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18화 (218/300)

#   219-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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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의 불빛이 밝다. 그 빛 아래서 민성은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가 보고 있는 책 뒤에는 몇 권의 공책과 책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는 시험을 앞두고 시험공부는 하지 않고, 소설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있다면 읽고 있는 소설이 고전급의 걸작 소설이라는 것이지만, 그런 책을 읽고 있는 이유 자체가 건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상참작을 해줄 이유는 그다지 없는 셈이다.

“아함.”

민성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안 하던 짓을 하니 눈이 한층 피곤한 것 같았다. 그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음료수라도 꺼내 마실 생각이었다. 읽고 있던 책 ‘마음’은 주인공이 막 선생님에게서 고백의 편지를 받는 부분까지 읽었다. 이제 선생님이 과거 친구와 함께 지금의 아내를 두고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결국 선생님이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된다는 내용이 이어질 차례다.

이번이 두 번째 읽는 것이다. 처음 읽을 때 보다는 확실히 글이 맑고 깨끗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잘 모를 것 같았다. 그저 뒤에 해설에 적혀 있는 대로 다른 이의 악한 마음에 좌절을 겪은 주인공이 도리어 자신도 같은 짓을 해 다른 사람을 상처입힘으로서 악의 문제가 모든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보편의 문제임을 지적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쿠로사카나 은결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몇 걸음 더 깊은 곳으로 걸어나가 있었다는 인상이다. 똑똑한 애 한테는 뻐꾸기 날리기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이것 참, 볼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장관이군.”

냉장고 앞에 도착하니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민성은 한숨을 쉬었다. 부엌이 엉망이었던 탓이다. 설거지를 하지 않고 그저 싱크대 안쪽에 던져 넣은 식기들이 처참한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한 며칠 이대로 둔 모양새다.

“뭐 그리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을 한다고...”

민성은 끌끌하고 혀를 찬다. 민성네는 부모님 두 분이 맞벌이를 한다. 따라서 집안일도 공동분담을 한다. 그런데 주말에 아버지가 회식이 있다고 그만 설거지를 빼먹었다. 어머니는 화를 냈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그 정도는 봐줘도 좋지 않으냐며 화를 내다가 자존심 싸움으로 번졌다. 두 사람 모두 설거지를 안 하고 누가 이기냐며 버티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민성이 자진해서 나섰지만 두 사람 모두 설거지 하면 용돈을 깎을 거라고 협박하는 통에 그럴 수도 없게 됐다.

“쯧쯧, 두 분 모두 내일 모레가 쉰이면서 하는 짓은 꼭 애 같다니까.”

민성은 고개를 흔들며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음료수를 꺼내 컵에 따른 다음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 빈 컵을 물로 간단히 헹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애들 싸움에 대비할지, 아니면 싱크대 안쪽으로 그냥 던져 놓을지 고민하다가 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아무리 시작이 사소해도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면 그 끝이 심하게 창대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세연은 펜을 놀린다.

-사랑의 목적은 완전한 합일일까? 오늘 친구들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가령 세상의 많은 부모님들은 자식의 행위에 대해 잔소리를 한다. 그 잔소리를 통해 자식의 행위를 고치려 한다. 그들의 행위가 틀렸음을 지적함으로서 옳은 방향으로 끌어 오고자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틀린 길로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권력으로 자식의 방향을 그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고치고자 한다. 그래서 잔소리에는 의혹과 다양성이 없다. 다른 것은 없고, 틀린 것만 있다.

때문에 부모님의 잔소리는 자식을 자신으로 바꾼다는 양태를 지닌다. 잔소리라는 기표로 실현된 나의 기의(외화)를 자식이 받아들여 자신의 행위로 실천하기. 그것은 나라는 개인이 자식이라는 타자에 가 닿아 실현되는 양식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랑의 목적이 합일이라는 것에 대한 좋은 실례가 된다. 그를 나로 만들기. 뻔히 옳은 것을 알고 있고, 상대를 사랑한다면, 그 상대가 그 뻔히 옳은 것에 벗어나는 행위를 할 때 그것을 두고 볼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무엇일까. 은결을 생각한다. 그를 생각하면 생각이 허물어진다. 그의 행위를 읽을 수가 없다. 그의 한 가지 행위가 만 가지 의미로 분화되고, 그의 한 마디 말이 만 가지 의미로 분화된다. 정리할 수 없는 의미의 대양 가운데서 부표는 보이지 않는다. 합일은커녕, 분화만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하나 됨은 이해가 기반이 될 때만 가능할텐데, 나는 도저히 그런 이해에 가 닿을 자신이 없다. 마음이 답답하다.

세연은 펜을 뗀다. 그녀는 일기장을 덮고 책상 서랍에 넣어둔다.

“하아.”

어두운 밤에 어울리는 슬픈 한숨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이라는데, 밤마다 달은 물 위를 지나가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데, 자신의 마음은 이토록 혼탁한지 모를 노릇이다. 한편, 푸른 이빨은 세연의 속에서 환장하겠네, 하며 씨발씨발 거리고 있었다. 그는 지난주 은결을 더 패 주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참혹한 꼴을 얼마나 더 봐야 할지 한숨만 나왔다.

“아, 아버지 오셨습니까.”

할아버지가 집안에 들어서자 수행이 맞았다.

“은결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사념체가 있던 모양입니다.”

“쯧, 어린아이들에게만 맡겨두고,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특별히 도천시를 수호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 쿠로사카양에게는 특히 말이다. 하물며 그노시스트가 언제 움직일지도 모르는 일이거늘.”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은결의 힘을 정리하지 않는 한 그들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아담의 언어가 실패했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의 목표는 시시한 개인이나 세력이 아닙니다. 그들은 언제나 세계 전체를 노리지요. 때문에 은결을 피해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한 동안은 안심하셔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수행은 설명한다. 그 때문에 이미 도천시 주변에는 광대한 연락망이 완성되어 있다. 은결에게 만의 하나의 사태가 발생하면 일분 이내에 수십 이상의 술자들이 모여 줄 것이다. 아담의 언어와 같은 압도적인 힘이 아닌 이상 그런 방어벽을 돌파해 은결을 어쩌긴 힘들지만 그런 압도적인 힘은 은결이 지닌 술식과 반발한다. 아무리 그노시스트라도 물리적으로 은결을 어쩌긴 힘들다.

“그렇겠구나.”

“그보다, 그 쿠로사카라는 아이에 관해서인데, 오늘 미래가 그 아이에 대해서 꽤 불평을 하더군요. 아마 학교에서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수행은 화제를 바꾼다.

“그 녀석도 참.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냐?”

할아버지는 미래가 투덜거렸을 모습을 생각하며 가볍게 헛웃음을 터뜨린다. 여전히 귀엽긴 하지만 이제 슬슬 나이도 있는데, 오빠에게서 떨어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하기야 미래가 거의 핏덩이었던 시절부터 쭉 은결이 그녀를 돌보아 왔다. 나이는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은결은 천재였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쉽게 떨어지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으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혹시라도 두 사람이 지나치게 친해지거나 하기라도 하면 좀-”

다소의 곤혹을 섞어 수행은 말한다. 할아버지는 무척 흐뭇했지만 그 기색을 지우고 근엄하게 말한다.

“...나는 그것도 좋다고 여긴다만. 세연이란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아이는 결국 외지인이지. 은결을 이해하기 어려울 게다. 그럴 바에는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좋다고 생각되는구나. 은결 그 아이는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특히 민감하니까 말이야.”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지는 이해하겠습니다. 확실히 은결이는 타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담백하지요.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쿠로사카 같은 아이가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역시 저는...”

수행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는 세연이 마음에 들었다. 몇 번이고 보았지만 무척이나 참한 아가씨이지 않은가. 할아버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끌, 하고 핀잔 같은 소리를 낸다.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구나. 혹시 진경 녀석 얼굴 볼 낮이 없기 때문이냐?”

“설마요.”

“그럼 좋지 않으냐.”

할아버지가 말했다. 수행은 의혹이 서린 눈초리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찌르듯이 말한다.

“으음, 아버지는 이상하게 그 아이에게 호의적이시군요. 솔직히 저는 아직 앙금이 완전히 풀렸다고 말하기 힘든 입장입니다만.”

“...마음에 들긴 하더구나. 시작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만.”

할아버지가 솔직하게 답한다. 수행은 한숨을 쉰다. 그는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아버지가 한 가지 간과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뭐가 말이냐?”

“물론 그런 일은 거의 없겠습니다만,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 두 사람이 연을 맺게 된다면 은결의 성은 ‘박’이 아니라 ‘쿠로사카’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아이의 신분이 어떤 것인지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음.”

수행의 이야기는 강력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아버지도 더 무어라 말을 추가하기 힘들었다. 키리야미의 후계자는 외지로 갈 수 없다. 고로 결혼을 한다면 데릴사위가 되어야 한다. 그건 장자를 뺏겨야 한다는 말인데, 할아버지도 대를 잇는다는 관념을 그렇게 중요시 하진 않지만 당장 자기 대에 집안이 끊어진다고 하면 그건 역시 좀 생각해 보게 된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시원하게 들이키는 은결네 연장자 두 사람의 푼수 짓은 그렇게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건일님의 추천에 감사. 열심히 쓰겠음!

*불교 철학의 해석에 관한 태클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글을 손볼 때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불교경전은 해석이 무척 넓게 열려있기 때문에 비판에 대해 쉽게 이러니저러니 말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일본 선불교는 공사상을 발전시켜 일본 제국주의 전쟁을 찬양하는데 까지 나갔는데, 그것은 논리의 문제라기보다 불교철학이 지니는 자유로움이 악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철학은 다시 용수 보살의 선언인 ‘만물에는 자성이 없다.’는 데로 돌아가게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글 전체를 지배하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동양은 조화의 역사 운운하는 것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일 뿐입니다. 저는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제게 역사관이 있다면, 역사는 고통 받는 타자의 입장에서 쓰여질 때 진실로 의미 있는 역사가 서술될 수 있다는 믿음 정도일 뿐입니다.

*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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