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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14화 (214/300)
  • #   215-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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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와 헤어진 은결은 교실로 들어갔다. 얼추 7할 정도의 학생들이 이미 도착해 책상을 채워놓고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물원 삼총사를 비롯한 일당 가운데는 은결 자신이 가장 늦었다. 은결은 자신의 책상에 가방을 올려두고 일당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갔다. 의아하게도 평소와는 달리 조용한 분위기였고, 더욱 놀랍게도 쿠로사카는 민성과 무언가 필담을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해?”

    “아- 왔냐?”

    고릴라가 은결을 맞았다. 다른 이들도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은결의 등장을 가장 반가워 한 것은 쿠로사카...는, 아니었고, 여우였다.(그녀는 잠깐 ‘음’하고 몸을 움찔 떨었을 뿐이다.)

    그는 읽던 책을 덮어놓고 은결을 맞았다. 은결은 여우가 읽던 책을 보고 눈에 이채를 띄었다. 가죽표지에 극히 얇은 재질의 종이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한국에서 저런 양식의 책은 많지 않고, 대부분 ‘성경’이다. 무슨 일로 성경을 읽는 걸까? 은결은 여우를 바라봤다. 그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여행자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뭐 물어볼 거라도?”

    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가 참혹한 표정으로 이죽대며 설명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무려 데이트를 하신다는데, 상대가 그때까지 풀어보라고 수수께기를 하나 냈데. 풀어보려고 신자도 아닌 주제에 성경까지 빌려 읽으면서 끙끙대는 데도 잘 안 풀린 다네. 무려 저번 주 주말까지 다 사용했는데도 잘 모르시겠단다. 그래서 결국 그냥 너한테 물어볼까 하신데.”

    “헤, 이리세가 낸 수수께끼란 말이지.”

    은결은 흥미를 느꼈다. 이리세와는 미래 몰래 어제도 적지 않은 시간 통화했다. 그는 이리세와 이야기하는 것에서 언제나 즐거움을 느낀다. 그녀의 지성은 은결이 감히 내딛지 못하는 영역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그 거침없음. 그 뚜렷함. 그 상상력. 그녀의 사유는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의 수수께기라고 한다. 흥미가 동할 밖에.

    “어떤 거야?”

    “아, 그게 말야, 이리세가 왜 지혜과가 곧 선악과인지 설명해 보라는데. 나는 도통 모르겠더라구. 어때, 너는 알겠어?”

    아아, 그녀답구나. 은결은 마음 한 곳의 저림을 느끼며 부드럽게 웃는다. 그녀다운 장난이었다. 살짝,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다. 그녀의 선명함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부러움에 마음 한 곳을 언제나 타오르게 한다.

    옆에서 여우는 은결의 미소를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 쿠로사카는 필담을 잠깐 멈추고 여우를 바라보고 이었다. 은결은 입을 연다.

    “그건-”

    “잠깐만.”

    “왜?”

    “혹시 네가 말한 게 아니면 나는 쪽 파는 거잖아. 그러니 맞는지 확인 좀 해 보려고. 네가 생각한 그 답 말야, 앎이 인간의 의무라는 것과 연관이 있어?”

    “그야, 그거야 말로 답 그 자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는걸.”

    은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답한다. 여우는 그 웃음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지난주 내도록 생각해도 알 수 없었는데. 그는 단 한 순간에 답을 읽어낸다.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말하듯이. 마치 자신만이 이리세의 진정한 반려인 것처럼 적확하게. 은결은 대단하다. 그는, 아마도, 부정할 수 없이, 대단, 한, 것, 같-(않)다.

    “그러니까 말야-”

    “아냐. 말 하지 마.”

    “응?”

    “역시 직접 알아내 볼래. 네게 들어서 맞추면, 역시 좋지 않겠지. 이리세를 속이는 게 될 테고. 음. 연인을 속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기도 하겠고.”

    은결은 여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쪽이 더 올바른 태도인 것 같았다. 그는 여우를 격려했다.

    “그럼 잘 해봐. 어렵진 않으니까 곧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 곧 찾을 수 있겠지.”

    여우는 답한다. 은결은 맑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여 여우의 의견을 긍정한다. 그는 여우가 그 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리라 의심 없이 믿고 있다. 그렇게 되어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리세는 매력적인 여성이다. 이제 그는 고개를 돌려 민성 쪽을 바라본다.

    “그런데, 두 사람을 뭘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

    “별거 아냐. 그냥 독서토론 같은 거지. 껄껄.”

    민성은 어울리지 않게 웃으며 성취감을 과시한다. 은결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다. 민성이 독서를 넘어, 그걸 토론하다니, 목표가 독서와 그 독서 감상에 따른 의견 교환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놀라운 일이다.

    “무슨 책인데?”

    “그 전에 보여줬잖아. 나쓰멘가 하는 사람이 쓴 소설. 마음이라고.”

    “아아.”

    은결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면 쿠로사카가 읽던 걸 보더니 말 붙일 꺼리를 만든답시고 자신도 읽기 시작했었다. 이렇게 필담을 나누는걸 보니 소원성취 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그는 근처에 주저앉아 두 사람이 필담을 나누고 있는 연습장을 바라본다. 필담의 정확한 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추리할 수 있었다. 특히 어느 쪽이 민성의 글인지는 굳이 필적을 생각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한 쌍의 대화마다 어설프게 읽은 티를 강렬하게 내는 쪽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은결은 민성을 바라봤다.

    “훗.”

    민성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 차갑게 웃음을 던졌다. 한 대 때리고 싶어지는 모양새다. 은결은 속으로 이놈이 아큐정전은 다 읽어봤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연습장 위로 시선을 던졌다. 쿠로사카가 그걸 보고 조금 몸을 경직시켰다. 그녀는 은결이 자신이 쓴 글을 읽는다는 것에서 상반된 두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쿠로사카는 그 글을 보여주기 싫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보여주고 싶다고 여겼다. 그녀는 창피했지만, ‘마음’이란 소설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통해 은결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또 있었다.

    “음, 아주 좋은 이해인걸. 전체가 다 모여 해석을 이루는 것이 기대되.”

    은결은 한동안 바라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쿠로사카는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기뻤다. 분명히. 명확하게. 하지만 그의 평가에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데, 좀 억울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은결이 이렇게 잡다하게 떠들며 지내는 게 자신의 역할이 컸다고 하니, 그 부분으로 청산하면 되리라.

    한편, 고릴라는 위태로운 얼굴로 늑대를 바라보며 말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늑대는 주변을 살펴본다. 성경 붙잡고 끙끙대는 놈이 하나, 책 하나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둘, 슈퍼 대마왕이 하나. 자신까지 합쳐 자유 시민이 둘이었다.

    “글쎄...”

    늑대는 먼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그러고 보면 슈퍼 대마왕 저놈은 언제 가지를 쳐 줄지 모를 노릇이다. 슬슬 소식이 있을 무렵인데 말이다.

    “후-”

    책상 위에 몸을 기대고 세연은 한숨을 쉰다. 가을비에 젖은 가랑잎 같은 쓸쓸함이 베여있는 태도다. 그녀의 슬픈 얼굴에 친구 하나가 다가와 묻는다.

    “얘, 웬 한숨이야? 토요일 날 데이트 한다더니, 잘 안 됐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니, 데이트는 참 좋았지만...”

    “좋았으면 뭐가 그렇게 울상이야? 가지 치기에 관심있는 애가 없어서 그래?”

    “설마.”

    “그럼 뭐야, 벌써 님이 그리워 지기라도 했다는 거야?”

    “응, 뭐 그렇 것도 있다면 있지만...”

    세연은 살풋 웃으며 말한다. 살짝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운 태도다. 이 염장질에 주변은 경악한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전율이 격통처럼 그들을 강타한다. 저 계집애에게 나중에 한턱 크게 사 내도록 해야 하겠다는 무언의 결의가 그들의 마음을 통일시켰다.

    “그 보다는... 음, 너희는, 사랑이란 게 뭐라고 생각해?”

    주변을 돌아보며 세연은 묻는다. 다시 한 번 주변은 놀란다. 워낙 가공할만한 질문이었던 탓이다. 연애를 하면 다 이 계집애처럼 되는 걸까? ‘흐, 흠, 좀 무서운데.’ 그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부러움이 마음 한 구석을 두렷하고 크게 채우는 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먼저 한 명이 그리움과 간지러움을 담아 조심스레 말했다.

    “음,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 말도 필요 없이, 그저 눈빛만으로 통하는, 그런 거라고 생각해.”

    “그가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그가 되는, 뭐 그런 거?”

    의견은 계속 이어졌다. 주로 연애 경험이 없다는 티를 많이 내는 감상적인 의견이었다. 때때로 현실적인 풍자가 들어가 냉소적으로 사랑을 바라보는 의견이 있는 정도였다. 그녀들의 의견을 들으며 세연의 얼굴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랑에 대한 친구들의 감상적인 의견은 연애경험이 없는 티를 내긴 해도 주로 자신의 것이라기보다 어딘가에서 따와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렸는데, 그것은 대부분 영원이나 신뢰와 같은 것을 통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어떤 이해나 합일을 끈질기게 이야기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그렇지만 세연은, 그런 것 같지 않다고, 사랑이란 그런 의견들과는 틀림없이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만일, 자신의 이 무참하고 가련한 마음이, 거짓 없는 진심이라면, 그래서 틀림없이 그 애절한 단어에 들어맞는 감정이라면, 그렇다면 말이다...

    *출판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후 글을 쓰면서 시장 트렌드에 대해 고려하면서 적는 걸 안 하겠다는 거지 특별히 어렵게 쓰겠느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쓰던 글이 안 팔린다고 조기종결 당해서 글이 망가지게 되는 그런 것도 싫고. 물론 개인지 안 내겠단 소리도 아닙니다. 가능하면 내고 싶군요. 하지만 전에도 밝혔듯이 완결되고 나서나 이야기 할 수 있겠죠.

    *절필은 특별히 대단한 각오 위에 하는 게 아니라 아마 하나쯤 완결하고 나면 먹고사니즘의 압박이 강해서 못 적을 것 같다는 예상일뿐입니다. ‘하나 더 완결’한다고 하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아도, 사실 글 하나 완결 짓는데 걸리는 시간은 성실하게 적는다고 할 때 2년 정도는 잡아야 하고,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죠. 그러면 글로 먹고 살 생각이 없는 한 그때는 저도 직장인일테죠. 글 쓰는 건 좋아하니, 일이 기대보다 원만하게 풀리면 다시 적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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