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희망을 위한 찬가 - 도스도예프스키를 읽는 소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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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부산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는 대화가 이어졌다. 간단하게 요기나 할 겸 시킨 음료수와 간식거리들을 입에 물고, 여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야기는 벤야민에서 쭉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던데, 여우는 지금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두 사람은 어느 순간 베블런이 어쩌고, 노동가치설이 어쩌고, 리카도가 어쩌고, 베일리가 어쩌고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주류경제학에서는 가치를 말하지 않아. 그들은 단지 가격을 말하지. 가격에 대한 일반 이론. 수요와 공급으로 이루어지는 깨끗한 세계. 그래서 경제학은 사회과학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과학’의 모습을 할 수 있었던 거고. 이건 경제학만의 문제는 아냐. 대부분의 학(學)은 가치의 문제를 포기함으로서 성공적이 되지.”
이건 은결. 그는 어딘지 들뜬 안색으로 이리세의 말에 반박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치를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는 달라. 사실, 정말 가치를 말하지 않거나 무관한 ‘학’이 있다면 그 학은 폐기되어 마땅해. 아무리 정교하고 뛰어나더라도 그건 결국 무의미한 ‘학’일 테니까. 너는 경제학에서 가치를 포기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건 그 세계에서 서술되는 명확한 개념으로서의 ‘가치’겠지. 가령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경제학의 이념은 ‘가치’에 대한 경제학의 발언이 아니고 무엇이지?”
이건 이리세. 그녀는 평소처럼 명확하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확실히 그들은 자유를 모든 것의 앞에 세우고 있지. 무척 정치적인 수사를 사용해서. 정치란 결국 가치의 문제를 공공의 영역에서 다루는 것이니까. 그것이 실제 이루어내는 성과야 어쨌든, 정치적인 영역에서 그들은 그들의 학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현실에서 관철시키고 있어. 자유로운 거래를 그 무엇보다 앞에 두는, 말야. 그건 잘해봐야 좀 더 발전된 공리주의에 지나지 않겠지. 나는 그 마저도 믿지 않지만.”
“그렇지? 그 무엇도 가치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어. 억지로 분리해 봐야, 결국은 가치의 영역으로 귀환할 뿐이지. 단지 조금 먼 길을 돌아서 올 뿐이야.”
이리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은결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치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과 가치가 이야기 되고 있다는 것과 가치를 말할 수 있다는 것과는 다른 거야. 가치는 이야기 되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가치는 말할 수 없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결국 귀착되는 지점은 가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아닐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윤리적인 것이 아닐까? 피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아.”
“가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하는 것이지. 가치에 대해 침묵할 때 남는 것은 한갓 욕구이거나 욕망이고, 욕구나 욕망이 세계의 이유일 때, 인간은 세련된 짐승에 불과하니까. 이기적 유전자에 나온 것처럼. 가치가 말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제 알려진 사실 따위가 아냐. 그건 인류의 지성을 관통하는 고뇌였고. 그래서 도스도예프스키는 까르마조프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잖아. 가치는 논리를 넘어선 곳에 존재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침묵을 이야기했지만, 그건 가치를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야. 그는 가치를 열망했어. 그가 주장한 침묵이 결국 향하는 곳은 논리 이상의 것이잖아. 그는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했어.”
여우는 조금 얼빠진 기분이 되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큰 맥락에서 벤야민-프레이저-이기적 유전자-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을 모두 한 줄로 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일 수 있었느냐 하면, 저 네 키워드가 되는 이야기는 이해하기 힘든 말 가운데서 틈틈이, 꾸준하게 같은 지점의 주변부를 돌면서 거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통일하는 핵심 키워드는 ‘가치’인 것 같았다. 알아도 소용은 없었지만. 물론 여우는 이름도 못 들어본 책이나 사람 이름도 중간중간에 많았다. 무슨 말로 하는 서커스 감상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렇게 네 말을 긍정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아. 침묵할 수 없지만, 잡을 수도 없는 것이 가치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쥘 수 있다는 거야? 기껏해야 그것은 타자의 교차를 통해서나 겨우 읽어낼 수 있을 뿐이지만, 그것은 너와 내가 지금까지 말한 ‘가치’가 아니잖아.”
“앎을 통해서.”
이리세는 굳건하게 이야기 했다. 은결은 그녀의 굳건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느꼈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은 근본적으로 ‘이성’이 구원에 즉, 진실한 의미의 ‘가치’에 가 닿지 못한다는 인식론적 한계를 합의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은결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가치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거잖아?”
“아니. 한 번도 학은 우리에게 가치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없어. 기껏해야 아직 알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했을 뿐이지.”
“보편에 대한 모든 시도는 근본적으로 실패했어.”
“그래. 실패했지. 그러나 그것이 가치를 쫒아야 한다는 당위를 해칠 수는 없는거야. 더구나 내가 말하는 앎은-”
이리세는 말을 이었다. 은결은 진지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우는 옆에서 겨우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하고 좀 씁쓸한 안색으로 감자튀김을 먹을 뿐이다. 그리고 3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즈음이 되어 세 사람은 헤어지기로 했다. 이리세는 또 가봐야 할 곳이 있다고 한다. 헤어지기 전에 은결과 이리세는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다. 이리세는 다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즐거웠어.”
“아아. 나도.”
은결은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즐거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웠다. 이리세의 손을 잡는 순간, 아주 희미하게, ‘찰칵’ 하고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정말로 희미한 소리였기 때문에 은결은 듣지 못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갔다. 은결이 여우와 헤어진 것은 버스 정류장에서였다. 은결의 버스가 먼저 도착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은결과 헤어진 여우는 상쾌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은결은 이리세를 생각했다. 이상한 소녀였다. 그녀는 마치 신앙인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것을 강렬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그녀의 태도였다. ‘의견’의 내용은 도리어 부차적이었다. 이리세의 말은 어디에서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두려움 없이 이야기했다. 은결은 도무지 그녀처럼 자로 대고 그은 듯 말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은결은 그녀가 몇 가지 모순되는 지점을 안고 있다고 느꼈지만, 그것들이 적어도 그녀의 내부에서는 모순 없이 통일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앎을 통해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특히 알 수 없었던 것은 지식, 이성에 대한 그녀의 태도였다. 일견 그것의 한계를 인정하는 듯하면서, 그녀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완고하게 그것을 믿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ㄱ이 아니라면 ㄱ이 아닐 수밖에 없다. ㄱ이 아니면서 ㄱ이라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어떻게 그 모순을 화해시켰을까?
‘앎이 그녀의 신앙인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의 욥? 찾아본다면, 그런 사람들이 드물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가 추구하는 앎이란 어떤 것일까? 아쉽지만, 그것은 듣지 못했다. 어쨌거나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웠다. 다음에 또 그녀와 이런 이야기를 할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됐다.
은결에게는 의외로 많은 대화상대가 있다. 아버지, 여동생, 쿠로사카, 세연, 친구들. 하지만 아버지와의 대화는 계시를 듣는 것 처럼 자신이 억눌러져 있었고, 미래나 쿠로사카와의 대화는 지루한 문장을 덕지덕지 덧붙이지 않으면 이야기가 이어질 수 없었다. 친구들이나 세연의 경우는 아예 선생님이라도 된 느낌이다. 하지만 오늘 만난 이리세라는 특이한 이름의 소녀처럼 자신을 뚜렷하게 드러내어 투사하는 대화는 거의 해 본적이 없었다. 거기에는, 소외됨이 없다. 쿠로사카가 그러했듯, 그녀 역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이야기에 찬성할 수는 없더라도. 은결은 주머니를 뒤져 안에서 접혀진 종이를 한 장 꺼내 펼쳤다. 아버지의 글이었다.
-한국이 겪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 가운데서도 금융자유화가 초래하는 위기의 정도는 세계적이며, 동시에 파국적이다. 이는 시공간의 압축이 있기 전부터도 이미 예견되어 있던 사태였다. 가령 케인즈는 투기자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자본과 유가증권의 자유로운 움직임은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요술양탄자(기업)의 속도(목표)를 끊임없이 혼란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모든 정상적인 사업을 혼란에 빠뜨리는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적대적 합병을 피하기 위해 충분한 자금을 모으느라 투자에 자금을 돌리지 않는 경우가 케인즈가 예견한 사태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예시다. 그렇지 않은 기업도 투자자들에게 잘 보이고 기업평가를 올리기 위해 그 실질적인 효과가 무관하게 일단 다운사이징을 함으로서 많은 이들의 삶을 처참한 지경으로 몰아가곤 한다.
그렇다면,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어떻게 이렇게 강력하고도 파국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우선 소개하고 싶은 것은 악셀로드의 실험이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미시간 대학의 교수인 악셀로드는 죄수의 딜레마를 응용한 토너먼트 게임을 개최한다. 거기서 플레이어는 특정한 규칙에 따른 전략 프로그램을 설정해 자신의 세력에게 실행하도록 할 수 있다. 기본적인 규칙은 상대에 대해 배신, 협동의 두 카드만을 설정할 수 있고, 대전 기록은 모두 기록된다. 협동하는데 배신하는 것이 가장 점수가 높았고, 서로 협동하는 것이 그 다음, 서로 배신 하는 것은 약간의 마이너스를 받았고, 배신당하는 것이 가장 마이너스 폭이 컸다.
이 토너먼트의 결과는 흥미롭다. 승리자는 거의 언제나 ‘팃폴탯(TIT FOR TAT)’이라는 전략이었다. 우둔하고 확실한 이 전략은 ‘배신당하지 않는 한 배신하지 않는다.’는 전략이다. 상대가 먼저 배신하지 않는 한 이 전술은 끝없이 협력하고, 한 번 배신당하면 배신한 자에 대해 한 번 배신한다. 이 외에 배신을 기본으로 하는 전략은 거의 설사 우세를 차지하더라도 곧 그들끼리의 대결로 인해 공멸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여럿이지만, 이는 향후 다루기로 한다. 지금 이야기에 연관해서 이끌어내어야 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배신하지 않아야 하고, 그리고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상대의 배신을 ‘응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략화하자면, 지금 금융자본이 지니고 있는 막대한 힘은 그들의 전횡에 대해 대부분의 국가가 응징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데서 비롯하고 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에 이르러 시공간의 압축이 일어난 탓으로 믿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자본이 자유롭고 가볍게 이동하고 있고,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으로 인해 시장의 문은 개방되어 이들 자본은 투기를 목적으로 세계의 각지를 노린다. 투자대상이 되어 있는 특정한 국가가 이들에 대해 제제를 가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다른 투자처를 노리고 언제든지 쉽사리 떠나버릴 수 있게 되었고, 투자되었던 막대한 자본이 회수되면서 그 국가나 지역의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덕분에 투기 자본에 대한 개별 국가의 대응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만일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면, 말레이시아처럼 IMF의 간악한 조언에 따른 금융 시장 개방을 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한국처럼 내수시장이 작고 경제의 많은 부분을 외부에 기대는 국가로서는 이 역시 힘든 형편이었다. 그렇게 할 경우, 더 큰 것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경제시스템을 좀 더 약자에 우호적이고 안정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국제금융시장의 방만함을 우선적으로 제제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비참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통령의 발언처럼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말을 단지 긍정하고, 이 파괴적인 세계화를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시민들이 이 파국의 끝에 깊은 상처를 입고 민족주의 정치가의 품으로 몰려갈 것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아탁’이라는 단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탁(attc - Assoiciation pour une Taxation des Transactions Financieres pour l’aide aux Citoyens)’은 ‘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의 과세연합’을 의미한다...
은결은 종이에서 시선을 뗀다. ‘파국의 끝에 깊은 상처를 입고 민족주의 정치가의 품으로 몰려갈 것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다시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을 생각한다. 이성은 삶을 구원할 수 없고, 신에게만이 그런 힘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걸작. 그래서 역설적으로 신앙을 가장 가혹한 상황에 처하게 하고, 종국적으로 역전시킨다. 문자로 이루어진 인류의 기적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에 있는 기적의 하나. 그런 글을 써낸 도스도예프스키는 경이적인 인간이다.
“......”
그래. 도스도예프스키는 경이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도스도예프스키가 경이적이었다는 것이 다른 면에서 모두 경이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도스도예프스키는 성마른 인간이었고, 무엇보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이자 신앙인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우선 러시아 인간일 필요가 있다고 아무런 의심 없이 이야기했다. 19세기 말, 그는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일보 직전인 때에, 다른 어떤 러시아의 지식인보다 크고 강한 목소리로 러시아 민족을 거인으로 칭하고, 슬라브 민족을 난쟁이로, 그러니까 공존은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모든 민족을 위한 콘스탄티노플이란 이야기를 경멸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러시아 민족만의 도시여야 했다. 러시아 민족만이 위대했으니까. 아무런 의심 없이, 확고하게, 흔들림 없이, 기계로 그은 한 줄의 직선처럼, 욥처럼 강인하게 그는 말했다.
그렇게, 그의 위대함은 그의 저열함과 얽혀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위대함을 그의 저열함과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위대한 러시아 민족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순결한 믿음과 구원을 주장하는 그의 소설에서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가치’에 대한 추구는 결국 그러한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다못해, 하다못해... 시계가 징징 흔들린다. 은결은 버스의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위대한 작가 도스도예프스키는 추악한 민족주의자다.
이질적인 어둠 가운데서, 책을 읽던 남자는 읽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권속의 귀환을 자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떠했지?)”
“(그는 최고예요.)”
소녀는 요염하게 웃으면서 깊은 마음을 담아 답했다.
*데일님이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 외에 맥주한잔님도!
*챕터 끝! 다음 챕터는 외전인 ‘은결’을 할 것인가, 정규연재인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를 할 것인가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중. -_-; 아 물론 외전 주인공은 수행입니다. 왜 아들내미 이름을 ‘은결’로 지었는가를 이야기하는 챕터.
*성원성원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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