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희망을 위한 찬가 - 도스도예프스키를 읽는 소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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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점심시간에 은결과 쿠로사카는 옥상에 올라가서 대련했다. 여전히 쿠로사카의 검격은 섬연하니 아름다웠고, 은결의 대처는 완강하고 우직했지만, 그 섬연한 아름다움과 완강한 우직함은 과거의 것에 비할 바 없이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폼새는 정리되어 있었고, 기의 운영은 효율적이었다. 호흡 사이로 스며드는 긴장은 남김없이 집중력이 되었고, 구사되는 술식은 난이도에 관계없이 적재적소를 노리고 있었다.
“후-”
쿠로사카는 키리야미를 검집에 넣었다. 은결의 마지막 역장은 강고해서 파괴할 수 없었다. 날에 좀 더 힘을 집중했다면 어쩌면 파괴할 수 있었겠지만, 그 경우 동작에 틈이 생겨 이어질 은결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마지막 공수의 교환은 무승부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마로, 기분 좋은 땀방울이 슬몃 흘렀다. 은결은 맞은편에서 자세를 풀며 숨을 골랐다. 그의 주변을 감싸던 강대하고 신적인 힘이 스러져갔다.
“(그런데-)”
“(응?)”
“(너는, 누군가 이기고 싶다던가, 뛰어넘고 싶었던, 그런 사람은 없었어?)”
쿠로사카가 물었다. 은결은 곤혹스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질문을 하냐느냔 얼굴이다. 쿠로사카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설명했다.
“(아침에 네가 친구들과 이야기 하는걸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어보는 거야. 너는 승리와 패배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타자의 문제 때문에 그런건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아주 없진 않을 거 아냐. 하다못해, 목표로 삼는, 그런 사람이라던가.)”
아침에, 동물원 삼총사와 민성 사이의 소란을 바라보면서 쿠로사카가 읽고 있던 것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이었다. 얼마 전에 완독했지만 마음에 이상하게 깊이 박혀 빠지질 않았기에 다시금 읽고 있던 차였다. 그녀는 네 사람이 성적이니 논술이니, 여자 친구니 하는 문제로 승자와 패자를 나누며 노는 모습을 접하면서 ‘마음’을 읽고 있다가 지난 은결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됐다.
그때 그는 슬픈 얼굴로, 승리와 패배, 타자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쿠로사카는 가슴이 참 아팠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그 오해는 정적의 음악 같은 파도 소리 가운데, 풀렸지만- 쿠로사카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때를 생각하니 얼굴로 피가 올라와서 은결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음- 그렇게 말하면- 한 사람 있긴 하지만.)”
“(누구?)”
돌아온 대답에 쿠로사카는 채 열기가 식지 않은 얼굴로 화급히 되물었다. 솔직히 그녀는 은결의 대답으로 ‘없다.’가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은결은 쿠로사카의 채근에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큼, 음.)”
“(뭐야, 뜸들이지 말고 말해.)”
약한 두근거림을 느끼면서 쿠로사카는 물었다. 그 두근거림은, 어딘가 써서, 그래. 써서, 단순한 두근거림이지는 않았다. 그 두근거림은 질투라 할 만한 모습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어 하는데, 그런데, 그가 어깨를 같이 하고 싶어하는,(혹은 능가하고 싶어 하는) 이는 달리 있다는 것은, 역시, 살짝, 마음의 어두운 부분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비웃으면 안 돼.)”
“(물론.)”
“(...아버지.)”
어둠을 품고 두근거리던 마음이 한 순간에 꺼졌다. 대신 이어지는 것은 유쾌한 웃음이다. 쿠로사카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었다. 약속한 것을 생각해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린 것이지만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을 뚜렷했다. 은결은 볼멘 목소리로 쿠로사카를 힐난했다.
“(이렇게 될 건 알고 있었지만. 유쾌하진 않군.)”
“(미안. 하지만 네 아버지라니, 꿈은 큰 게 좋긴 하지만, 그래도 말야.)”
쿠로사카는 애매하게 말끝을 죽였다. 박수행. 그 세 글자의 위용은 거대하다. 술법 발전사를 둘로 나눈다면 그 세 글자의 이름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야 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가 이루어낸 성취는 엄청난 것이다. 쿠로사카는 은결이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천재성이 그의 아버지에 미친다고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한다. 이 세계의 역사는 인류만큼 길고, 천재라 분류될 이들도 드문드문 나타났지만, 수행의 성취에 비견될만한 사람은 정말 드물다. 개인적인 강함의 문제도 그렇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그는 각자(覺者)가 아닌 이에게 각자(覺者)의 성취를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 즉- 현자의 돌을 거의 완성했다는 점에 있다.
“(나도 알아. 아버지를 넘어선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
은결은 쿠로사카에게서 등을 돌리며 먼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넓은 허공처럼, 그의 말끝도 공허하게 흐려져 갔다. 어딘가 슬픈 그의 말을 들으며 쿠로사카는 은결의 말에서 느껴지는 슬픔을 읽어내기 곤란하다고 느꼈다. 그는 아버지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태 그 자체를 슬퍼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은결이 그런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은결은 무엇을 슬퍼하는 것일까?
“우...”
갑자기 은결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정리되었던 자세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쿠로사카는 얼른 그에게 다가가 몸을 부축했다. 은결은 새파란 얼굴로 명료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그 체험이 의식을 침범한 모양이다. 쿠로사카의 얼굴이 답답함에 굳었다. 그를 도와줄 아무런 방법도 자신에게는 없다, 는 것이 아팠다.
“(괜찮아?)”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 한심함에 몸이 젖는 것을 느끼면서, 한심하게도 쿠로사카는 그렇게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판에 박은 듯 한 끄덕임이었다. 은결은 여전히 새파란 얼굴로 웃으면서 이어 말했다.
“(응. 괜찮아... 고마워.)”
그는 자신에게 기대지 않는다. 하기야, 기대 오더라도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쿠로사카는 갈증을 느꼈다.
종례가 끝나고, 학생들은 부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우도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릴라를 비롯한 친구들과 중간까지 같이 가다가 건물 입구에서 헤어졌다. 홀로 된 그는 가는 길에 학원 시간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으니 어뮤즈먼트 센터(오락실)에 들렸다 갈까, 아니면 조금 돌아서 지루한 분식 대신 그나마 나은 패스트푸드로 저녁을 때울까 고민을 했다.
“아, 잠깐만.”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우는 고개를 돌렸다. 은결이 보였다. 은결 뒤로는 그의 여동생이 보였다. 전국 모의고사 0.3% 이내에다가 논술도 잘 하고, 굉장한 미인이라는, 약간의 발육부진(...)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는 알파걸이다. 쿠로사카와 마찬가지로 좀 다른 세계 사람이다.
“무슨 일이야?”
하기야, 다른 세계라는 표현으로 그녀를 정리해 버린다면 지금 눈앞의 이 녀석도 만만치 않지만. 이라고 여우는 생각하며 은결에게 용건을 물었다.
“오늘 학원에 가면 말야. 그 여자애한테 한 가지 좀 물어봐 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뭔데?”
“-조시마 장로의 죽음은 왜 그렇게 모욕적이었을까?”
은결은 주변을 압도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여우는 은결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위축되었다가 되물었다.
“그게 뭐야?”
“조시마는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성인(聖人)인데, 음 서서 설명하긴 좀 길고, 하여간 그렇게 물으면 알거야.”
은결은 애매한 얼굴로 그렇게만 설명했다.
“흐응.”
“그럼 부탁해.”
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못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은결과 이리세, 두 사람의 독특한 생각에는 여우도 상당히 관심이 있었다. 그들 사이의 중계점 역할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여우는 느긋한 걸음으로 학생의 파도 사이로 스며들었다. 은결도 곧 왔던 길로 돌아가 자신을 기다리는 미래와 함께 자전거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가는 길에,
“오늘 저녁은 뭐야?”
-하고 천진하게 묻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메뉴를 이야기 해 줬고, 미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자전거가 있는 곳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자물쇠를 끄르고 거기 올라탔다. 이어 은결은 페달을 밟고 부드럽게 도로를 달렸다. 달리면서, 은결은 이기적 유전자와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 아이의 의견을 다시 생각했다. 그 진정한 연결이란 어느 쪽일까? 단지 닮았기 때문에? 아니면 주체는 언제나 타자의 찌꺼기이기 때문에? 만일 후자라면- 다시 가슴이 뛰었다. 답은 내일이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추천해 주신 새녘별님께 감사! 열심히 쓰겠습니다!
*이리세는 대단한 미녀가 아닌데도 히로인에 추가되길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군요. 좀 놀랬습니다. 시대는 이제 미소녀가 아니라도 상관없는 건가!
*저는 고등학교 논술을 잘 모릅니다만, 어차피 은결은 규격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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