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희망을 위한 찬가 -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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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마치고, 여느 때와 같이 학원으로 가는 길에, 여우는 은결을 생각했다. 그와 했던 대화를 되새겼다. 역시 은결은 대단했다. 그와 이야기 하는 것은 즐거웠다. 은결과의 이야기를 하나씩 끝날 때면 눈앞의 세계는 틀림없이 아무 것도 별반 변한 것이 없을 것임에도 어딘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사소했던 것들이 중대하게 보이고, 무의미해 보였던 것들이 의미를 가지고 빛난다. 버려진 것이 없는 세계의 모습, 같은 것이 느껴진다.
‘기게스의 반지라...’
오늘 은결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는 이 이야기가 선할 이유가 없을 때, 인간은 왜 선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했다. 초월적인 선을 가정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 있고, 그로 인해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면, 선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정의라. 그런 게 있으면 좋겠지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리세의 말이 기억났다. 그녀는 절대적인 정의는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인 정의와 기게스의 반지라... 어딘가 연결되는 것 같았다. 은결처럼 이해하고 싶었다. 여우는 끙끙대며 생각을 이어 그것을 논리로 바꾸어 보려 했다. 하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다. 절그럭 거리며 충돌하기만 하는 것 같다.
“하아. 은결도 아니고, 그렇게 잘 될리 없겠지.”
여우는 머리를 긁었다. 다시, 은결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리세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저렇게나 대단한데-- 여우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물기 시작하는 해는 도심의 먼지를 빨아들여 붉게 토해내고 있다. 그 하늘을 눈에 담으며 여우는 생각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은결보다 훨씬 성적이 좋은걸. 나는 은결보다 좋은 대학에 갈 거야. 장래에, 연봉도 훨씬 더 높겠지.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 그래서 더 좋은 삶.
“......”
여우는 다시 걸었다. 걸으면서, 다시 아침에 은결과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기게스의 반지 이외에도 상상력이니, 비윤리적인 예술이 진정 윤리적인 예술이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것들이 어떻게 이어지는 것인지 여우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에 들었던 많은 은결의 이야기들은, 어느 것 하나 어떻게 이어지는 것인지 자신으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안다.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다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모를 뿐이다.
“......”
그래도, 그런 것들은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몰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알아봐야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은결의 성적이 보여주고 있듯이. 사실은, 그런 정도의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것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리고 올바른 것은 얼마나 더 좋은 성적을 받아내어, 얼마나 더 좋은 대학에 가는가, 하는 문제다. 여기에 다른 종류의 생각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올바른 생각이다. 더 나은 성적, 더 나은 대학, 더 나은 삶. 여기서 더 나간 생각 따위는 허용될 수 없었다. 이건 일에다 일을 더하면 이가 된다는 것과 같은 생각이었다. 일 더하기 일이 삼이 될 수 없듯이, 더 나은 성적, 더 나은 대학, 더 나은 삶이란 도식은 흠결 없이 완전했다. 다른 도식은 존재할 수 없거나 오류에 불과했다. 그래서 다른 도식이나 삶 ‘상상’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여우는 그렇게 생각한다.
“......”
여우는 걸었다.
저녁에, 집에서, 쿠로사카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그릇에 수저를 넣어 국물을 조금 들어내어 간을 봤다. 그녀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맛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거에 은결이 만들어 주었던 걸 생각하면 이건 당장 쓰레기통에 들어가도 부족하지 않았다. 지금 이 음식이, 과거 은결이 만들어 주었던 그 음식과 같은 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음식과 이 음식은 전혀 다른 것 같았다. 상상력의 극한에서야, 그 사실은 겨우 이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은결이 만들었던 그 음식이 쿠로사카 자신이 지금 만들고 있는 음식이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음...”
역시 안 하던 짓은 하는 게 아니다. 라고, 쿠로사카는 살짝 후회했다. 하지만 인스턴트 아니면 사다 먹는 것도 질릴 지경이다. 더구나 한국의 음식가게는 대부분 간을 강하게 하는 탓에 주로 담백하게 먹어오던 그녀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방학 때 은결에게 배운 것도 있고, 그걸 어떻게든 시련해 보려는 것인데 쉽지 않았다. 어떤 타이밍에, 어떤 간을, 어떤 양으로 넣어야 하는지, 종이에 적은 것만으로는 역시 잘 알 수 없었다. 직접 은결이 손위에 재료나 조미료를 올려주면 그걸 기준으로 몸으로 기억해 버리면 되지만, 그건 아니었으니까. 다음에 기회를 봐서 자세하게 묻던가, 아니면 직접 가르쳐 달라고 해야 하겠다. 이래선 재료도 재료지만, 기껏 산 식기도 아까웠다. 쿠로사카는 자그마한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베란다 쪽으로 걸었다. 저물어 가는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 뒤에 다시 은결을 만날 것이다.
‘상상력이라...’
오늘 옥상에서 그는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리를 알 수 없는 인간은 제한 없는 상상력으로 지금 이 순간을 언제든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일견 용납할 수 없도록 부도덕하게 보이는 예술의 장면들이 언젠가 진정 윤리적인 것이 되어 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상력에 대한 그의 말은 멀고도 아름다웠다. 멀기 때문에 아름다운지, 아름답기 때문에 먼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녀는 은결의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제한하는 상식을 무수히 가지고 있고, 그것들 중에는 감히 범하는 상상조차 불경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것들을, 강인한 상상력으로 부정하는 일 따위는, 감히 할 수 없었다. 쿠로사카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손이다. 오래도록 검을 쥔 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손.
‘...이걸 최종 기호로 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지?’
은결의 아버지 수행은 위대한 거인이다. 그가 죽고 난 뒤에 몇 년이 지나야 인류는 그와 같은 천재를 다시 맞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위대한 거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위대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대부분의 이들이 그를 경원한다. 어쩌면 그가 경원당한 것은, 그래서 몰락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와 같은 이들에게 부정해선 안 될 것을 부정할 수 있다고 담담히 이야기하니까. 두려움 없이 수행과 이야기 할 수 있는 이들은 불교의 고승들 정도일 것이다. 쿠로사카는 생각을 접었다.
“(그나저나 만들어 먹는 것도 쉽지는 않군... 기껏 만들어도 입이 하나라는 것도 그렇고.)”
가능한 적게 만들려고 했지만, 시작하고 보니 역시 두 사람은 간단히 먹을 만한 분량이었다. 적지 않게 음식이 남을 것 같았다. 거기다 먹고 난 다음 일일이 설거지를 하고, 정리하는 것도 비효율적인 것 같았다.
‘음, 학교가 급식이었다면 다음날 도시락을 만들거나 하는데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고 보면 이왕 좀 싸 들고 가는 것, 은결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구해볼 수도--- 생각을 거기까지 하고 쿠로사카는 자신의 생각에 경악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베란다 아래쪽을 내려다 봤다. 어두워진 길을 달리는 많은 차들이 보였고, 낮에는 시끄러웠을 놀이터가 지금은 몇 안되는 아이들과 함께 조용했다.
“?”
놀이터에서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예전에 자신이 도와준 적이 있던 아이였다.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가, 일전에는 직접 다른 아이를 괴롭히고 있던, 그 아이였다. 혼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쓸쓸해보였다. 아이와 했던 이야기를 되새겨 보자면, 아마 아이의 어머니는 어딘가에서 피곤하게 일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파트타임 직종일 것이다. 그나마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빼앗기곤 한다고 한다.
“......”
쿠로사카는 이번 주 내로 은결에게 음식을 제대로 배워서, 저 아이를 대접해 보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저 아이가 처한 현실은 은결이 말했던 것처럼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겠지만, 그래서 섣불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겠지만,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저 아이가 살도록 하는 음식은 오로지 저 아이가 직접 먹는 음식일테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일기를 오래도록 쓰는 사람은 쓰다가 빼먹으면 아주 찝찝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뭐든지 매일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날 그걸 빼먹을시 기분이 안 좋죠. 초조해지고. 지금 제가 글 쓰는 모습이 딱 그렇습니다. ‘쓰고 싶다!’ 가 저를 이끄는 게 아니라, ‘써야 한다!’ 가 저를 이끌고 있습니다. 아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작심하고 좀 놀면 고쳐질까요?
*이 글은 일반적인 활극물과는 성격이 다른 글이라서 관념의 진행 자체도 시나리오의 일부로 보셔야 합니다. 이 부분이 불충분하면 글의 전체적인 구성이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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