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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10화 (210/300)
  • #   211-희망을 위한 찬가 -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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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원에서, 여우는 이리세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아. 벌써 시험시간표가 다 나왔군. 세월 참 빠르게”

    성천 고등학교의 시험 시간표는 오늘 종례 시간에 발표됐다. 다음 주부터는 이제 명백히 시험 기간에 돌입한다. 추석 다음 주가 시험이라는 것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는 애매했다.

    “너희 학교는 어때?”

    “우리는 좀 더 빨리 발표됐어.”

    “그럼 공부하는데 비교적 여유가 있었겠네.”

    “그렇진 않아. 어차피 내신 문제라면 다들 같은 조건에 불과한걸. 여유가 있다면 내게만 여유가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여유가 있는 거지. 그런 건 무의미한 여유야. 그러니 결국 여유가 없다는 말과 같아.”

    이리세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답했다. 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뭐 그렇긴 한가. 그래도 넌 여유로운걸 보면 자신 있다는 말이겠지?”

    “후후, 마음대로 판단하세요.”

    웃으며 말하는 이리세에게서는 넘보기 힘든 자신감의 벽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여우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는 그러한 자신감을 내보일 자격이 있다. 그녀의 학교 성적은 모르겠지만, 학원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성적은 굉장한 것이다.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정작 학교라는 공인된 배움의 무대에서는 빌빌대는 은결과는 달리. 여우는 투정하듯 입을 연다.

    “그러고 보면 은결도 너처럼 학과 공부에도 좀 신경 쓰면 좋을 텐데. 그 녀석은 도통 그런데 신경을 안 쓴다는 인상이거든. 성적이 나쁜 건 아니지만 어중간해서 말야. 아는 것에 비하면 너무 낮지. 은결은 대단하지만, 이대로라면 그 녀석의 대단함을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을 거야. 능력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닐거면서.”

    “걱정되나봐?”

    이리세가 웃으며 물었다.

    “그야, 친구니까.”

    여우는 그렇게 말을 자른다. ‘친구니까.’ 여우는 자신의 그 말이 자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 덜그럭 거리는 어떤 덩어리에 달라붙는 것을 느낀다. 메아리 없이 밀착되어 떨어지지 않는다. ‘친구니까.’ 완벽하다. 그는 말을 추가한다.

    “만일 내가 나중에 사회에서 성공하게 된다면 은결 그 녀석을 위해 괜찮은 자리를 잡아주고 싶어. 은결은 참 괜찮은 녀석이지만 이 사회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그대로 세상에 나간다면 은결은 아마도 경쟁에서 낙오될 거야. 패배자가 되겠지. 그러니까 말야.”

    여우는 확정적으로 말한다.

    “흐응.”

    이리세는 흥미로운 듯이 그의 말을 들었다. 여우는 그녀가 무언가 말을 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곧 선생님이 들어왔고,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학원이 끝났다. 돌아가는 길에 이리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우는 문득 생각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편하다고. 어려운 데서는 은결의 이야기와 같지만, 그의 이야기와 달리 편하다고.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미지 같은 것으로 비교하자면, 은결의 이야기가 저 놓은 곳에서 안개 낀 세상을 내려다보는 산수화 같다면, 이리세의 이야기는 한 점 그늘 없이 원근법을 통해 직조된 세상의 모습 같았다. 그 의혹 없는 정밀함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그리는 그림에는 ‘혹시’같은 것 없이 그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곧 헤어져야할 길목에 도착했다. 여우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이리세에게 헤어지는 인사를 했다. 이리세는 그의 인사를 받아들이며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다.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은 귀여웠고, 그 귀여움에 걸맞지 않는 단단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이리세는 그리고 여우에게서 등을 돌리려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몸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수수께끼를 하나 내볼 테니 맞춰보지 않겠어?"

    "얼마든지!"

    "성경의 창세기 알지?”

    “응.”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따라 따먹은 열매의 이름은 ‘선악과’였잖아. 그건 흔히 ‘지혜과’라고도 이야기 되지. 왜 그 과일의 이름은 선악과이자 지혜과였을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듯한 리듬으로 명료하게 이리세는 물었다.

    “음, 맞추면 뭐 좋은 거 있어?”

    “후후, 글쎄. 네 답은 다음주 데이트 날에 듣도록 할께.”

    이리세는 신비로운 미소를 보여주며 말을 흐렸다. 여우는 그녀의 미소에서 답해줄 생각이 없음을 읽고 다른 것을 물었다.

    “힌트 같은 건 없어? 그대로는 너무 애매한 것 같은데.”

    “힌트라. 한 가지 얘기해 준다면 그 이야기는 앎이 인간의 의무라는 걸 설명하고 있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 네 답, 기대하고 있을게.”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던 이리세는 이내 그렇게 답하고는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여우는 그녀의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며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런 수수께끼를 내는지, 그리고 이 수수께끼의 답은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어느 쪽 의문에 대해서도 쉽게 답은 찾아질 것 같지 않았다.

    토요일이 되었다. 학교는 일찍 마쳤다. 은결은 바쁘게 움직여 집으로 돌아가 사복으로 갈아입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오늘 그는 세연과 데이트 약속이 있다. 버스를 타고 약속한 장소에 세연을 만나러 가면서 은결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가 싫은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관계가 두 사람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고, 종국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있는 끈은 푸른 이빨이라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봉인진을 해석해 현자의 돌 기본 술식을 이용할 힘을 손에 넣게 된다면 일련의 문제는 모두 해결될 테니, 그때까지 버티는 것 외엔 지금 별 다른 수가 없었다.

    ‘푸른 이빨...’

    그 강대하고 오만한 존재를 생각하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감각은 분노다. 그 빌어먹을 존재로 인해 은결은 올 초부터 무던히 고생했다.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하고, 자아를 잠식당하고, 반갑지 않은 많은 일을 겪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바라보고 싶지 않은 자신에 대해 잔인한 시선으로 해부해 드러내 보여준다. 사랑하면서 경멸하고, 해석하면서 해석에 반대하는, 그 해결 불가능한 모순의 굴곡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하지만 분노만으로 감정을 정리할 수는 없다. 동시에, 그 덕분에 몇 번의 위기에서 빠져나오고, 목숨을 구했던 것도 사실이다. 푸른 이빨이 아니었다면 은결은 적어도 두 번 죽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 뿐이니 고마워할 하등의 이유도 없지만. 은결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생각을 이어간다.

    ‘그런데 그 녀석은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을 손에 넣은 걸까?’

    얼마 전 자아를 잠식당했던 것을 생각하며 은결은 푸른 이빨에 대한 의문을 더해간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던 사태였기 때문에 완벽하게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한 힘은 결코 쉽게 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물일여의 감각이 아니었더라면 틀림없이 잡아먹혔을 것이다. 그에게는 힘이 있었다. 강대한 힘이. 본래의 자신에게는 미치지 않지만, 대개의 술자들을 한참 넘어서는 강대한 힘이. 은결은 걸음을 우뚝 멈춘다.

    ‘그럼, 그 녀석이 세연에게 계속 머무를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헝클어지려는 은결의 생각을 막는 것은 자신을 향해 들려오는 반가움이 담뿍 담긴 목소리였다.

    “여기!”

    은결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서서히 가을을 머금으며 초록을 뱉어내는 나무 아래에, 정갈한 흰 옷의 소녀가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세연이었다. 은결은 웃으며 그녀가 있는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미안. 먼저 와서 기다리게 해서.”

    격의 없는 말로 인사를 한다. 말의 중간에 희미한 뒤틀림이 들어가 있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갑자기 이렇게 평어로 말을 하려니 힘들었다. 줄곧 세연에게는 경어를 써 왔었고, 말을 놓기로 한 이후로도 대화보다는 문자를 이용하는 게 더 많았다.

    “으으응. 좋아서 기다리는 건데 뭘, 은결이 늦게 온 것도 아니고.”

    세연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그녀의 동작에 따라 움직이는 머리칼의 아름다움은 가을 주말의 태양빛과 함께 각별하다. 낮아지는 온도에 맞춰 거둬지는 풍요의 흔적 가운데 희게 차려입은 세연의 모습이 가련함 같은 것을 표상하기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른다. 고, 은결은 느꼈다.

    “그럼, 영화표도 예매해 뒀고, 우선은 간단히 요기라도 할까?”

    “응. 영화관 근처에 괜찮은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다고 친구한테 들었거든. 거기로 가 보는게 어때?”

    “그래.”

    은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은결과 발맞추어 은결과 걸으면서, 세연은 자신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고, 몸 전체로 전달되는 진동 가운데 오늘 맨 처음 은결이 자신에게 한 말을 되새겼다. 말 가운데, 희미하게 금이 가 있는 듯한, 그런 말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뒤틀림이 은결의 어떤 감정에서 파생되어 나타난 것인지, 그녀는 그 기호를 읽어낼 수 없었다. 서둘러 오느라 숨이 부족했던 것인지,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라 생겨난 망설임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냥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것인지, 이것들이 모두 아니라면, 설마, 그리고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닌지.

    그러나 직접 은결에게 물어 사실을 확인할 용기는 아무래도 나지 않았고, 그런 용기가 있다고 해도 직접 물었을 때, 그 물음을 건내는 여자아이에 대해 은결이 어떻게 해석할지가 다시 두려워져서 물을 수 없었다. 정리되지 않은 하나의 기호는 의미를 알 수 없기에 불안을 부르고, 불안에서 파생되는 해석은 무수한 사태를 떠올리게 해서 원래의 기호조차 혼돈 가운데 흐트려 갔다. 그렇게, 가능한 기의에 비해 기표는 너무나 적거나 불완전했다. 기표에 기대어 기의를 읽어낸다는 작업은 그저 기적이거나 무모함인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작업을 이렇게 오래도록 해 올 수 있었던 것일까?

    “무슨 생각해?”

    세연이 말이 없자 분위기를 띄우고자 은결이 먼저 물었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어깨를 좁혔다가 이내 부드럽게 풀고는, 과장되게 고개를 흔들며 은결에게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좋구나 하고.”

    그리고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은결의 손을 잡았다. 은결은 쑥스러웠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 피하지 않았다. 은결의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약간의 차가움을 느끼며 세연은 부풀었던 불안을 그 감촉 가운데로 수렴시키며 스스로를 달래듯이 말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추천해 주신 만마님께 감사~

    *완결되면 흔히 사용되는 판형으로 8권 정도의 분량이지 싶습니다. 이 글이 완결까지 10권도 되지 않을 거라는 게 어째 스스로 놀랍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기분은 수십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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