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16화 (216/300)

#   217-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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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마친 민성은 고뇌하는 표정으로 책을 뒤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신기하게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마침내 고릴라가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보시다시피 책 보고 있지.”

별걸 다 묻는다는 태도로 민성이 대답을 돌렸다. 약간 심각한 그의 얼굴은 평소의 분위기와는 역시 잘 어울리지 않는다. 고릴라는 불과 얼마 전에 ‘선성동맹’을 운운하던 민성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걸 묻는 게 아냐. 어째서 책을 보느냐는 거지.”

“아, 쿠로사카와 대화를 속삭이면서 느낀건데, 제대로 안 읽으면 같이 이야기하기가 버거울 것 같아서, 좀 진지하게 읽어둘까 하고.”

“그 ‘마음’인가 하는 소설이야?”

늑대가 대화에 참여하며 물었다.

“응. 쿠로사카는 아주 철저하게 읽었던 모양이야. 거의 뭐, 안의 내용을 쫙쫙 뽑아내다 시피 하던걸. 그러니 대충 한번 읽은 거 가지곤... 음.”

쿠로사카는 이 소설에 대해 ‘시선’이 어쩌고저쩌고 이야기 했다. 물론 민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안 어울리게 보는 것도 그녀의 말을 좀 이해해 보고자 하는 때문이다. 말을 붙이려고 해도 뭔가 대화가 통해야 붙일게 아닌가.

“재미있어?”

“음, 주인공이 선생님이라 존경하는 사람이 나중에 주인공에게 삼각관계에서 자기 친구를 자살로 몰아넣었다는 걸 이야기 해 주고 자기도 자살하고 만다는 이야기야. 뭐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문학치고 그렇다는 거지, 역시 만화책이 이천육백만배는 더 재밌어. 결말도 찝찝하고. 근데 남자 주인공이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는 좀 이해가 안 되더라. 굉장히 따르거든.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것 같지는 않던데.”

대단한 사람 맞다. 마음에 나오는 ‘선생님’이란 캐릭터는 동경제대를 졸업했다. 그 시절 동경제대를 졸업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물론 주인공의 선생님에 대한 태도에 동경제대가 어떠니 하는 문제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순수하게 그 선생님에게 끌린 것처럼 표현된다. 이 문제는 편지에 나오는 선생님과 그의 친구간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그래서 읽는 이에 따라서는 이것을 은밀한 게이 소설이라 평하기도 한다.

“우와, 땅을 파는 이야기구만.”

고릴라가 질색한다. 치정싸움 끝에 죽음이라니, 그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이야기다. 고릴라는 남자답고 당당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남자다운 이야기의 여자관계가 ‘문어발’ 이라는 것은 비밀이다.

“그렇지? 그래도 쿠로사카는 아주 진지하고 성실하게 읽었던걸. 일본에서는 굉장한 걸작으로 평가되나 봐. 왜 그런진 잘 모르겠지만. 은결 그 녀석도 읽어본 것 같던데. 그 녀석이라면 알겠지?”

“그렇겠지. 그 녀석이 읽은 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장면 같은 건 상상도 못하겠군.”

“우리끼리 있으니까 하는 이야기지만, 솔직히 그 녀석 대단하잖아.”

모두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알게 되었을 무렵에는 싸움 잘 하고, 동생이 준천재급인 암울 왕따 청소년이란 이미지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은결은 은결 본인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것 같았다. 좀 뜬금없는 소리 하는걸 그만두고, 다른 사람들의 수준에 맞춰 적극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어딜 가서도 중심에 서게 될 거라고 여겨진다.

“아냐. 은결은 그렇게 까지 대단하진 않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늑대가 당황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무슨 소리야?”

“은결은 물론 대단하지만, 그건 우리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거야.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거야. 그런 사람들에게 은결은 그저 평범한 하류인생의 적당한 젊은이 정도로 밖에 비치지 않겠지. 그 녀석이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건 아니잖아.”

여우는 설명했다. 늑대는 그 설명이 너무 냉혹하지 않은가 하고 느꼈다. 은결에 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점이 한층 그렇게 느끼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우의 이야기는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건 그렇지만...”

“발터 벤야민이 옳았다면 은결은 물론 대단해. 그 녀석은 진짜거든. 하지만 발터 벤야민은 틀렸어. 사물의 아우라는 붕괴되지 않아. 사람들은 모두 ‘아우라’를 갈망해. 기껏 대량생산과 디지털의 사회가 예술의 일회성을 붕괴시켰건만. 그래서 시시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 저명인사가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둔갑하고 말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용물을 보지 않아. 사람들이 보는 건, 기껏해야 다른 사람들이 그걸 대부분 원하고 있더라고 하는 현상 정도겠지. 이건 다른 누가 해준 이야기가 아냐. 은결이 해준 이야기야. 그러니까 은결은 대단하지 않아.”

그래. 이 이야기를 해 준 것은 다른 누가 아닌 은결이었다. 은결은 대단하지 않다. 그는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모든 것을 통해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 그는 대단하지 않다. 여우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세 사람이 차례로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은결은 대단하잖아. 너 그 녀석 요리 먹어 봤잖아. 벌써 그 정돈데, 그쪽으로 가면 머지않아 오성, 아니 육성 호텔 총주방장도 하겠더라. 장래에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사, 뭐 이런데 이름을 올릴지도 몰라. 그쯤 되면 솔찍히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

“그리고 운동도 엄청나게 잘할 걸. 싸움 잘 한다고 운동 잘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녀석은 뭐랄까, 기초 체력 자체가 틀리다는 느낌이란 말야. 그래서 싸움을 잘 하는 걸 꺼야. 그러니 틀림없이 운동도 잘 하겠지.”

“더구나 여자 친구는 부자에 미소녀잖아. 전에 바캉스 갔을 때 빌린 별장 걔 꺼잖아. 뭐 고딩인데 장래의 일 까지 어찌 알까마는 혹시 잘 되면 갑부집 데릴사위 아니냐. 그게 아니라도 벌써 그런 미소녀가 애인이라는데. 인생의 승리자지.”

그리고 침묵. 여우는 잠시간 할 말을 찾지 못한다. 다른 세 사람은 잠시 숙고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결론을 내린다.

“역시 은결은 대단한 것 같아.”

“......”

여우 패배.

5교시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다. 미래는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을 먹고 하는 수업이란 흔히 나른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도 쉬는 시간 종소리를 들으면 싹 날아가 버리고 만다. 곤란한 버릇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서 성적이 떨어져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별 상관없지 않겠는가.

그녀는 얼른 친한 아이들이 많은 곳으로 가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던 가운데 한 명의 태도가 아침부터 계속 어딘가 우울한 것을 눈치 채고 물었다.

“얘. 너는 아침부터 쭉 왜 그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휴. 계집애, 일찍도 물어본다. 어제 저녁에 공부하려고 책상에서 책 펼쳐놓고 잠깐 옷 갈아입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 순간에 엄마가 들어와서는 딴짓 하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시잖아. 그것 때문에 공부할 마음이 싹 달아나 버리더라.”

주변에서 “아, 나도 그런 적 있어.” 하는 공감의 탄성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다들 같은 경험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미래하고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소리였다. 집에서 도통 공부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책은 읽으라고 권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있었지만, 공부하라고 잔소리 들은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 정말로 공부가 소흘했거든. 아침에 그것 때문에 또 잔소리를 들어서. 기분이 안 좋았던 거지.”

한숨을 흘리며 소녀는 이야기를 정리했다.

“계집애. 그럴 때는 억지로 앉아 있는 척이라도 하는거야.”

“알지만, 그런 소리 듣고 나면 공부하기 싫어지잖아. 막 반항하고 싶어지고.”

“응. 그 기분 알 것 같다. 뭐라고 할까. 그대로 공부하는 게 옳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하면 마치, 내 주체성이 침범당하는, 그런 느낌이 든다고 할까? 조종당하고 싶지 않다는 걸, 그런 걸 부모님한테 부여주고 싶은 생각도 들고 말야.”

“그래. 쓸데없는 고집이란걸 머리는 알지만 가슴은 잘 받아들일 수가 없더라. 욱! 하잖아. 욱! 하필이면 공부하려고 준비하던 그 순간에 말야. 정말 놀다가 할 말 없이 잔소리 듣는 거면 그래도 괜찮은데, 딱 그런 순간에 걸리면 난감하죠.”

한숨을 쉬며 여고생들을 공명한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래는 경험이 없어서 공명은 못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은 해 본다. 지난번에 친구중 하나가 예쁜 장신구를 사 왔길래 자신도 하나를 샀다. ‘질수 있나’ 랄까, 그런 마음이었다.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오빠라면 무슨 말을 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 화제는 거기까지 였다. 소녀 한 명이 다른 이야기 꺼리를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미래 오빠 말야.”

“에? 우리 오빠가 왜?”

오빠 이야기라고 한다. 흘려 들을 수 없었다.

“우연히 오늘 옥상에서 내려오는걸 봤거든. 그, 굉장히 예쁜 일본인 언니랑. 조용하면서도 분위기가 굉장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 있는거 아냐?”

당시의 장면을 회상하며 말했다. 이렇다 할 말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조용히 내려가는 모습이 묘하고도 굳은 연대를 느끼게 했다. 관계자 외 접근금지 오라가 풀풀 풍겼던 것 같다. 미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에? 그래? 뭐 가족이라고 해도 연애사는 쉽게 얘기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니 미래도 모를 수 있겠지. 그래도 두 사람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아마 사귀고 있는거 아닐까. 좀 아깝다. 나 사실은 네 오빠 노리고 있었는데.”

소녀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 그럴 리가, 어, 없잖아. 오, 빠가, 무슨.”

이어지는 그 말에 미래는 단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그녀의 오라비는 양자역학이니 원숭이 셱스피어 치는 소리니 운운하며 그런 사태의 발생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지만, 오빠는 비록 그렇다고 해도 상대 쪽에서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괜히 자신에게 치근대고 하면서 했던 말이나 행동을 생각해 보면 더욱 말이다. 미래는 분노했다.

*요즘 댓글이 심각하게 적었습니다. 글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좌절도가 매우 높군요. 한동안 연재는 쉬면서 글을 전체적으로 체크할 필요가 있는지 고민입니다. 의견 바랍니다. 좀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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