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06화 (206/300)

#   207-희망을 위한 찬가 -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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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에도 일당은 은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런두런 각종 화제를 건드리던 중에 여우가 폭탄을 터드렸다.

“그런데 말야, 은결 너는 왜 성적이 별로 안 좋을까?”

“뭐어- 안 좋을 수도 있는 거지.”

은결은 애매한 얼굴로 답했다. 고릴라가 공감한다는 얼굴로 옆구리를 치고 들어왔다.

“그거, 나도 평소에 좀 갭을 느꼈지. 은결 너는 이상하게 성적이 안 좋아. 하는 말만 들어보면 은결 앞에서는 선생들도 다 캐버로운데. 철학을 좋아해서 그런가.”

“사실, 좀 그런 느낌이 있지?”

늑대가 동조했다. 민성도 고개를 끄덕이며 제 할 말을 했다.

“좋게 말해서 기인이고, 나쁘게 말해서 입만 살았지. 너 별로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애들 가운데는 그래서 싫다는 애들이 많을걸. 실속 없이 입만 살았다는 식으로 말야. 같이 붙어지낸 시간이 긴 우리야 전자라는 걸 알지만, 그렇지 못한 애들은 대게 후자겠지. 뭐 인터넷 시대가 증명하듯이, 사람이란 게 보통 다른 사람을 까내리고 싶어 안달인 법 아니겠냐.”

“큼.”

은결은 할 말이 없었다. 화제를 꺼냈던 여우가 이야기를 정리한다는 의미로 핵심으로 찌르고 들어왔다.

“그런 것도 그렇고, 그 보다는 현실론으로 돌아가서, 평소 네가 읽는 그런 책들도 좋지만, 이제 곧 고3이고 하니, 성적에 신경 쓰는 게 어때?”

“음, 충고 고마워.”

은결은 그저 그렇게 답했다. 여우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은결은 여우의 말에서 고마움을 느낀다. 사정을 모르는 그는 정말로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해 주는 것일테니까. 여우는 말을 거기서 끝내지 않고 진지한 어조로 뒷말을 이었다.

“빈말이 아니고, 네가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한다면 곧 성적이 많이 오를 거야. 보증해.”

여우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은결의 앎은 어느 것 하나 거짓이 없었고, 어느 것 하나 허세가 없었다. 그의 말은, 비록 이상하게 들릴 지라도 사실은 모두 엄격한 말이었다. 그의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앎이 부족하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런 은결이 제대로 학교 공부를 한다면, 지금 성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우는 생각, 한다. 그쪽이...

“그럴까?”

“그래. 그리고 내가 전에 어떤 글에서 봤는데, 사람은 대부분 똑같은 말을 들어도 그 사람이 달고 있는 명함에 따라서 달리 반응한데. 네가 아무리 올바른 소리를 해도 네 명함이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을 거야.”

“그렇지.”

은결은 고개를 끄덕인다. 여우가 말한 것 처럼 대부분의 인간은 권위에 약하다. 그래서 현실은 진실보다 강하며, 외형은 본질보다 선명하고, 교환가치는 사용가치보다 중요하다.

“그러니까 말야-”

여우는 화제를 계속 이끌어 나가려고 했다. 은결은 자신의 성적 문제가 계속 화제의 중심에 오르는 것이 불편했다. 사실 성적이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이겼다던가, 졌다던가 하는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다루는 영역이다. 은결은 그런 주제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명백하게 ‘싫어’한다. 더구나 자신의 성적은 연출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거짓이다.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과장된 몸짓을 선보이며 은결은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여우가 말한 ‘사람은 권위에 약하다’는 그거 말야, 이기적 유전자 이론으로 어렵지 않게 해석해서 이해할 수 있어. 어때? 들어보지 않을래? 꽤 재밌거든.”

말은 ‘들어보지 않을래?’ 였지만, 태도는 ‘들어라!’였다. 은결답지 않게 강한 태도였다. 주변에서 흥미를 보이기도 해서, 계속 잔소리를 이어 나가려던 여우는 그만 말의 맥을 잃었다. 사실, 그도 은결의 이야기에 흥미가 있었다. 특히, 사태를 통합해서 이해한다는 것이.

“이기적 유전자는 생물의 진화를 효율성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어. 거기 맞춰 보면 돼. 이 모델에 맞춰 인식의 문제를 파악하자면, 진화의 목적은 진실한 인식이 아냐. 그것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효율적인 인식이지. 유전자의 차원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인식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면, 인식자체는 설령 환상이라도 상관없는 거야. 물론, 환상을 진실로 착각하는 인식능력으로 승리자가 될 수는 없겠지. 그러니까 진화과정에서 인식이 도달하게 되는 지점은 최소비용으로 가능한 정확한 인식을 얻어낸다는, 가격대 효율의 문제가 될 거야. 여기서 바로 인간이 권위에 약해진 이유를 추론할 수 있는 거지.”

은결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우는 속으로 아아, 하는 감탄성을 흘렸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분리되었던 두 사태가, 은결의 이야기 가운데 부드럽게 하나로 맞물리고 있었다.

“정확한 인식을 위해서는 물론 가능한 여러 가지를 의심해보고, 스스로 직접 확인해야 하겠지만, 그건 너무 비싼 비용을 필요로 하는 거야. 그래서야 경쟁자보다 더 정확히 인식을 하더라도 소용이 없지. 그래서 사람은 진화 과정에서 권위에 기댄 의견에 상당히 약한 경향성을 가지도록 설정되어 있는 거야. 그것이 정확한 의견을 더 싼 비용으로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지.”

은결은 계속 말한다. 여우는 생각한다. ‘이럴 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알고 있었음에도 은결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마음의 한 구석을 치고 올라오는 어떤 덩어리를 느끼게 한다. 절그럭, 절그럭, 무겁게 부딪히는 그 덩어리.

“왜냐하면 ‘권위’란 사회적 약속이 만들어낸 기호가 담지 하는 기의의 한 차원이기 마련인데, 사람은 사회를 구성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거든. 인류란 결국 팃폴텟 전략의 산물이니까.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호의 권위를 신뢰함으로서 얻게 되는 정보는, 비교적 싸면서도 정확하기 쉬운 거지. 목적론적으로 들릴 우려를 각오하고 이야기 한다면, 빨리, 많이, 싸게, 확실한 정보를. 이것이 인식능력이 진화의 과정에서 추구한 것이니까. 어때? 이기적 유전자는 정말 강력한 이론적 틀이지 않아? 나는 이 이론 틀에서 거의 아름다움까지 느꼈는데. 물론-”

말을 이으려던 은결은 입을 다문다. 그 다음 은결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비용의 문제를 제치더라도 권위에 기댄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였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면 이야기가 너무 깊어지고, 어려워진다. 어차피 이야기를 꺼낸 목적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데 있었고, 그것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은결은 말의 끝을 “-아무 것도 아냐.” 라고 어설프게 맺고 어깨를 으쓱였다.

“호오. 신기해라. 그게 다 그렇게 연결되는 거군.”

은결이 이야기를 끝내자, 고릴라가 조금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굴의 우상이니, 극장의 우상이니 해서 권위에 기대는 걸 비판하는 것만 맨날 들었는데, 은결이 이야기 하는 것 듣자니, 그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권위에 기대는 것도 나름의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런 성향을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거라지 않는가!

“그래. 뭐 이 외에도 사회적 존재로서, 타인과 교류해야 한다는 문제가 지위와 계급에 대한 순종적 태도를 우리의 본능에 박아놓았을 가능성도 있을 테니, 인식의 차원에서만 깨끗하게 잘라 말할 수만은 없겠지만. 그리고 사실 이런 건 학의 문제만이 아냐. 세상의 모든 문제가 꽤 많이 연결되어 있지. 한없이 복잡하지만, 동시에 의외로 단순하다고 할까. 마치, 나와 너와 우리는 모두 독특한 개인이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인류이듯이 말야.”

은결의 말을 들으며 여우는 생각한다. 나는 왜 저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훨씬 더 성적도 위에 있으면서. 가까운 곳에서 일당의 대화를 듣던 쿠로사카는 여우의 모습을 보면서 한 권의 책을 떠올린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다. 또 다시, 마음 가운데 절그럭 거리는 덩어리와 함께 읽고 있는 소설이다.

“(고마워.)”

점심시간, 옥상에서 쿠로사카는 은결에게 사의를 표한다. 그녀는 손을 쥐락펴락 하며 방금 전의 감각을 몸에 새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방금 전, 은결에게 요리에 사용할 조미료의 적정량을 배웠기 때문이다. 은결이 바닥의 돌조각을 뜯어내 손 위에 정확한 단위로 올려 주었다.

거리나 시간측정은 전투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작심하면 마이크론 단위까지, 키리야미를 해방하면 나노단위의 정밀도로 움직일 수 있지만, 무게는 별로 신경 쓸 일이 없다보니 익숙하지 못했고, 덕분에 지난번 요리를 만들 때 조금 곤란을 겪었다. 무게를 정확히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당장 은결만큼 맛있게 만들 리는 없겠지만, 레시피도 자세하게 업그레이드 했으니 꽤 괜찮은 음식이 가능해 지리라. 토요일 정도면 그 아이에게 좋은 식사를 대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냐. 뭘 이런 걸 가지고. 아, 그리고 할아버지가 네게 언제 한 번 가게로 찾아오라고 하시던데.)”

“(너희 할아버지가?)”

쿠로사카가 조금 놀란 얼굴로 확인 차 되물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제 할아버지에게서 쿠로사카가 언제든 한번 가게에 들렸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응. 뭐 평소에 내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기도 하니,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 주고 싶으신 모양이지.)”

“(음.)”

쿠로사카는 언제 한 번 찾아뵈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수행의 아버지는 수행만큼은 아니지만 아들 때문이 아니라도 어디서든 인정받는 사람이다. 실력과 성품, 어느 것이든 흠잡기 힘들다. 그렇지 않다면 미즈하라와 같이 깐깐하고 뒤틀린 사람과 친분을 지금껏 유지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쿠로사카는 문득 생각이 난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너, 커밍아웃 하는 게 어때?)”

“(커밍아웃?)”

“(그래. 성적 가지고 장난치는 거 말야. 갑자기 전교 1등이라도 하면 주변에서 의심할테니, 조금씩 올려. 내년 기말까지 기간을 잡고 올리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겠지. 그냥 봐 주기엔 너무 특이해. 덕분에 오늘 아침에도 화제가 됐잖아.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장난 따위, 치지 않았어.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아도, 거기에 목매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내게는 하찮아도, 그것 때문에 인생이 좌우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어. 그들을 모멸하고 싶지 않아. 나는 진지하게 지금 성적을 연출하는 거야.)”

은결은 엄숙하게 답했다. 주인이 되고 싶지 않기에. 노예가 되고 싶지 않기에. 누군가 자신에게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얕보지 못하도록. 주인으로서도 노예로서도, 타자의 자유를 자신이 제약하지 않도록.

물론 그것은 이상(理想)이다. 기표와 기의가 영원히 일치되지 않듯이, 그 이상도 영원히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 다니고, 사회 가운데 있는 다면, 그러한 질곡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이상에 접근한 위치는 있으리라. 은결은 그러한 이상에 가까운 위치에서 자신을 연출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뚜렷한 특이성은 은결이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교류를 하지 않은 기간이 너무 길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의 무게에 짓눌려 아등바등거리는 흔적이 겹친 때문이다.

“(장난이라고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나는 역시...)”

은결의 엄숙한 태도에 쿠로사카는 사과한다. 그렇지만 자신도 쉽게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름 방학 때 해변에서, 그리고, 여름 방학이 있기 얼마 전에, 옥상에서. 그때, 은결과 자신은... 쿠로사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낀다. 뜨거운 혈류의 흐름에 볼을 붉어지려 한다. 그녀는 결국 더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아냐. 그만두자.)”

이어질 말을 기다리던 은결은 쿠로사카가 맥없이 물러서자 조금 미안함을 느꼈다. 차갑게 보이고, 실제로 냉혹한 구석이 많지만, 그래도 그녀가 잔정이 많다고, 은결은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쿠로사카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이야기는 고마워. 역시 올해는 너를 알게 된 게 가장 행운인 것 같아. 이런 이야기를 또래와 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때가 오리란 건, 작년에는 정말 상상도 못했었거든.)”

티 없이 웃는 은결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쿠로사카는 순간적으로 생각해 버렸다. 꿀꿀한 이미지만 맨날 겹쳐서 생각하다보니 잘 의식하지 못하는데, 정리된 얼굴로 웃어 보일 때, 은결은 확실히 미소년인 것 같다.

*오리너군님의 추석선물 잘 받았습니다. ㅋㅋ

*일에 일이 더하면 이가 되는 건 증명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번화의 이야기는 일에 일을 더하면 이가 되도록 하는 시스템 자체가 옳다는 것은 증명 불가능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틀렸다고 증명하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세계는 옳음과 그름이라는 증명 가능성을 벗어난 것이니까요. 그것은 축명제입니다. 확실성의 한계죠.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시스템의 올바름을 집합을 통해 증명하려고 무던히 애를 써서 자기들 두 사람만 읽을 수 있는(...) 수학의 원리라는 책을 썼는데, 괴델 덕분에 박살났다고 하는 슬픈 일화가 있습니다.

*이 글이 어렵다고 여기시는 분들은 지금은 비록 그렇더라도, 이 글이 완결되고, 그리고 시간이 흐른 다음, 언제고 다시 돌이켜 생각하시면 아아, 사실 참 명쾌한 글이었구나! 하고 생각하시는 날이 올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음!

*사설을 쓰기 위해 참조된 책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 세계화의 덫, 경제발전이 안 되면 우리는 불행할 것인가?. 불타는 세계, 쾌도난마 한국경제, 주식회사 대한민국, 국가의 역할, 아탁, 시장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트랜스크리틱, 자유로부터의 도피,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를 비롯해서 이것저것 있습니다. 그 외에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이런 책들의 개념을 조립하기 위한 도구를 마련하게 위해 사용한 책도 몇 있습니다.

*추석 잘 보내세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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