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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197화 (197/300)

#   198-희망을 위한 찬가 -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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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야-”

점심시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민성이었다. 동물원 삼총사가 포만감 가운데 나른한 햇살을 쬐며 그의 말을 들었다. 정규회원인 은결과 비정규 VIP인 쿠로사카는 언제나 그렇듯 얼른 밥을 먹고는 바지런하게도 밖으로 나갔다. 못하는게 없는 슈퍼 걸 쿠로사카야 그렇다 치지만, 은결은 왕따 주제에 점심시간과 같은 중요한 사교의 시간을 매일같이 나 몰라라 내팽겨 치다니, 과연 왕따다운 행동이라 할 만 했다. 덕분에 방금 전까지 일행은 은결에 대한 성토의 장을 사소한 수준에서 열고 있기도 했다.

“-은결 그 녀석이 공부도 잘 하고 왕따 기질도 없었으면 그것도 나름대로 곤란하지 않았을까?”

“그게 왜?”

별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고릴라가 민성을 바라봤다. 민성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아니, 생각을 해 봐. 그 녀석 그렇게 안 보이지만 싸움도 되게 잘 하잖아. 운동도 참여를 안 해서 그렇지, 그만한 실력이면 뭘 해도 평균은 훌쩍 넘길 테고, 음, 이런 말 하면 신경질이 좀 나지만 얼굴도 꽤 미남이잖아? 더구나 쓸데없이 아는 건 조-홀-라 많아서 이야기 하면 사람 주눅 들게 하는 수준이고.”

“뭐, 따지고 보면 그렇긴 하다만.”

“그런데다 성적도 높고 성격도 좋다고 해봐! 넌 그런 은결을 바라냐?”

민성이 목소리를 높여 주장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지금 상태에서 성격도 밝고 공부도 잘하는 은결을 상상해 봤다. ‘공부 잘하는’은 별 어려움 없이 상상할 수 있었지만 ‘성격이 밝은’은 상상력의 극한을 요구하는 가정이라서 그들은 꽤 긴 시간 침묵 가운데 잠겨 있어야 했다. 그리고 결국 민성의 이야기에 맞춰진 은결을 상상해 보고, 고릴라가 대표로 결론을 내렸다.

“음, 좀 곤란할지도.”

“그렇지? 역시 은결은 지금 이대로가 좋아. 그러니까 너무 까지 말고 자상하게 대해주자.”

민성이 만족스럽게 자신의 결론을 이야기 했다. 다른 세 사람은 별로 깠던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상관없다고 여겼지만. 이번에는 늑대가 화제를 받아 부드럽게 전환시켰다.

“요즘 너 안 어울리게 책 읽고 있더니, 그세 은결 편이 됐냐?”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은결하고는 상관없어.”

“그럼?”

“흠, 쿠로사카가 요즘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단 말야. 무슨 책인가 물어봐서, 한 권 산거지. 일본어로 된 책이라 한국에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의외로 있더라고. 잘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소설인 것 같아.”

“뭔데?”

“그, 나쓰메 소새끼인가 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소설이야.”

민성은 약간 주저하는 투로 답했다. 일본인 이름은 낯설어서 외우기 힘들었다. 물론 인터넷 시대를 맞이해 원하는 자료를 찾기 위해 자연스럽게 적지 않은 일본 여성의 이름을 외우고 있긴 하지만.

“재밌냐?”

“어렵진 않아서 술렁술렁 넘어가는 편이긴 한데, 재미가 있느냐 하면, 솔직히 재미는 없는 거 같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사람인 모양인데, 너희도 모두 알다시피 셰익스피어 작품도 별 재미가 없는 판에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해 봤자 아니겠냐.”

“그걸로 어떻게 쿠로사카에게 들이댈 건덕지를 마련해 보시겠다?”

고릴라가 조롱조로 핵심을 찔렀다.

“쯧쯧. 말하는 투 하고는. 무식이 아주 뚝뚝뚝 흘러넘친다. 그러니 고릴라 소리가 떨어지질 않지. 너도 양서를 읽고 좀 ‘인간다움’을 습득하는 게 어때?”

고릴라는 분노했다. 그는 ㅅ자 들어가는 말로 민성에 대한 성토를 시작하려 했지만, 민성은 민성 나름대로 여유만만하게 고릴라의 분노에 대처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닌 탓이다. 늑대는 옆에서 보면서 민성은 다른 사람을 조롱하는데 꽤 재능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보여줬던 펜 돌리기도 그렇고, 이 녀석은 요상한 잡기에 능하다.

“아, 그런데 혹시 말야, 쿠로사카가 책 열심히 읽는게 의외로 은결 탓이라거나 하면-”

갑자기 생각난 듯, 여우가 한 마디를 더했다. 고릴라와 민성의 충돌이 그쳤다. 민성은 “그럴리가!” 라고 단호히 여우의 의견을 부정했지만 어딘가 불안한 얼굴이다. 고릴라는 이걸로 좋은 건덕지를 찾았다는 듯, 의미심장한 눈으로 민성을 바라보며 늑대와 함께 시시덕거렸다. 동정을 연출하는 눈의 이면으로 승리에 대한 쾌감이 넘실대는 것이 뻔히 보였다. 여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조금 무거운 눈을 했다.

“(-토요일에 만났던 건 어땠어?)”

대련을 끝내고 검을 수납하며, 쿠로사카는 주말의 밤에 꺼내지 못했던 질문을 마침내 꺼냈다. 후우- 하고 길게 숨을 고르던 은결은 그녀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어떻게 말을 꺼낼까 잠시 뜸을 들였다. 이윽고 은결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좋았어. 굉장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

“(흐응.)”

“(그녀와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흐응.)”

“(휴대폰 번호도 교환했어.)”

“(흐응.)”

“(휴대폰으로 전화하는 것도 꽤 즐거웠어.)”

“(흐응.)”

쿠로사카의 대답은 라벨의 볼레로를 생각나게 했다. 볼레로는 같은 프레이저를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지만 그 프레이저의 소리를 키워 나감으로서 최면에 말려든 것 같은 기묘한 환상성을 느끼게 하는 곡이다. 즉, 쿠로사카의 코대답은 지속적으로 소리가 강해지고 있었다. 은결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말을 계속 이으려고 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약간은 가라앉은 어조였다.

“(그렇지만-)”

찰캉, 소리가 났다. 쿠로사카가 발검자세에 돌입한 것이다. 언제든 검을 꺼낼 수 있는 자세에 돌입한 쿠로사카는 가장 예리하고 아름다운 한 자루 검을 떠올리게 한다. ‘왜!’ 라는 말이 크게 은결의 마음속으로 울렸다. 쿠로사카는 그 마음속 질문에 답하듯이 말했다.

“(주말도 그냥 넘겼고 아무래도 부족해. 한 번 더 대련하자.)”

은결은 사냥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으로 그런 부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우는 학원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채 교복도 갈아입지 못한 채 곧장 학원으로 향하고, 저녁을 사먹고 공부를 한다. 불만을 가진 적은 없는 생활이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는,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신에 대게 그들이 얻지 못하는 것을 얻고 있다. 반에서 5등을 기준으로 이리저리 오가는 성적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다. 여우는 거기 올랐다.

“우.”

버스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근처의 손잡이를 잡고 버티지만, 이리저리 몰리는 인파에 몸을 가누기는 쉽지 않았다. 이렇게 20분 정도를 버텨야 겨우 목적하는 정거장에 도착할 수 있다. 부산한 사람들 가운데서 몸을 지탱하며, 버스 창밖을 바라봤다. 진동도 심하고 정체도 흔한 버스지만 그래도 지하철보다 나은 점이 있었다. 버스로 가면 구경거리가 많았다. 지하철은 시간상으로는 신속하지만 지루했다. 사람과 건물이 광고와 뒤섞여 혼탁하게 지나갔다. 문득, 신호등에 걸려 버스가 멈췄다. 창밖으로 서점이 보였다. 멀리서 늘어진 책들이 보였다. 한산한 서점 안에는 듬성듬성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기게스의 반지가 뭔지 그 녀석에게 듣질 못했네...’

서점을 보고 있자니 은결에게 듣기로 약속한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이 기억났다. 기게스의 반지라. 어떤 이야기일지 기대가 됐다. 기대가 됐지만, 대신에 마음 다른 한 구석이 묘하게 무겁기도 하다. 점심 때, 민성은 은결이 공부를 못 한다고 말했다. 버스가 다시 움직였다.

‘공부를 못 한다라...’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여우는 석연치 않게 중얼거려봤다. 확실히 은결의 성적은 대단한 편이 아니었다. 15등에서 이리저리 오가는, 묘하게 특색이 없는 중상위의 성적이었다. 하지만 은결이 평소에 느끼게 하는 지적인 분위기와 대조하면 심하다 싶을 만큼 낮은 성적이기도 했다. 여우는 지난 학기 자신의 성적을 돌이켜 봤다. 반에서 5등이었다. 좋은 성적이다. 은결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은결보다 자신이 더 똑똑하다거나 지적이라는, 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은 도무지 할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생각을 거부했다.

“......”

그리고 잠시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억지로 생각을 가동시키며 여우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나는 은결보다 훨씬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거야.’

틀림없는 사실이다. 학교 성적은 물론이고 모의고사 역시 여우는 은결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이름을 두고 있다. 대학 역시 훨씬 좋은 곳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사정이 좋지 않아 타협해 들어간 대학이 아니라면 은결은 아무런 사심 없이, 한 줌의 어둠도 없이, ‘축하한다.’고 이야기해 줄 것이다.

-다음 정거장은...

안내가 흘러나왔다. 여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엉거주춤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했다.

*추천해 주신 후반야님 감사!

*고민을 좀 하다가 ‘은결’은 자료를 좀 더 수집, 소화한 뒤에 적기로 했습니다. 칠레를 다루려고 하니 역시 소화해야할 자료량이 적지 않군요. 즉, 다음 챕터에.

*용서하는 팃폴탯은 일단 배신해보고, 그래도 협력하는 이에 대해 협력하는 타입의 상대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기본 팃폴탯보다 점수가 높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먼저 배신해보고 협력하는 전략을 저희 선생님은 ‘조조스타일’이라고 하셨죠. ㅋㅋ

*여름도 다 끝난 마당에 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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