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08화 (208/300)

#   209-희망을 위한 찬가 -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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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내려앉은 건물 옥상에서, 은결은 쿠로사카를 바라본다.

“(뭘 보고 있어?)”

그의 시선을 느끼고 쿠로사카는 약간 어색한 어조로 묻는다.

“(음, 아니야. 그냥.)”

은결은 말을 죽인다. 그가 쿠로사카를 보면서 생각한 것은 오늘 그녀가 옥상에서 보여주었던 태도였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어떤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결국 그녀는 하려던 말을 접었다. 은결은 접혀진 그 말에서 어쩐지 깊은 마음을 느낀다. 쿠로사카가 쉽게 말하는 소녀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일까? 옅게 부푼 거품처럼 마음에 남은 앙금은 쉽게 걷어지지 않는다. 다시 은결은 상상력의 부족을 느낀다.

“------”

은결은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도천시를 구성하는 무수한 불빛을 본다. 하나하나가 삶과 생의 증거였다. 저 하나하나의 빛에 안겨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자신들의, 결코 대체 될 수 없는 실존적인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가장 환상적인 소설보다 환상적으로 느껴진다. 환상을 넘어선 농담 같은 공상. 일소에 붙이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판단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허황됨.

저들 모두가 실존하는 개인이고, 그들의 감정, 그들의 지식, 그들의 선택으로, 그들의 삶을 이어, 그들의 인생을 만들고, 만들어진 인생의 끝에, 결국 그들 자신을 구축해 나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나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버거운데, 이런 버거움이 세상에는 60억이나 있다는 것이, 가학적인 농담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도저히 상상력은 그곳까지 가 닿지 못한다. 도천시의 인간조차도 추상적인 개인과 인류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하물며 60억이라니. 60억의 인생. 60억의 사고. 60억의 고통. 은결은 그런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한 번도 상상력은 충분한 적이 없었고, 충분하지 못한 상상력은 충분해질 때 까지 개방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래.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 많은 ‘그러나’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를 붙이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사태는 없는 것 같았다. 그노시스트가 생각난다. 가장 강인한 상상력으로 모든 ‘그러나’를 파괴하고 앞으로 전진하던 이들. 그들은 성경을 부정하고, 예수를 부정하면서, 야훼를 믿었다. 인간이 기록한 서물이 감히 신의 뜻을 전할 수 없었고, 육신을 입은 메시아 따위가 신이거나 신의 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망설이거나 멈추지 않는 정신으로,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를 자비와 사랑에 충만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마침내 세계를 부정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완전한 신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세계를 만들었을 리가 없다. 이렇게 많은 고통이 삶의 근본조건과 얽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매듭을 이루고 있는, 가장 끔찍한 장난 같은 세상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 세계는 거짓이다. 진정한 신은 이 세계의 외부에 있고, 이제까지 우리에게 야훼로 숭배받던 자는 악마일 뿐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부정해, 육신의 껍질을 벗고, 세계의 외부에서 진정한 신과 합일해야 한다. 사악한 데미우르고스를 넘어, 일자(THE ONE)에게로.

그들은 그 생각을 실천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들은 세계의 근본구조를 부정해 완전한 무로 돌리려고 했다고 한다. 그들을 막기 위해 많은 이들이 움직였다. 그것은 장대하고 처절한 전투였다고 한다. 그노시스트는 구속되지 않는 상상력으로 그 어떤 세력의 술법보다도 강대한 힘을 구사했다. 그들의 상상력이 가지는 힘은 불교의 것 조차도 능가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는 강인함에서는 불교의 것과 같았지만, 그들은 불교의 방법론을 근간에 둔 술법이 가지지 못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힘이란 외부에 대한 갈망과 실천이었다. 연기법에 근거를 두고 인식과 고통의 문제를 탐구하기에 개인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고, 그것을 넘어선 외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통합된 원리가 있다기 보다 각성한 개개인의 자유에 실천의 방식이 넘기는 불교의 술법과 달리, 그노시트의 반성은 결국 모두 외부를 바꾸고, 타자를 바꾸어야 한다는, 극히 실천적이고 거의 강압적이기까지 한 목표를 이미 대전제로 품고 있었다.

상상력의 힘과 규모는 같더라도, 그 상상력의 목표가 개인인 것과, 처음부터 개인은 안중에도 없이 세계를 노리는 것은, 외부에서 충돌해야 한다면 후자 쪽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계가 멸망 일보 직전까지 가고서야 겨우 그들을 절멸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경험을 기반으로 이 세계에서는 긴 시간동안 외부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더욱 확실하게 암약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져 지금의 시스템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옳았다. 상상력이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그곳에 가 닿는 상상력이 겨우 삶을 부정하거나 파괴할 뿐인 그런 영역이 있다. 일에 일을 더해 이가 되게 하는 시스템을 증명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삶의 영역이 있었다. 그곳을 향해, 강대한 상상력을 들이대어서는 안 되었다. 그곳을 향해 상상력을 들이댈 때, 그노시스트가 했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모든 외부를, 모든 타자를 부정하는 가장 강대한 주체가 그곳에 들어선다. 세계의 근본을 부정할 때, 인정될 수 있는 외부는 존재하지 않고, 외부가 없는 곳에, 남는 것은 주체일 뿐이니까. 이는 개인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를 향하는 상상력이 닿을 수 있는 최악의, 그러나 논리적인 모습이다.

그러니까, 다시 생각하더라도 아버지는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이 그들의 에피스테메를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은 그들의 세계를 부정하라는 말과 같았으니까. 그들의 축명제를 부정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으니까. 의심해도 아무런 소용없는, 그런 영역을 부정하라는 말이었으니까.

다시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을, ‘지금 이 관계’를, ‘지금 이 세계’를 부정할 수 있는 상상력이 아니고서 미래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갇힌 윤리가 과연 진장한 혁신에 가 닿을 수 있단 말인가. 본질보다 앞서는 실존으로 지금 올바르고 당연한 것들에 의혹의 시선을 던지지 않고서 어떻게.

은결은 고통을 느낀다. 무지가 상상력의 한없는 개방을 요구함에도, 다시 무지가 상상력의 한없는 개방을 부정하는 이 세계의 구조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결국 무지와 상상력의 관계 사이에 남아 있는 올바른 하나의 정답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노시스트와의 전투는, 심지어, 타자를 받아들여야 하기에 상상력을 제한해야 하고, 타자를 받아들여야 하기에 상상력을 부정해야 한다는, 기막힌 결론으로 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어디에도 없는 곳을 찾아야---

“(...괜찮아?)”

은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다. 눈앞에 걱정 어린 눈길이 보였다. 약간 날카로우면서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얼굴의 소녀다. 그는 이 소녀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쿠로사카 유리에다. 은결은 ‘괜찮다.’고 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중력의 속박이 믿을 수 없이 무거웠다. 자신의 생각에 집중해 있는 사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던 모양이다. 혼탁한 이명이 잉잉거렸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속의 것을 게워내고 싶도록 구토감은 강렬했다. 은결은 후들거리면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쉬어.)”

은결이 겨우 몸을 일으킬 즈음 하여, 강한 결의를 담은 목소리로 쿠로사카는 그에게 말했다. 명령에 가까운 어조였다. 은결은 공포에 벌벌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착한 강아지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은결을 보고, “(좋아.)” 하고 쿠로사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너, 오늘 되게 재수 없다.”

밥을 한 숫갈 떠먹고, 민성이 여우를 향해 말했다. 고릴라와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결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오늘 여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아침부터 괜히 실실 웃었다. 한국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미친년 널뛰는 표정 같았다. 여우는 오만하게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후, 너 같은 패배자와 같은 취급을 하지 않아 줬으면 해.”

“뭣이!”

“말하나 제대로 붙이지 못해 건덕지 만들려고 취미에 없는 책까지 읽고 있는 너와는 달리 이 몸은 다음 주에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다는 말씀.”

일동 가운데 벼락이 내려쳤다. 여우의 이 말에는 은결도 솔직히 놀랐다. 민성은 조심스럽게 물음을 건냈다.

“사, 상대는?”

“전에도 이야기 했던 이리세.”

여우는 담백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은결을 봤다. 은결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우는 그의 얼굴에서 기쁨에 닮은 감정을 느꼈다. 은결은 이내 놀랐던 표정을 정리하고 선의에 찬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알게 된지 얼마 되진 않지만 그녀는 선량하고 뛰어난, 무척이나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느꼈어. 잘 지내봐.”

“그럴, 생각이야.”

은결의 말에 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결의 말을 긍정하는 그의 표정은, 그러나 희끄무레한 석연찮음을 품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릴라와 여우가 차례로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리세라면, 거 뭐시냐, 여자 은결이라던 그 여자애 아냐?”

“너 전에 그 여자애가 너 좋아하는 것 같지만 네 취향은 아니라고 했잖아.”

여우는 볼을 애매하게 긁었다. 확실히 그러했다.

“여자 은결이라고 마음에 안 들 이유는 없지. 은결만큼 아는 게 많으면 대화 거리도 풍성한 법이고. 그리고 취향 같은 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거 아냐. 이리세가 보기 싫은 얼굴인 것도 아니고, 어느 쪽이냐 하면 귀여운 얼굴이란 말야.”

“여우 말이 맞아. 이리세는 여성으로서도 무척 매력적이야. 아마 내가 여자친구가 없었더라면 먼저 교제신청을 했을지도 몰라.”

은결이 동조하며 말했다. 말하고 나서, 그는 영문을 모를 살기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등 뒤에서 날아온 것 같은데, 쿠로사카가 괜히 시비를 걸 이유도 없으니 아마 착각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한번 쓰러지지 않았던가. 그 후유증이리라. 은결은 스스로 납득했다. 여우는 은결의 그 말을 듣고 은밀한 기쁨을 느끼며 가슴을 폈다.

“음, 뭐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지만.”

“그래도 ‘여자 은결’이라고까지 평해질 정도면 같이 얘기하기 좀 부담스럽지 않냐. 나는 무식해요. 하고 광고하는 꼴이 될 텐데. 어른하고 애하고 대화하는 꼴이잖아.”

늑대가 석연치 않다는 듯 말했다.

“농담도.”

하지만 은결은 그의 의견에 웃으면서 손을 내 저었다. 여우는 그를 보면서 쓰게 속으로 생각했다. ‘농담이 아냐.’ 네가 서 있는 그토록 높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모습이 단지 아름답듯이.

*감상주신 천하객님 감사.

*이리세 파트 끝나면 이 글도 거의 종결붑니다.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이 글은 출판되었을 시 해 보고 싶었던 매우매우매우 원대한 꿈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제가 이 글을 출판해 받는 모든 인세의 7할 정도는 좋은 일을 하는데 기탁하고 싶다는 것이었죠. 그중 절반은 라파엘의 집과 같은 곳의 운영비로, 나머지 절반은 다른 곳도 좋지만 서준식씨나 김규항씨를 돕는데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은, 이 글이 품고 있는 이념을 작자 스스로가 배신하지 않고, 텍스트가 텍스트로만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난 화에 리플이 적어서 실망! 리플을 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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