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07화 (207/300)

#   208-희망을 위한 찬가 -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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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 서서 쿠로사카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은 ‘마음’ 이다. 은결은 이 소설을 ‘시선’에 관한 걸작이라고 말했다. 몇 번째 읽고 있는 것이더라? 3번을 넘어가면서, 수를 헤아리는 것은 그만뒀다. 대신에, 그저 책에 집중했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부글부글...

그녀의 앞에 올려진 뚝배기에서 거품이 끓어오르며 소리를 냈다. 쿠로사카는 책을 덮고 준비했던 조미료를 몸이 기억한 분량만큼 덜어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수저로 뚝배기의 내용물을 조심스레 둘려 잘 섞이도록 도왔다. 오늘 은결에게서 배운 대로였다. 그러면서 쿠로사카는 다시 소설을 생각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그러면, 은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그러면, 그를 위해 작은 한 마디를 해 줄 수 있겠지. 텍스트에 텍스트를 겹쳐 읽으며, 그 텍스트의 끝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명료하게 이해하면서, 그래도 텍스트를 버리지 못하는 그 소년을 위하여. 쿠로사카는 수저에 음식을 떠서 맛을 봤다.

“음.”

어제보다 훨씬 나아졌다.

쿠로사카와 마찬가지로, 은결은 집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익숙한 손길이 요리 위를 오가고, 이미 부엌의 대기는 식욕을 돋우는 달콤함에 흠뻑 젖었다. 그는 요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오늘 옥상에서 쿠로사카가 보여주었던 태도를 되새긴다.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

그녀가 하려던 말은 성적에 대한 것과 상관이 있었던 것일까? 농담처럼 그저 지나가던 말이 아니라. 하지만 은결은 왜 굳이 그녀가 다시 그 문제를 꺼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입장은 그녀도 잘 알 것이면서.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까지의 시기에서 성적이란 상상력을 허용하지 않는 타자의 체계다. 그것은 절대적이다. 성적이란 단순히 누가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는 문제를 넘어서서, 계급의 직접적인 재생산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게임은 완벽한 제로섬이다. 누군가 승리한다면 누군가 반드시 패배해야 한다. ‘윈-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적이 더 좋은 이들은 압도적인 비율로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은결은 그런 체계를 혐오한다. 이러한 체계에서는 반 친구의 노트를 주저 없이 훔쳐 찢은 다음 소각로에 버리는 일이 당연하게 일어날 수 있다.

“후우.”

지난주에도 교과서를 잃어버렸다고 미래가 신경질을 냈던 걸 생각하며 은결은 한숨을 쉬었다. 성적을 통해 자본이 수행하는 계급재생산이란 이 게임은 끔찍하다. 장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을 위해 잃어야 하는 가치들이 너무 크다. 하지만 사회에 부드럽게 융합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그럴듯한 신분이 필요하고, 기차의 레일 위를 달려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은결이 현행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유일한 이유다. 그렇지 않았다면 은결에게 굳이 학교에 다닐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는 사실 지금까지 학교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시간낭비라고까지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변했나.’

민성, 고릴라, 늑대, 여우, 쿠로사카를 비롯한 지인들이 지금은 학교에 있으니까. 은결을 그들을 생각하며 슬몃 웃는다. 마음이 달콤해진다. 사소하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며 그들과 함께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즐거웠으니까. 이제는 학교에 가는 것이 시간낭비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사소함이 마음에 녹아들어 그러한 아릿함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그토록 시시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그토록 사소한 마음을 나누면서.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경험해 본 것은 요 반년 정도간의 일이다.

“----”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은결은 이 게임에 참여하면서 승리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기꺼이 패배자를 연출할 수도 없었다. 은결은 과거에, 패배자를 연출했을 때의 참혹한 결과를 보았다. 패배자를 중심으로 저열한 주인 되기를 맛보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은결을 괴롭히며, 타자화를 지속하면서 자신들의 결속을 강화했다. 칼 슈미트, ‘적과 동지의 구분’ 은결은 결국 물리력으로 그 구조를 파괴했다. 이후로 은결은 패배자의 연출조차도, 희생양의 역할로서 게임에 협력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미묘한 위치에 자신을 세워두고 연출하고 있다. ‘나는 너보다 그렇게 우월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너보다 그렇게 못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나를 질시하지도, 나를 깔보지도 마라.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주인도, 노예도 피해서.

‘나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쿠로사카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은결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는 상상력의 부족을 느꼈다. 요리나 해야지. 은결은 마음을 굳힌다.

학원의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가는 여우의 뇌리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져 있었다. 은결이다. 여우는 은결이 대단하다고 느낀다. 그가 대단하다는 것은 부정 불가능한 것 같았다. 같은 것을 알고, 같은 것을 보면서도, 은결은 훨씬 더 넓게, 훨씬 더 깊게 본다. 여우는 근처의 의자를 빼고 그 책상에 앉았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들려온 목소리에 여우는 고개를 돌린다. 소녀의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여우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이름은 독특하다. ‘이리세’ 마치 어딘가 외국인의 이름인 것 같지만, 그녀의 이름은 엄연한 한국어다. 하지만 이름보다 독특한 것은 그녀의 지성이다. 또래의 평균적인 지적능력을 가소롭게 뛰어넘는 교양. 그녀에게서는 아우라 같은 것이 느껴진다. 여우가 알고 있는 은결에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지성이다.

“아니, 별 거 아냐.”

“흐응- 굉장히 무거운 얼굴이기에 뭔가 했더니. 김새네.”

“별걸 가지고 다 김이 샌다.”

가볍게 웃으며 여우는 그녀의 말에 답한다. 마음을 치고 올라오는 절그럭거림이, 동시에 느껴졌다. 여우는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넌 은결이 하고 계속 연락하고 있어?”

“응.”

“흐응. 재밌는 모양이네.”

“응. 재밌어.”

“어련하실까.”

“후후. 너와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

여우는 다시 가슴의 절그럭거림을 느낀다. 그것은 분출과도 닮았다. 이리세는 은결만큼 대단하다. 그녀는 은결과 어깨를 마주한다. 여우는 성급한 충동에 떠밀려 입을 연다.

“저기, 다음 주말에 시간 있어?”

“다음 주말? 빈 시간이야 있지만 왜?”

이리세는 가볍게 답한다. 그녀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며, 여우는 잠시 망설였다가 말한다.

“함께 놀러가지 않겠어?”

이리세는 잠깐 생각한다. 그리고 이내 환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은결의 얼굴은 황금비에 잘 맞춰져 있어서 억 소리 나는건 아니라도 꽤 미남입니다.

*은결이 성적을 연출하는 것은 타자를 노리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타인이 어떤 감정을 품지 않도록. 자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리적 이기주의 이론에 따르면 그것도 다 자기만족을 위한 거지만 그런 입장에서는 자기만족을 위한게 아닌 게 없기 때문에 따지는 게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성적의 승패를 토론의 승패와는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수치로 나타는 성적의 승패는 제로섬 게임이지만, 토론은 윈-윈으로 귀결하는 게 가능하죠. 은결은 승패를 노리고 토론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도덕적 고양과 정보의 공유, 수정이 목표죠. 그 전에 은결은 이 글에서 토론이라 할 만한 걸 거의 못 해본 것 같습니다만...(...) 강의는 많이 했지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의 모순이 글의 모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캐릭터에게 모순이 있다면, 좋은 글에서 그건 흔히 글을 위한 장치죠.

모범적인 캐릭터 간의 논쟁이나 토론은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 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글의 캐릭터는 지적으로 좀 균등한 편이었기 때문에 누가 입 열었다고 셔터 마우스! 이런 사태가 없었음. 무식한(...) 데일이 입으로도 제일 큰 활약을 한 것처럼.

*서브라임 4권은, 열심히 적고 있습니다. 아씨. -_-;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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