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희망을 위한 찬가 -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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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바쁘게 들락이는 가게 가운데로 한 소녀가 들어섰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정갈하게 묶었고, 날카로움을 느끼게 하지만 그윽하고 맑은 눈이 뚜렷하게 정리된 오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한 얼굴의 아래로는 가냘픈 듯 하면서도 강건한 몸의 선이 정갈한 옷차림 가운데 소담하고 안기고 있었다.
지극히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가게 안에서 음식을 들던 손님들은 놀란 표정을 보였다. 그녀는 곧 가게 안 쪽에 바처럼 만들어 놓은 접객대의 한 의자에 앉았다. 가게에 소수로 찾아와 간단하게 술이나 음식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다. 한창 요리에 열중하던 노인이 소녀를 보고 웃었다. 소녀는 그 미소를 보고 약간 볼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아, 아녕, 하세요.”
어색한 한국어 발음에 쿠로사카는 창피함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구나.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한국어를 일부러 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순식간에 가벼운 수준의 최면장이 펼쳐졌다. 갑자기 홀로 등장한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던 가게 안의 사람들은 갑자기 흥미를 잃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쿠로사카는 과연. 이라고 속으로 감탄했다. 참으로 부드러운 술법의 전개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용건을 꺼냈다.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받아들이면 섭섭한걸.)”
“(아, 예...)”
웃으며 말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쿠로사카는 다시 당황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심 할아버지의 완벽한 일본어에 놀랐고, 조금 죄책감을 느꼈다. 저런 수준의 일본어는 그가 일제강점기를 겪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시절의 일본의 술자들은 민족주의자일지언정 모두 반제국주의자들이었고, 유신정부가 민중 중심 신앙이었던 신도를 아마테라스를 중심으로 신사를 통폐합해 국수주의적으로 바꾸었던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지만, 그것이 그녀가 일본인이라는 사실로 인한 죄책감을 지우지는 못한다. 그녀의 모습을 자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할아버지는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배도 고플텐데 우선 음식을 차리도록 하마.)”
그리고 할아버지는 요리를 시작했다. 곧 음식이 완성되어 그녀 앞에 차려졌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었다. 쿠로사카는 손을 모아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입안으로 그윽하게 퍼지는 담백함이 지극히 그립고, 또한 맛있는 음식이었다. 음식의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자극적인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의 입맛에 맞춰 요리된 음식이라는 점은 명백했다. 쿠로사카는 밝은 얼굴로 높은 목소리를 냈다.
“(맛있어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그리고-)”
쿠로사카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맙구나.)”
“(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딱히...)”
쿠로사카는 할아버지의 말이 도천시의 사념체 퇴치를 돕고 있는 일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당황하여 서둘러 사양하는 말을 했다. 더구나 쿠로사카는 과거 은결을 오해로 인하여 죽일 뻔 한 적이 있다. 그걸 생각하면 이런 정도로 사의를 받는다는 것은 부담스런 일이었다. 속죄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아마 아직도 갚아야할 것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 하지만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란다. 네가 은결이와 함께 지내면서 해준 것들이, 그러니까. 친구로 지내주고 있는 것이, 무척 고맙구나.)”
“(아, 음-)”
쿠로사카의 말문이 막혔다. 그런 정도의 일이 고마움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은결이 좀 많이 특이하고, 좀 왕따 기질이 강하고, 실제로 왕따 생활을 거의 자처하며 지내왔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의 의문에 답하듯이 할아버지가 느릿하게 말했다.
“(은결이는 거의 십년간 친구를 만들지 않았단다. 친구가 있었다고 해도 그건 표면적인 것이었지. 무의미하게 다니는 학교처럼, 무의미하게 만든 친구였단다. 그 아이는 아무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
“(그건 아마 제 아버지가 지금과 같이 되어버린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겠다만, 같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또래의 친구가 없다는 것 또한 큰 이유였을 거라 짐작되는구나. 친구에 대한 은결이의 최초의 경험은 그리 좋지 못한 것이었고, 이후로는 대등한 또래를 만날 수가 없었으니까. 더구나-)”
“(......)”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이렇게 평하는 것은 팔불출인 것 같아도 어쩔 수 없구나. 그래. 은결은 ‘천재’였으니까 더욱 그러했지.)”
“(예. 은결은... 천재입니다.)”
결코 과장된 평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듯이 쿠로사카는 말했다. 그녀는 은결이 천재라는 것을 그간 질리도록 확인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천재성으로 저 먼 곳에 간 채, 이곳을 돌이키지 않는다. 혼자서. 오직 혼자서. 분했다.
“(그래서 학교에 가고,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그 아이에게 한층 더 무의미했던 것 같구나. 과거, 은결이에게 자신이 천재라는 것은 멍에였을 뿐이란다. 그 아이는 천재지만, 그 천재성으로 뛰어넘어야 할 것은 한층 더 한 천재였고, 극복할 수 없는 목표 앞에서 자신의 천재성은 무의미하게 타인을 짓밟는 데나 유용할 뿐인 하찮은 능력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뛰어넘기를 목표로 한다면, 수행은 가혹하도록 위대한 아버지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이 조차 지금은 패배하고 몰락해 반 폐인이 되었다.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은결은 그 가혹한 도전을 계속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더구나. 요즘 은결이와 때때로 이야기를 하면서 느꼈단다. 학교에 가는 것을 예전만큼 지루하게 여기고 있진 않은 걸로 보였단다. 친구들을 이야기 하면서, 즐거워하는 것 처럼 보였단다. 예전 10년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 그게 가능했던 것은, 아무래도 과거와 달리, 자신을 꺼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겠지. 그렇기에 그걸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겠지.)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느릿하게 할아버지는 말을 끝냈다. 쿠로사카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런 사람’이라니. 지금 상태가 계속되면 호흡이 곤란해질 것 같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고맙구나.)”
쿠로사카는 피가 얼굴로 확 몰리는 것을 느꼈다. 당황스러움과 쑥스러움이 한 곳에 모여 우왕좌왕 거렸다. 어떻게 지금 이 순간에 맞춰 행동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은 틀림없이, 무척이나, 아주, 굉장히, 못 견디게, 부풀도록, ‘기뻤’다. 은결은, 은결은, 그는 언제나 자신의 손에 닿지 않은 곳에 있다고 느꼈는데. 어떻게, 무엇을 해도, 그는 결국 다른 곳에서, 다르게 세상을 보고, 다르게 이야기 하면서, 홀로 서 있다고, 그렇게, 그렇게 느꼈는데. 아니라니.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 어떻게든 닿아 있다니. 그렇다니. 어쩐지, 어쩐지- 쿠로사카는 코끝으로 올라오는 감각을 억지로 막았다.
“(아, 아니, 저는-)”
막으면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은 감정의 편린도 싣지 못했고, 표현은 무너진 채 정리되지 못했다. 쿠로사카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지 못한 채 바닥만을 바라봤다. 그토록 맛있던 음식들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뇌가 미각에 에너지를 투자할 여유가 없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그런 쿠로사카를 보면서 자상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은결이를 부탁하고 싶구나. 괜찮겠니?)”
“(아, 그, 음, 노, 노력해 보겠습니다.)”
“(고맙구나. 역시 무리해서 사는 세계가 다른 두 사람이 같이 지내는 것 보다는, 가까운 사람이 함께 하는 쪽이 서로에게 더 좋은 일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단다.)”
쿠로사카는 여전히 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은결네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성원성원성원...
*불교는 비교적 술자의 수가 적은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이 강합니다. 절대적인 외부의 신을 믿는 이들은 신앙을 고양하기 쉬워서 술자가 나오기는 불교보다 좋지만 그만큼 자기 제약이 강한 편이라(머리가 굳어서) 평균적인 강함은 불교보다 약합니다. 종합하면 비슷합니다. 뭐, 그런 설정입니다. 그리고 그노시스에 대한 이 글의 설명은 꽤 오소독스 한 거라서, 예수에 대한 부분 제외하고는 어디가서 이야기해도 창피 당하진 않을 겁니다.
*동성애는 기독교 이전 서구 문화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페더레스티라는 소년과 장년 남성의 교육을 동반한 육체적 관계가 장려되었고, 소크라테스도 여기 탐닉했다고 합니다. 로마도 그렇고. 그리고 생산력이 낮은 지역에서는 동성애가 국가적으로 장려되고 번성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잘라 말해, 인구 억제 수단인 거지요. 사실 가장 강력한 인구 억제 수단은 ‘여아살해’입니다만. 어쨌든 이런 동성애는 남성 중심의 문화로서 여자를 천하게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즉, 완전한 인간인 남자들끼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그런 관점인 것이죠.
*얼른 끝내고 다른 거 쓰고 싶다는 욕망과, 느긋하게 연재 하면서 독자수를 더 늘려보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하는군요. 뭐 이야기 자체는 다 정리된 글이라서 시나리오가 막혀! 이딴 사태는 없습니다. 그 전에 다 짜놓고 쓰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스타일의 글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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