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17화 (217/300)

#   218-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5)

#

쿠로사카와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하교길에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은결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와의 만남은 결코 좋은 시작이 아니었다. 그녀는 은결의 목숨을 노렸고, 자위를 위해 은결은 그녀의 목숨을 반대로 노리고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 고비를 지나고 나서 두 사람은 함께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은결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했기에 도리어 자신을 구했고, 그녀의 도움으로 해체에서 벗어나면서 지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타자를 향한 자신의 폭력을 알았으며, 그녀와 함께 하면서, 아마도 친구들을 ‘친구’라 말할 수 있는 용기 같은 것을 얻었다. 지난 십년간 알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지난 십년간 거부하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난 십년간, 사실은 바라던 것들이었다. 오늘 옥상에서 쿠로사카와 대화 하면서 은결은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했다.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은결은 그녀와 가능하면 앞으로 몇 십 년이고 함께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거대하고 막막한 것에 대한 감각이 가슴 저변에서 지금 이 순간을 노리고 꿈틀거리고 있지만, 지금처럼 여러 사람과 터놓은 대화를 하고 함께 웃을 수 있다면 어쩌면 견딜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종류의 불안이 어둡게 마음 다른 구석에 가라앉는 것을 느끼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오빠.”

“응?”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은결은 퍼뜩 정신을 차린다. 미래는 초조한 심경을 감추고 발랄하게 묻는다.

“교문 나오면서부터 얼굴이 기뻐 보이던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특별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뭐- 비교적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긴 했지.”

“헤에- 여자 친구라도 생긴 것 같은 표정인데?”

미래는 슬쩍 찔러본다. 은결의 따스하게 출렁이던 마음이 한 순간에 얼어붙는다. 뭐야! 어느 놈이 결국 찔렀단 말인가! 그 사이를 못 참고! 이런 못 믿을 놈들! 불안이 겁화처럼 치솟는다. 하지만 은결은 한 점의 긴장도 흘리지 않는 태연함으로 평정을 가장하고 말을 돌린다.

“후, 그럼 좋겠지만 미래만 보다 보니 눈이 높아져서 그리 쉽게는 안 생길 것 같은데.”

아부를 섞은 핑계다. 미래 본인은 보통 아부에 시큰둥하지만,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른 법이기 마련이다. 오빠의 칭찬에 까지 시큰둥하지는 못한다. 당장에 미래는 헤실헤실 웃으며 기뻐했다.

"후, 후훗."

하지만 그녀는 기분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에 따라 일을 설렁설렁 처리하는 타입인 것도 아니다. 미래는 다시 화제를 돌린다.

"으흠. 뭐 그거야 당연한 거고. 오늘 우리 반에 친구가 오빠가 그 일본 언니랑 같이 옥상에서 내려오는 걸 봤다더란 말야. 분위기도 되게 오붓했다면서?”

그녀의 가시 서린 물음에 은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흘린다. 아직 비밀이 새어나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세연이 나올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쿠로사카라니. 그나저나 쿠로사카라.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한 조합이다. 덕분에 긴장이 풀리자 은결의 입가로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쿡쿡, 말도 안 돼. 전에 얘기해 줬잖아.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은 보통 사람이 양자터널 효과를 체험할 가능성과 비슷할 거라고.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은데, 그건 그냥 ‘있을 수 없다.’는 말이야.”

은결의 과장 없이 자연스러운 태도에 미래는 안심한다. 하지만 마지막 불씨를 꺼뜨리는 소방관의 심정으로 그녀는 조심스럽고 성실한 태도로 더 확인해 본다.

“그럼 옥상에는 같이 왜 올라간 거야?”

“쿠로사카가 검도를 하거든. 간단하게 상대를 해 주고 있는 거야. 내가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상대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지. 뭐 나도 밥 먹고 간단히 운동한다는 생각으로 상대해 주는 거고.”

“그럼 요새 밤에 휴대폰을 꽤 오래 쓰는 것 같던데 그건 어디에다 그렇게 사용하는 거야? 이제까지 쭉 그런 적 없었잖아.”

“아, 그건 최근에 친구 소개로 사귀게 된 새 친구가 있거든, 그 애가 말주변이 좋고 아는 게 많아서 같이 이야기 하면 즐겁단 말야. 뭐 나중에 기회 되면 미래 너도 소개해 줄게. 아마 너도 좋아할 거야.”

은결은 거침없이 미래의 심문을 격파해 나간다. 애초에 심문의 시작점 자체를 잘못 잡은 미래로서는 은결의 혐의를 입증해 낼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오라비의 태연한 태도와 거침없는 답변에 안심한다.

‘음, 하지만 그 여자가 오빠를 노리고 있지 않은지는 모르는 거니까 조심해야지!’

미래는 결의했다.

미래가 갑자기 쿠로사카에 대한 불평을 조심스레 식탁 위로 꺼내면서 은결에게 ‘얘가 왜 이러나?’하는 의혹을 사고 있던 중이었다. 휴대폰의 벨소리가 은결네 저녁 식사 시간을 파고들었다. 정확히는 벨소리가 아니었다. 휴대폰에게서는 이매진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은결은 아버지 외에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그의 예상을 확인해 주듯이, 막 수저를 들던 수행은 그것을 내려놓고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펼쳐 들었다. 중후한 검은 색의 얇은 휴대폰이었다. 은결도, 미래도 처음 보는 디자인의 휴대폰이다.

“아, 자넨가.”

반가운 목소리로 그는 전화를 받았고, 한동안 대화를 하고는 끊었다. 미래가 달칵, 하고 휴대폰 닫히는 소리에 맞춰 부리나케 물었다.

“아빠 휴대폰 새로 샀어요?”

“아, 그래. 전에 쓰던 게 이번에 고장이 났는데, 진경 녀석이 선물이랍시고 바꿔주더구나.”

“헤- 비싸 보이는데. 아빠 좋겠다.”

“좋긴. 확실히 고급 기종이라고는 하는 것 같았다만...”

수행은 약간 쓰게 웃었다. 미래는 이해하기 힘든 듯 반쯤 투정하는 듯한 태도로 반문했다.

“공짜로 좋은 휴대폰 생겼는데 좋지 뭐가 안 좋아요?”

은결은 미래의 물음 뒤에 생략된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바꿔줘요.’ 누가 내기 하자고 하면 만 원 까지 걸 수 있었다. 수행은 피식 웃었다.

“이게 코뚜레니까 그렇지. 지금도 식사 중인데 이렇게 연락이 와서 글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잖니? 나야 그나마 집에서 별로 나갈 일도 없는 사람이다만,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은 얼마나 여기 매여서 바쁘겠니? 나 같은 사람도 이 사람 저 사람 다 쓰니 이제 와서는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게 된 노릇이고. 마음 같아선 이런 건 가지고 싶지 않은데 말야. 뭐 그렇다고 이걸 마련해준 진경이 녀석에게 고맙지 않다는 건 아니고, 이런 게 없으면 안 된다는 게 조금 씁쓸하지.”

“흐응. 뭐 멀리 떨어진 사람들 하고 쉽게 이야기 해 주게 해주는 건데 굳이 그렇게 볼 것 까지야 있을까요. 지금에 와서는 휴대폰 없이 생활하는 걸 더 상상하지 못하겠던데요. 무진장 불편할 테고.”

미래가 상식적인 의견으로 아버지의 이야기에 반대해 본다. 수행이 입을 열기 전에 은결이 친절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네가 말한 건 확실히 장점이지만, 그 장점이 곧장 사용자를 구속하게 되는 게 문제야. 휴대폰 같은 물건의 대중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빼앗아 가거든. 싫든 좋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냥 사용해야 하는 거지. 그게 문제인거야.”

“어째서?”

미래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가 말한 휴대폰의 장점, 그러니까 쉽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준다는 것은 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 그리고 신속하게 정보를 교환해 언제든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경쟁한다면 당연히 전자가 이기겠지? 이럴 때 후자에겐 아무런 선택권도 없는 거야. 패배하고 싶지 않다면 적어도 같은 수준의 효율을 확보할 수 있는 장비가 필수적이지. 그래서 편리한 휴대폰은 편리함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곧 패배하지 않기 위한 필수품이 되는 거야. 그리고 곧 사회는 당연히 모든 이들이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게 그 구조가 바뀌어 버릴 테고. 이렇게 되면 휴대폰은 그렇게 편리한 물건이랄 수 없지. 그건 그냥 무참한 경쟁을 위한 도구의 하나가 되어버릴 뿐이니까.”

“아아. 시험 쉽게 낸다고 해 봐야 다른 사람들 한데도 다 같이 쉽게 나오는 거니까 별 소용없는 것처럼, 휴대폰의 대중화도 결국 그런 것과 비슷한 차원의 편리함이란 거야?”

은결의 설명을 미래는 쉽게 이해한다.

“그래. 일견하기엔 대단한 발전으로 보이지만, 차분하게 더하기 빼기 해 보면 의외로 대차대조표에 나타나는 이득은 거의 없는 거지. 헥헥거려봐야 제자리걸음이라고 할까. 절대생산력은 늘지만 정말 중요한 경쟁력이나 행복의 차원에서는~”

은결은 말꼬리를 흐리며 어깨를 으쓱인다. 진보가 없다는 뜻이다. 미래는 납득한다. 수행은 은결의 설명에 만족하고 놓았던 수저를 다시 쥐었다. 그는 문득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은결 가족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미래도 중단 되었던 불평을 다시 툴툴 거리며 꺼냈다.

“...고로 역시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제 슬슬 담당을 바꿔도 될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한 사람 뿐인 것도 아니고, 오빠만 벌써 수개월간 혼자서 통역 비슷하게 보수도 없이 노가다를 했잖아요. 이건 역시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죠?”

“아니, 나는 괜찮은데.”

“오빠가 괜찮은 거 하곤 상관없어. 이건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거니까!”

미래는 열변을 토했다. 은결은 그런 미래의 태도가 털 세운 터키 고양이 같다고 느낀다. 수행은 사랑하는 딸의 불평을 자상하게 받았다.

“하하, 미래 의견도 그럴듯하지만, 사실 네 오빠만큼 일본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 찾기는 어려울걸. 그렇게 분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서로 돕고 살아야지. 네 오빠가 그렇게 싫어하는 걸로 보이지도 않고.”

“음, 그야 그렇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우리 집에 감사의 뜻으로 뭐 선물이라도 한 번 들고 찾아온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빠가 뭐 잘못한 게 있어서 이렇게 오래 무료 봉사를 해야 한담.”

은결은 속으로 동생에게 이런 의문을 떠올려본다.

‘찾아오면 반겨줄 거냐?’

*글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들 하시니 안심했습니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변화가 안 좋은 방향으로 갑자기 나타나면 역시 덜컹, 하는지라. -_-; 근데 작년에도 이랬나? 음, 모르겠군요.

*마음은 그렇게 어려운 글은 아니었습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