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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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이다. 쿠로사카는 문장의 끝을 잃는다. 이어지는 것은 여백이다. 결국, 다시 한 번 소설을 다 읽었다. 그녀는 페이지를 크게 잡아 앞으로 넘겼다. 그리고 한 장 두 장 앞뒤로 넘기며 무언가를 찾는다. 곧 그녀의 동작이 멈춘다.
'かつてはその人の膝の前に跪いたという記憶が、今度はその人の頭の上に足を載せさせようとするのです。'
쿠로사카는 깊은 눈길로 그 문장을 살핀다. 이제 겨우, 그녀는 왜 은결이 이 소설을 무엇보다 ‘시선’에 대한 걸작이라 이야기 했던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명료함이, 이제껏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 기이할 정도로, ‘시선’을 통해 파악한 ‘こころ(마음)’라는 작품은 섬뜩하고 분명했다. 꾹꾹 조여진 현악기의 선을 힘껏 잡아당겼다 놓은 것 처럼 마음이 징징 울린다.
배신당한 자가 배신한다.
억압받는 자가 억압한다.
승리하는 자가 패배한다.
패배당한 자가 승리한다.
쿠로사카는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허망함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미래야!”
은결이 문 앞에서 불렀다.
“오빠, 잠깐만!”
황급한 대답이 곧장 이어졌다. 곧 이어 우당탕한 바쁜 발걸음 소리와 더불어 미래가 묵직한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은결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맨날 학교에 교과서니 공책이니 몽땅 놔두고 복습에 필요한 물건만 챙겨서 등하교를 완수하는 그녀의 가방에 걸맞지 않는 중량이다.
“웬 일로 가방이 그렇게 묵직해?”
문을 열고, 인사를 한 다음 집을 나서면서 은결은 뒤따라 나오는 미래에게 물었다. 미래는 곧장 답한다.
“시험기간이잖아!”
“시험 기간인거 하고 무슨 상관이야? 시험 기간이라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아니면서.”
은결은 자전거를 대문 밖으로 꺼내면서 다시 물었다. 미래는 성적에 비하면 정말 공부를 안 한다. 다른 학생들이 보자면 화가 날 정도로. 은결이 자전거 앞좌석에 앉자, 미래가 냉큼 그 뒷자리를 차지하며 답했다.
“지난번에 공책하고 교과서를 도둑맞았던 쓰린 경험이 있어서, 시험 기간 중에는 좀 사수를 해야겠다 싶어서 지난주에 전부 집으로 옮겨 뒀거든. 없으면 공부하는데도 좀 짜증스럽고, 뭣보다 구하러 돌아다니기 피곤하잖아.”
“흐응, 그것도 그런가.”
은결은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자전거는 앞으로 부드럽게 나간다. 뒤에서 미래가 계속 툴툴거렸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정말 짜증스럽다니까! 아무리 내신이 입시에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남의 교과서하고 공책을 그렇게 훔쳐가다니. 특히 공책 같은 건 잔뜩 필기해 놓은거 잃어버리고 나면 다시 구할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애들이 휴대폰으로 칠판 사진만 찍고 마는걸 꼭 게으르다고 탓할 수만도 없는 거야.”
“너 같은 경우는 특수하잖아.”
바람결에 뒤섞어 말을 흘렸다. ‘특수’라는 오빠의 자신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마음에 든 듯, 미래는 입술 양쪽 끝을 만족스럽게 올렸다.
“후훗. 그건 그런가. 후훗. 내가 좀 예외적인 경우이긴 하지. 후후훗.”
“음.”
은결은 한 마디 해 주려던걸 참는다.
“그래도 내신 때문에 이런 꼴 당하는 건 짜증스러우니까 얼른 바뀌었으면 좋겠어. 이게 뭐야. 이러다간 학교에서 친구도 마음대로 못 사귀겠다.”
“그게, 아마 그렇게 쉬운 문제는 또 아닐 거야.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네가 공책을 도둑맞는 사태에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처해있는 총체적인 곤란함이 함축되어 있거든.”
“음, 일미진중함시방은 먼지 한 톨에도 우주의 모든 사태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거지?”
“그래. 사태의 관계성을 극단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지.”
“어떻게 여기 대한민국이 처한 문제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거야?”
미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귀여운 모습이다. 어차피 은결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러니까, 내신을 강화하는 것은 정부가 그 부작용을 몰라서라기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더 큰 부작용을 낳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결과의 산물이거든. 한국은 학벌이 무척 중요한 사회이고, 그래서 중고등학교의 내신을 무시해 평준화를 포기하면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낸다는 평판을 받는 학교 주변의 땅값이 크게 올라가게 돼. 이게 오래 지속되면 그 자체로 도저히 막기 힘든 관성을 가진 하나의 투기 대상이 되어버리고, 결국 양극화를 한층 초래하게 되지. 그렇지 않아도 부동산 불패 따위의 말이 있는 형편인데, 그걸 눈 뜨고 방치할 수는 없었겠지.”
“흠, 부동산 투기 같은 건 세금으로 어떻게 처리해 버리면 되는 거 아냐?”
“이런건 단순히 세금으로 처리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닌 법이야. 특히 지금 한국에서 부동산에 돈이 몰리는 건 좀 더 근원적인 문제 때문이거든.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의 유휴자금이 400조원을 넘어선 상태인데, 그 돈이 투자할 곳이 없어서 부동산이 몰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부동산 거품이 발생하고 있는 거니까.”
“400조!”
미래는 놀라서 외친다. 400조. 입이 딱 벌어지는 거금이다. 자기는 하루에 삼천 원도 간당간당한데, 400조라니, 한국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그래. 400조. 굉장하지? 그런 거대 자본이 갈 곳이 없는 상태야. 구제 금융 이후로 한국에서 투자할 시장이 팍 죽어버렸거든. 그건, 한국으로서는 치명적이야. 그만한 돈이 투자가 될 때만 무엇보다 그만한 규모의 일자리가 발생할 수 있는 건데, 시장이 없으니 일자리도 안 생기고 있지. 사실 지금 한국 정부가 북한에 집착하는 것은 그 돈의 투자처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해. 평화 그 자체와 통일도 물론 중요한 목표지만, 그보다는 역시 ‘돈’이 문제인 거지.”
거기까지 말한 은결의 얼굴이 불편해 졌다. 정치적인 패권 싸움으로 현 전부의 대북 정책이 마냥 퍼주기로 비판되고 있다는 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비판하는 자들도 왜 북한에 대해 계속 지금의 정책을 유지해야 하는지 뻔히 알고 있을 것이면서. 그리고 퍼주기로 비판하고 있지만 북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은 일본이나 중국에 대면 부끄러운 수준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당사자이면서.
지금 정부의 대북 정책이 반드시 옳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낮은 수준의 대북 지원을 할 경우, 그 지원은 무의미하다. 같은 상황이 장기적으로 유지된다면 북한이 중국에 흡수 통일될 가능성은 낮지 않다. 그들은 모든 이들이 저항하는 티벳을 무력으로 통합했다. 지도부의 대다수가 친중파인 북한이 중국에 흡수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현재만 해도, 단순 지원만 중국은 한국의 세배고, 교역량은 두 배를 넘는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중국은 북한의 대형(大兄)이다. 민족? 우스운 이유다. 언제나 자본과 권력의 힘 앞에 민족이란 참으로 사소하고 시시한 문제에 불과했다.
‘기호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요.’
토요일날, 세연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기호가 너무 적었다. 기호는 너무 적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많아서, 기호를 지배하는 자가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언론이 기호를 지배해, 기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결정해 버림으로서 현실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은 그들이 구성한 현실을 자신들의 현실로 받아들였다. 기의에 대해 기호는 너무나 적은 것 같았다. 그래서 기표에 기의와 함께 욕망은 그토록 쉽게 스며들 수 있고, 스며든 욕망은---
“헤, 그렇게 이야기 하니 정말 내가 공책을 도둑맞는다는 사태 하나에 대한민국 전부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 같네.”
미래의 말이 은결을 상념의 세계에서 건져 올렸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 그래서 어떤 걸 판단하면서 단정적으로 뭐가 옳다 그르다고 말하긴 언제나 어려운 법이야. 사태와 사태는 모두 복잡하게 얽혀 있거든. 뭐 그렇다고 언제나 끙끙대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법이지만.”
“아아- 그래도 가녀린 소녀는 공책과 교과서를 안심하고 아무데나 놓아두고, 그저 친구들과 뛰놀고 싶은데 말야. 어떻게 안 될까?”
“모두들 착해지면 되겠지. 시기도, 질투도 없이-”
아련하게, 은결은 말했다. 미래는 그의 말끝이 가을처럼 메마르고 쓸쓸하다고 느낀다. 어쩐지 우울해져서 그녀는 은결을 꼭 껴안으며 등에 얼굴을 폭 묻는다. 은결은 등으로 느껴지는 무게와 온기에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미래는 곧 부루퉁하게 은결의 답을 평했다.
“쳇! 그게 오빠가 말한 대한민국이 처해있는 총체적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 보다 백만 배는 어렵겠다.”
“하하. 그것도 그렇겠지.”
은결은 쓰게 웃는다. 확실히 그러하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세상에 그 어떤 문제가 있겠는가. 개개의 인간은 바뀌어도 인류라는 보편적 종은 그렇지 않기에 언제나 시스템이 화두가 된다. 인간이 바뀌어 도래하는 세상. 그것은 유토피아조차 넘어서 있는 것 같다. 은결은 그렇게 느낀다. 이어서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미래야.”
“응?”
“전에 말했던 거 어떻게 생각해?”
“아, 그거? 기각.”
미래는 단박에 답한다. 쌀쌀맞다. 은결은 우울함을 느낀다. 만나달라는 요청을 일언지하에 미래가 거절하더라고 고릴라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말이 궁했기 때문이다.
*소세키의 마음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해석은 그것이 동성애 소설이라는 거죠. 그런 삘이 좀 있긴 합니다. ㅋ
*저는 아마 오래 글을 못 쓸 겁니다. 이 다음에 한 작품을 적어 완결을 지으면 그걸로 끝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러니 한 작품에 고착하기보다 좀 더 다양한 캐릭터와 주제를 다뤄봤으면 합니다. 하니, 아쉽지만 이 글의 2부나 패러럴 월드 같은 게 적힐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남겨진 아이 2부 정도나 틈틈이 써볼까. 이것도 꽤 힘들 것 같습니다만.
*참고로 다음에 쓸 것도 출판은 고려하지 않을 겁니다. 큼.
*외전을 배치가 애매하군요. 이리세 파트 끝내고 생각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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