을 교수가 했던 것인지 눈치 챈다.
그는 지금 수행의 사설이 많은 것을 생략한 안타까운 글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오해가 발생하기도 쉽고. 때문에 그 글을 학적으로 정교화 해 보라는 권고다. 가능하면 박사까지 공부를 이어가면서. 교수는 수행의 천재성을 아깝게 여긴다. 그가 꾸준히 공부를 했더라면 무엇을 했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학자 중 한 명이 한국에서 탄생했으리라 여긴다. 그에게는 그만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수행은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거절의 이유는 간단했다.
“달리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교수는 아쉽게 여겼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수행의 재능을 인정하는 만큼 그의 선택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기 전에 “혜영이 일은 안 됐구나.” 라고 말한다. 수행은 “아닙니다.”라고 답한다. 전화를 끊고 수행은 어딘가 아스라한 안색으로 중얼거린다. “혜영이라.” 그런 이름도 있었다. 씨앗의 이름 같은 것이다.
옥상에서, 대련을 끝낸 쿠로사카는 심호흡을 한다. 어제는 망설였지만, 오늘은 역시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고 싶었다.
“(전에 네게 말하려다 말았는데, 역시 말해야 하겠어. 요즘 여우가 너를 좋지 않게 보고 있는 것 같아.)”
“(여우가?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은결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린다.
“(요즘 네 말에 이것저것 반대의사를 자주 표하잖아.)”
“(그게 어때서? 납득하지 못하는 이야기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도리어 여우가 더욱 나를 가깝게 느끼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게 대놓고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거리감이 적을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니까.)”
쿠로사카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은결의 이야기는 충분히 그럴듯했다. 하지만 쿠로사카는 도무지 그 그럴듯함을 납득할 수 없었다. 여우가 은결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방식, 그리고 이야기에 반대하는 방식이, 은결의 논리를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논리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녀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기엔 말하는 방식이,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았어.)”
“(음, 모르겠는데.)”
쿠로사카의 이야기를 은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간단히 내친다. 쿠로사카는 속으로 ‘이 왕따가!’라고 욕을 한다. 십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다른 사람과 거의 교류가 없다더니 눈치라는 게 없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은결은 그런 쿠로사카를 보고 말한다.
“(여우가 내게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여우는 내 덕분에 학원에서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했고, 여자 친구도 만들 수 있었는걸. 더구나 나는 여우 보다 성적도 좋지 않아. 나는 여우를 도와줬고, 그를 앞서고 있는 부분도 없어. 이런데 여우가 나를 나쁘게 볼 무슨 이유가 있어? 여우는 도리어 내게 고마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쿠로사카는 따지고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고 여긴다. 은결이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나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예의가 바르다. 그는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존중하고, 다른 이의 행동을 앞세운다. 도움을 주었다고 내세우지 않고, 안다고 뻐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따지면 은결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네가 그 동안 다른 이들에게 왕따 취급을 당한 건 네가 나빴기 때문이 아니잖아. 네 옮음과 그름에 상관없이 싫어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
은결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은 옳아. 하지만 이걸 간과하면 안 돼. 나를 싫어했던 과거의 그들은 모두 나와 많은 거리를 가진, 그저 공간적으로 가까운 우연한 타인에 불과했지. 그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기에 그들의 시선으로 그저 나를 보았고, 그들의 시선으로 나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단정 지은 위에서 행동했을 뿐이야. 하지만 여우를 비롯해서 지금은 다 친하게 지내고 있는걸. 친하다는 것은, 허물없음이 동시에 ‘배려’라는 행위와 함께 거기 들어가 있다는 말이기도 해. 배려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는 의미이기도 하잖아. 그런 관계에서 내가 잘못한 것이 없고 도움을 주었는데 상대가 나를 적대시 한다는 것은 비약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다시 쿠로사카는 말문이 막힌다. 그녀는 답답함을 느낀다. 은결의 이야기는 정론이지만, 정론으로 세상은 구성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한다. 은결은 그것을 모르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을텐데. 그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세상이 정론으로 구성되지 않는 모순의 집결체라는 것을 알 텐데.
“(사람들이 다 너 같다고 생각하면 안 돼. 보통은-)”
“(그만두자. 이런 이야기 해 봐야 결론도 나지 않을 거고 결국에는 서로 기분만 상할 거야. 그렇게 걱정된다면 나중에 기회를 봐서 여우에게 내가 직접 물어보도록 할게.)”
은결은 쿠로사카의 말을 자르고 들어간다. 강한 어조였다. 쿠로사카는 조금 놀랐다. 은결이 다른 사람의 말을 자르고 들어와서 자신의 주장을 한다니. 어지간히 지금 자신이 꺼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쿠로사카는 짙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메말라가는 혀 끝에 말이 맴돌다가 결국 스러진다. 결락에 대한 감각 가운데, 계속 이야기를 꺼내 은결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안타까움을 겨우 누르고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마음에 대한 은결의 해석을 다시 기억한다. ‘시선에 대한 걸작.’ 동시에 멀지 않은 과거의 한 기억을 떠올린다. 은결은 울면서 이야기했다. “텍스트는 텍스트이고, 세계는 세계인 것 같아.” 화선지에 뿌려진 먹물 처럼 슬픔이 마음에 번진다. 그 슬픔은 자신과 동시에 그를 향한다.
*하늘연날 님의 감상에 감사. 전에도 봤지만 역시 좋은 감상입니다. 음.
*지난 화 이야기는 가볍게 읽혀서 유감이신 분들을 위한 독법입니다. 가볍게 읽는데서 만족하시는 분들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가볍게 읽혀서 아쉬운 분들이라면 충분히 무겁게 읽을 수 있으니 거기서 멈추지 말라고 권하는 것이지요.
*플롯과 주제를 명확히 하면 장면의 낭비는 피할 수 있지만, 그래도 돌이켜 볼 때 언제나 연출에 대한 아쉬움은 어쩌기 힘이 듭니다. 연출은 논리라기보다 감각의 문제인지라. 글을 완결하면 이 문제에 집중해서 수정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환상성을 다루는 글은 플롯을 다 짜놓고 쓰는 정통적인 작법이 반드시 장점으로 작동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환상성의 개방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의식의 표출인데, 플롯이 짜여진 글은 이 부분의 해방이 미약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가와이 하야오와의 대담에서 이것을 ‘글이 자신을 앞서 있는 감각’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나중에는 그런 글이 써 보고 싶기도 합니다. 의식적으로 지배했다고 생각한 글에서도 생각지 못한 면모를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만.
*그럼 여러분의 성원을 기대하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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