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희망을 위한 찬가 - 도스도예프스키를 읽는 소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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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세연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전자기의 느낌이 뒤섞여 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연은 가슴이 두근 뛰었다. 약간은 아쉽고, 약간은 웃음이 나는 정겨운 첫 말이었다. 요즘 휴대폰은 누가 연락을 하는 건지 다 표시가 되기 마련인데, ‘여보세요.’ 라니. 얼마나 휴대폰과 친하지 않았다는 말일까?
“아, 나야.”
“응. 세, 연이구나.”
어색하게 대답이 돌아왔다. 말을 놓기로 한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니까 당연하겠지. 세연은 꺼끌꺼끌함 가운데 벽이 허물어지는 그 느낌이 좋아서 에헤헤, 하고 작게 웃었다.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당혹해 하고 있을 은결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볼이 붉어졌다.
“무슨 일이야?”
“일 없으면 연락하면 안 돼...?”
여전히 어색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은결을 향해 세연은 약간 볼멘 목소리로 응대했다.
“그, 그런 건 아냐.”
은결은 당황하며 부정했다.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이라 세연은 쿡쿡, 하고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뒹굴 한 바퀴 굴렀다. 길고 검은 머리칵이 부드럽게 쓸리며 따라왔고, 침대의 시트로 귀여운 주름이 일었다.
“하지만 용건은 물론 있어. 내일 토요일이잖아.”
“-아.”
무얼 말하려는 건지 알겠다는 듯이 은결이 휴대폰 저편에서 말을 흘렸다. 세연은 상관하지 않고 기대에 찬 어조로 용건을 이었다.
“-그러니까 만나서 어디 놀러가자. 영화를 봐도 좋고, 아니면 음악회 같은 것도 좋고. 연극이나 미술관 같은 것도 괜찮아. 시간은-”
“-그 미안한데, 내일은 약속이 있어서 안 되겠어.”
하지만 은결은 기대에 휘감긴 세연의 말을 미안한 듯, 그러나 단호하게 잘랐다. 놀란 당혹성이 채 문장이 되지 못한 물음이 되어 흘렀다.
“에?”
“미리 약속이 하나 잡힐 게 있거든. 일요일- 도 이번 주에는 집안일 할 게 많아서 힘들 것 같아. 그러니 다음 주말로. 결정되면 연락 줘. 시간을 맞춰볼게.”
“아, 응...”
은결의 말에 세연은 약간 맥풀린 태도로 답했다. 하지만 선약이 있다는데 달리 더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잔뜩 기대했는데! 실망이 구름처럼 마음을 가리고 몸을 적셔 무겁게 만들었다. 세연은 힘없이 휴대폰을 끊었다.
“하아-”
그리고 다시 세연은 몸을 빙글 굴리며 침대의 한쪽 편으로 움직였다. ‘너무하다.’ 라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서 뭉실, 새어 나왔다. 이번 주 내도록 문자를 보내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주말 정도는 연인을 위해 비워놓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됐다. 물론 직접 이야기 한 것은 아니지만, 꼭 말로 해야만 한단 말인가. 그래서는 연인인 보람이 없지 않을까?
“......”
‘말로 해야만 한단 말인가.’라고?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가운데 ‘?’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알지 못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은결은 ‘여보세요.’ 라고 말했던 것일까? 정말 단순하게 휴대폰에 익숙하지 않은 탓일까? 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혹시 그것은 은결의 자신에 대한 호의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작다는 뜻이 아닐까?
불안.
그러면, 문자를 보내고, 답장이 돌아올 때, 언제나 정중하게 정리된 문장만이 답으로 돌아오는 것도 익숙함의 문제가 아닌 호의의 정도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던 걸까? 그러면, 이것은? 그러면, 또 이것은? 그러면 이건? 그러면 저건? 익숙함의 정도와 호의의 정도, 갑자기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 까지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다.’ 고 생각해 왔던, ‘이런 의미’라고 생각해 왔던 은결의 행동들이 담는 의미가 아닌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훨씬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어느 것 하나, 자신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만이 마음에 만연했다. ‘?’는 불안했다.
“하아-”
세연은 우울하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은결이 좋았다. 마음이 조여서 아플 만큼 좋았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은결이 드러내는 기표를 읽을 수가 없었다. 기표를 결정하는 본질적인 기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행위는 해체된다. 혹은 원래 해체되어 있었다. 한 물건도 없다는 말이 뚜렷하게 떠오른다. 한 물건(본질)도 없거늘, 기표에 기대어 기의를 읽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주체는 타자의 찌꺼기다. 의미는 외부가 결정한다. 마음이 슬프게 우울하다.
‘근데, 기표니 해체니... 어디서 이런 말을 들은 걸까?’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기괴한 느낌이다. 세연은 고개를 갸우뚱 거려본다.
저물어 가지만 여름의 기운이 남은 햇살은 여전히 따갑다. 바쁘게 걷는 이들의 발소리와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뒤섞인 시내의 한 곳에 은결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가라앉은 마음의 이면에 두근대며 박동치는 기대가 있다. 어서 그 이리세라는 소녀를 만나봤으면 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봤으면 싶었다.
“여- 은결!”
사람들 사이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남 자 한 명, 그리고 여자 한 명.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 쪽은 익숙한 얼굴, 물론 여우였고, 다른 한 쪽의 여자는 낯설었다. 아마 저 아이가 ‘이리세’라는 아이이리라. 은결은 마주 걸었다. 곧 두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여우가 소개했다.
“음, 리세, 이쪽이 은결이야.”
“안녕.”
그리고 소녀는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어 왔다. 귀염상이지만 대단한 매력은 없는 외모였다. 하지만 은결은 적극적으로 웃으며 손을 뻗어오는 태도에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 이것을 도리어 싫어할 사람도 있을 것 같았지만, 적어도 은결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만나서 반가워.”
따스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잡은 순간, 은밀하게,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은결은 잠깐 멈칫 거렸지만, 이내 관심을 끊고 리세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은결과 손을 떼며 여우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어서 찌르듯이 물었다.
“후후, 네가 자문역인 모양이지?”
“자문?”
“아이디어 뱅크말야.”
여우가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그는 리세에게 사실 자기가 쓴 논술의 의견 태반이 은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한 적은 없었다. 그저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는 상대가 있다는 정도로만 말했을 뿐이다. 돋보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그걸 노리고 숨겼던 것은 또 아니었다. 이렇게 지적받으니 마치 그러했던 것 같아 창피했다. 은결은 금세 여우의 곤란을 눈치 채고 말했다.
“그렇진 않아. 여우는 굳이 나한테 기대지 않아도 좋을 만큼 독창적인 생각을 곧잘 해내. 도리어 내가 기대야 할 판인걸. 나는 고루한 편이라서.”
“여우?”
여우의 논술이 그 자신에게서 나왔는가 하는 것은 사실 별로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이내 얼굴을 상큼하게 바꾸며 물었다.
“학교에서 별명.”
은결이 설명했다. 이리세는 여우를 돌아보고 한동안 감상하듯 바라보고서는 윙크를 하며 그 별명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흐응- 어울린다면 어울리지만, 여우는 좀, 아닌걸. 꽤 미남이잖아. 성격도 ‘여우’하고는 이미지상 안 맞잖아?”
여우는 얼굴을 붉혔다. 조금 기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삼인일조 클럽의 일원이라서 다른 두 사람과 적당히 비교해서 지은 별명이거든. 확실히 여우는 머리가 좋은 것 빼고는 여우와는 이미지가 안 맞지. 성실하고 꾀 같은 거 안 쓰니까.”
“그렇지? 나는 여우 꽤 좋아해.”
이리세는 여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우는 조금 뿌듯했다. 구름이 거둬진 기분이다. 은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후후, 사람도 마음에 들지만, 벤야민을 주제로 즐겁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
“아, 벤야민 문제로 묻고 싶은게 하나 있는데?”
“뭐야?”
“왜 너는 벤야민과 프레이저를 연결한 거지? 목적이 없이 그런 연결을 했다면, 그건 지나치게 대담하고 위험한게 아닐까?”
“그렇지 않아. 벤야민의 의견을 근본부터 부정하기 위해 꺼낼만한 전거로서 프레이저의 연구만한 것은 많지 않다고 생각해. 태고부터 인류는 ‘의미’와 ‘가치’에 집착해 왔으니까. 그것은 언제나 권력과 연결된 차이에 대한 열망이지 않았을까? 생산력의 발달은 시스템을 질곡으로 바꿀 수 있지만, 종의 특성을 질곡으로 바꿀 수는 없어.”
이리세는 담담하고 빠르게 담했다. 은결은 속으로 아아- 하고 감탄했다. 기대했던 대로였다. 얼굴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다. 마음이 박동 친다. 들뜬 열기가 전신을 휘돌며 다음을, 다음을, 하고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수렵시대 인류는 그런 종류의 권력과 연결된 차이를 열망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때의 주술은 순수하게 기술적인 이유였어. 대상에 대한 치밀한 연구를 반영하고 나누는 무의식적인 의례였다고 보는 것이 더 옳았겠지. 그것이 수렵의 성공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고.”
“음, 네 의견은 옳아. 하지만 그것은 극복된 것이 아니라 ‘억압’되어 있던 것이겠지.”
“표상의 차원에서 드러남이 같다면, 이면의 문제는 뒤로 미뤄도 좋지 않을까? 극복과 억압을 나누는 것은 여기서 무의미한 문제라고 생각해.”
“그래서는 종기가 곪는 것을 놓아두는 것과 같지.”
단정적으로 이리세는 답했다. 은결은 쾌락처럼 치솟는 말의 폭포를 느끼며 그것을 조합해 쏟아낸다.
“나무를 태우기 위해 필요한 화력의 정도는 정해져 있어. 그걸 바꿀 수 없다는 걸 종기를 곪게 놔두는 것과 같이 볼 필요는 없잖아. 도리어 불이 싫다면 충분한 화력과 나무를 연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시스템의 성립이 중요할거야. 그것을 도피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결벽증적인 의견이라서 무의미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든 사태에 대해 ‘당연함’을 전제해서는 안 돼. 모든 것에 대해 그 당연함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하지. 그 당연한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지 어떻게 확신하지? 인류는 이미 무수하게 ‘당연’하다고 생각되어 오던 것을 부수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녀의 답을 듣고, 은결은 그녀가 용맹한 소녀라고 생각했다. 한때, 그는 그녀와 같이 용맹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즐겁고, 뜨겁고, 안타깝다. 말하기 힘든 감정의 뒤엉킴 사이에서, 무슨 말을 할까, 하고 고민한다. 하고 싶은 말과 논리의 종류는 이미 수십이다. 잠시의 틈 사이로 또 다른 의견이 떠오르고, 그것은 다시 가지를 뻗어 논리의 맥락을 잇는다. 어느 것을 골라 전달해, 어떤 논리가 되돌아올지 생각하는 것은 즐겁다.
“그러나-”
은결이 답하는 찰나에 여우가 끼어들었다.
“잠깐잠깐.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역시 서서 그렇게 하지 말고, 어디 들어가는 게 어때?”
정신을 차리고 은결은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래. 그게 좋겠군.”
“나도 찬성. 후후.”
이리세도 웃으며 말했다. 세 사람은 함께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약간 뒤를 걸으며 여우는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크로니우스님의 추천에 감사감사. 천애님의 꼽사리 추천에도 감사. 여름의 마지막을 어쨌거나 열심히 적어 봅니다. 이 시기 끝나면 이런 연재 힘들겠죠. 아, 슬퍼라.
*비유클리드 기하학 창시가 리만이 최초가 아니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확인결과 제 실수가 맞습니다. 로바체프스키의 논문 ‘평행선 이론의 기하학적 고찰’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시초입니다. 감사감사. 그 외에 확인된 자료에서는 리만기하학이 구면기하학으로 표현된다고 하는군요. 하여간 까르마조프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직선의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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