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03화 (203/300)

#   204-희망을 위한 찬가 -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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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사카가 검을 갈무리한다. 방금 대련이 끝났다. 그녀의 그린 듯한 동작을 바라보며 은결은 새삼 깨닫는다. 쿠로사카의 검은 대단하다. 그녀의 검은 빠르고 강하며,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하다. 모순된 가능성이 한 곳에 스며들어, 다양한 상황에 맞추어 감추어진 자신을 발현한다. 형식을 완전히 숙지함으로서, 진정으로 그 형에서 자유로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검기다. 형이라는 뼈대에, 해석이라는 살을 붙여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검. 은결의 시선을 느끼고 쿠로사카가 눈길을 보내왔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그냥, 대단하다고 싶어서. 돌이켜보자니 처음 대련을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네 검이 발전했다는 게 확연히 느껴져서.)”

“(그거, 자기자랑이라는 거 알아? 그렇게 네가 칭찬하는 나는 그간 줄곧 너와 대련해 왔고, 한 번도 네게 진정으로 승기를 잡은 적이 없어. 내가 그렇게 대단하다면, 넌 대체 뭐지?)”

피식 웃으며 쿠로사카가 은결의 말에 응수했다. 은결은 그녀의 응수에 얼굴을 붉혔다.

“(음, 그렇게 되나. 하지만 네 검이 굉장히 발전한건 사실이야.)”

“(그건 나도 인정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 온 이후로 내 검은 일본에 있을 때와 비교하기 힘들만큼 발전했지.)”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검을 생각했다. 형을 세우고, 세워진 형을 응용한다. 역설적으로, 튼튼하게 굳은 형일수록 자연스러운 부드러움이 그곳에서 배어나왔다.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검 놀림이, 지금은 가능하다. 이러한 검, 저러한 검. 쿠로사카는 상상 가운데 펼쳐지는 자신의 광범위한 검에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긴 호흡을 한다. 자신을 넘어선 자신. 그리고 쿠로사카는 코밑을 한번 훔치고 다시 기호 해석에 들어가려는 은결을 멈춰 세웠다.

“(그런데-)”

“(왜?)”

“(아침에 네가 했던 말 말야, 아직 이해가 잘 안 되는 게 있어. 우선 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이론이 상상력을 해방한다는 거야?)”

“(큼, 신경 쓰고 있었어?)”

“(그야, 그런 부분에서 잘리면 아무래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지.)”

쿠로사카는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은결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상상력을 해방한다고 말한 지점에서 곧 선생님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어질 설명을 하지 못했지만, 이후 조회가 끝나고 수업이 끝나고 중간 중간에 생기는 쉬는 시간에 그걸 궁금하다고 다가온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혹시 쿠로사카와 대화하느라 일본어가 섞여 들어간 덕분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뭐라 설명해야 할까... 내가 말한 상상력을 해방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의 의도이진 않을 거야. 도리어 그의 예술관은 상상력을 개방한다기보다 황금률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성립된 세계 같은 것이었겠지. 많은 그리스 조각들이 드러내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같은 건 말야. 그러니까 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상력의 물꼬를 터놓음으로서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논리적 귀결의 종착점이 ‘상상력의 해방’이라는 거지.)”

“(예술의 대상이 현실이 아니라 형상이라는 것에서 어떻게 그런 결과로 이어지는 거지?)”

“(음, 현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야. 현실은 모범이 아니지. 가령 도스도예프스키를 생각해봐. 그는 경이로운 인간이 아니야. 도리어 그는 여러 가지 결점을 안고 있고, 그 결점 가운데 어떤 것들은 경멸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그런 것들이지. 하지만 그런 그의 소설은 경이롭지. 그런 사람에게서 그런 경이가 탄생하는 거야. 또, 미시마 유키오는 어떨까? 인간으로서의 미시마 유키오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지. 하지만 그의 소설은 아름다워. 가슴이 저리도록.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예술이 현실보다 형상에 가깝다는 것은 그런 걸 의미한다고 생각해. 도스도예프스키의 소설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은, 그러니까 예술은, 현실인 그들보다 형상, 이데아에 더 가까운 거지.)”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스도예프스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서라면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위대한 일본’을 외치며 할복자살한 소설가. 쿠로사카는 그의 대표 소설인 금각사를 읽어본 적이 있다. 한숨이 나오도록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예술은 현실보다 형상에 더 가깝다... 금각사를 구성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생각하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쿠로사카가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은결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의 목표는 현실의 복제가 아냐.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술에 단순한 관찰을 넘어, 관조하는 사유가 창작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야. 그런데 예술이 현실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현실을 구성하는 이데아를 목표로 한다고 할 때, 매우 심각한 문제가 한 가지 있어.)”

“(우리가 이데아를 모른다는 것?)”

쿠로사카는 단박에 답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은결의 끄덕임에서 자그마하고 은밀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그래. 우리는 이데아를 모르지. 그러니까, 현실은 어디까지나 부정의 대상일 수 있어. 끝없는 부정은 끝없는 상상력을 요구하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최대한 개인의 상상력을 철저하게 배제하기를 요구하는 고전미학의 이론적 기초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는 상상력의 무한한 개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 우리는 이데아를 모르니까. 어디서 상상을 멈춰도 좋다고 지정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니까.)”

“(...그렇군. 알겠어.)”

“(음,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

은결은 고개를 주억거리는 쿠로사카를 바라보며 만족스레 웃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쿠로사카의 의문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묻고 싶은게 있어. 너는 그 이야기에서 이어서 가장 윤리적인 예술은 가장 비윤리적이라고 말했지. 그건 무슨 말이지?)”

“(에- 그건, 어떻게 설명하면 좋으려나...)”

은결은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표정이다. 저 화상이 아무렇게나 이야기를 꺼냈을 리는 없고, 아마 꽤 복잡한 이야기인 모양이겠다고 생각하며 쿠로사카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곧 은결은 짤막하게 손뼉을 치며 쿠로사카에게 말했다.

“(음, 그러니까, 아, 그래. 이게 좋겠다. 오늘 아침에 민성하고 늑대하고 마이클 잭슨과 비틀즈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위대한 가수인가 운운하며 싸웠었잖아?)”

쿠로사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다. 누가 돈을 더 많이 벌었니, 팬이 더 많니, 그들이 사용하던 물품 가격이 어떻니 하며 두 사람은 시끄럽게 이야기했다. 음악과 그렇게 친하지 않은 쿠로사카로서는 플스가 좋니, 엑스박스가 좋니 하고 싸우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걸까? 은결은 말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가 더 ‘위대’한 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 음악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가 더 상상력이 풍부했던가는 말할 수 있어. 그건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논이지. 그래서 그는 가장 윤리적인 노래를 불렀지.)”

존 레논. 쿠로사카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부인이 일본인인 덕분이다. 오노 요코였던가.

“(내가 아는 한, 마이클 잭슨의 가장 윤리적인 노래를 ‘위 아 더 월드’일 거야. 다른 정상급의 가수들과 함께 가난에 고통 받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노래하는 곡이었지. 무척 좋은 노래라고 생각해. 하지만 여기에는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지. 감상적인 상식이 노래되고 있을 뿐이야. 그 역시도 소중한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시하고 살아가는 가치이지만, 여기에는 도움을 주는 주체의 우월성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있지. 도움 받는 저들은 객체이며 타자일 수밖에 없어. 나는 예술이 이룩할 수 있는 진정한 윤리성은 여기서 더 나간 곳에 있다고 생각해.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이 보여주듯이.)”

은결은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영어를 읊었다.

“Imagine there's no heaven (상상해봐, 천국이 없다고)

It's easy if you try (노력하면 너무 쉬워)

No hell below us (우리 밑에 지옥도 없다고)

Above us only sky (하늘 뿐이라고)

Imagine all the people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Living for today (오늘을 위해 산다고)

Imagine there's no countries (상상해봐, 어떤 국가도 없다고)

It isn't hard to do (그건 어렵지 않아)

Nothing to kill or die for (누구도 그 때문에 죽이거나 죽지 않고)

And no religion too (또 어떤 종교도 없다고)

Imagine all the people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Living life in peace... (평화롭게 산다고)

You may say I'm a dreamer (넌 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지 몰라)

But I'm not the only one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나는 언젠가 네가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그러면 세계는 하나가 되겠지)

Imagine no possessions (상상해봐, 어떤 사유(私有)도 없다고)

I wonder if you can (넌 상상할 수 있을 거야)

No need for greed or hunger (탐욕도 굶주림도 없다고)

A brotherhood of man (모두가 형제라고)

Imagine all the people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Sharing all the world...(세계를 공유한다고)”

쿠로사카는 은결의 말을 침묵하고서 듣는다. 그의 읊조림을 들으며, 쿠로사카는 마음 한 곳의 떨림을 느낀다. 뇌리로 과거의 한 밤이 기억난다. 그 밤에, 은결은 지금과 아스라이 닮은 이야기를, 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누구도 주인이 아니기에, 누구도 노예가 아닌, 그런 손의 이야기... 은결은 읊조림을 끝낸 뒤, 깊게 호흡을 하고 말했다.

“(...이 노래는 모두에게 주체가 되기를 권하고 있어. 특별한 우리가 너희를 도와주는 것이 아냐. 그건 이 노래가 강인한 상상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 대해 고개를 저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 국가를 부정하는 상상력, 종교를 부정하는 상상력, 소유를 부정하는 상상력. 그건 상식이 아냐. 상식이 아니라서 이 상상력 앞에서 몸서리치며 두려워하거나 분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그리고 은결은 살짝 뜸을 들이며 쿠로사카의 눈치를 살폈다. 종교를 부정하는 존 레논의 노래가 혹시 그녀의 심경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을까 저어하는 눈치였다. 쿠로사카는 그것을 눈치 채고 가벼운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결은 안심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상력만이 이데아를 확보하지 못한 우리에게 진정 윤리적인 것에 가까운 것을 이렇게 드러내 줄 수 있는 거야. 상식을 넘어선 윤리 말야. 생각해봐. 한때, 여자는 당연히 남자보다 못한 존재로서 경멸받아야 했고, 노예는 말하는 도구일 뿐인 천박한 것들이었고, 흑인은 쓰레기였어. 세금을 내지 못하는 노동자는 최저임금을 통해 번식을 억제해야 하는 사회의 악이었을 뿐이었고. 그것은 상식이었어. 그 상식을 부정하는 상상력들은 비도덕적인 악이었기에 합법적인 처단의 대상이었고. 하지만 그 악하다며 비판받고 억압받던 생각들이 지금은 어떻게 이야기되지?)”

그렇게 말하며 은결은 왜 아프리카가 지금과 같은 가난의 대지가 되었던가를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열리고,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노예산업이 열리고, 제국주의의 시대가 열리고, 아프리카의 무수한 이들은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화려하게 꽃핀 제국주의의 유산은 지금도 튼튼하게 그곳에 뿌리를 내려 불평등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르완다의 처참한 민족분쟁은 그 튼튼한 뿌리가 듬뿍 피를 머금으며 피어난 화려한 꽃의 모습이다. 어떤 동정어린 기부가 그 비극을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지해. 상식의 정당성을 확신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모든 곳, 모든 순간에서 상상력을 허용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예술에 대해서는 모든 상상력을 허용해야해. 가장 비윤리적인 것 조차 그 속에서 구현하며, 지금 합의되고 있는 정의로움에 대해 예술이 과연 그러한가? 라고 묻도록 해야 해. 때문에 나는 가장 비윤리적인 예술만이 가장 윤리적일 수 있다고 믿어. 이를 위해 어떤 상식도 거부할 수 있는 강인한 상상력이 필요하겠지.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은결은 입을 다문다. 쿠로사카는 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녀는 은결의 말이 채 끝나지 않은 것 같다고 느낀다. 그의 말은 ‘하지만’이라는 희미한 말머리를 붙이고 있는 것 같다.

*은결균 침식도

은결-발원지

미래-선천 이뮨

쿠로사카-말기

여우-말기

고릴라-저항중

늑대-저항중

민성-중기

세연-기생생물을 통한 감염

푸른이빨-천적

수행-은결균의 최종진화형태(포도상규균?)

*기게스의 반지는 선할 이유가 없는 때에 왜 선해야 하는가를 물을 뿐, 처벌할 수 없는 악은 곧 선인가를 묻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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