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88화 (188/300)

#   189-희망을 위한 찬가 - 도스도예프스키를 읽는 소녀(3)

#

평화로운 점심시간의 일이다.

“아, 그러고보니, 나 어제 여자 은결 봤다.”

여우가 말했다. 옆에서 물을 마시던 고릴라는 뿜었다. 푸우- 하고 멀리까지 날아가는 물방울들이 창가 쪽을 촉촉하게 적셨다. 밥을 삼키던 늑대는 목에 걸렸다. 밥이 목구멍이 아닌 숨구멍으로 넘어간 모양이다. 발로 자리를 지탱하고 흔들의자인양 철제 의자로 끽끽대던 민성은 뒤로 넘어졌다. 요란한 소리가 교실을 메웠다. 식판에서 반찬을 집던 은결만이 그나마 평정을 유지한 채 여우를 바라봤다. 설명을 더 요구한다는 뜻이었다. 여우는 밥을 한 숫갈 들고, 아직도 콜록 거리느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늑대의 식판에서 고기완자 하나를 자연스레 걷어내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얼마 전에 벤야민이 어쩌고 하는 글을 하나 썼거든. 너 한테 전에 들은 것도 있고 해서. 그걸 그 애가 보더니 좋은 글이었다면서, 하지만 자기는 프레이져와 연결했을 거라느니 뭐 그런 말을 하더라고. 그런데 내 문장이 별로 안 좋다면서, 나중에는 문장의 수사학적 효과를 배제한 평이함을 통해 텍스트의 ‘아우라’를 없애기 위한 포석이었냐고 묻더라.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텍스트였다면서 말야.”

은결은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특이한 여자애가 있다면 있는 거지, 여자 은결은 웬 여자 은결이란 말인가? 하지만 은결 외에는 다들 할 말이 명확한 듯 했다. 우선 고릴라가 놀란 감탄성을 토하며 말했다.

“...오오. 여자 은결이다.”

이어 늑대가 아직도 아픈 목을 잡고 큼- 하고 긴 소리를 낸 다음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여자 은결이군.”

아직 약간 뻐끈한 목을 잡고 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여자 은결이다.”

은결과는 달리 다들 ‘여자 은결’이라는 표현에 동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은결은 한층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화를 내기도, 부정하기도, 그렇다고 가만있기도 마땅치 않았다. 개미새끼 한 마리가 종아리 부근에서 근질대면서 알짱거리는 기분이다. 그러던 사이 대화의 바통이 여우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프레이저가 뭐야?”

여우의 질문이 은결은 반가웠다. 차라리 이런 쪽의 이야기가 성에 맞다. 이야기할 것이 명료하니까. 대처에 별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학자 이름. 황금가지라는 책으로 여러 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 신화학이라던가, 인류학이라던가, 철학도 그렇고.”

“그런데 그게 벤야민과 무슨 상관이냐?”

“벤야민 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신비주의 전통에 꽤 깊게 관여했던 사람이니, 연결하려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야. 음- 하지만 네게 벤야민과 관련해서 했던 이야기라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것 정도였으니까, 거기서 프레이저가 나온다면... 아마도 공감주술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군.”

“뭐냐 그게?”

“주술의 방식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사람이 사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논리이기도 하지. 닮은 것 끼리는 같거나 비슷한 힘을 가진다는 논리와, 대상과 접촉했던 사물은 그 대상의 힘을 나누어 가진다는, 그런 논리.”

술자들이 사용하는 세계의 모든 술법을 통틀어 보편적인 ‘힘’의 운용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은결은 이를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다. 더구나 세연의 정신은 푸른 이빨에게 같은 방식으로 ‘오염’당했었다. 정말 강대한 힘은 그 자체로 주변을 지배하기도 한다.

“오오. 만화 같은데서 자주 본 거다. 저주인형 같은 거 만들 때!”

고릴라가 반갑게 말했다. 민성과 늑대도 동조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맞아. 그리고 그러한 주술적 방식은, 음, 말하자면 ‘아우라’를 증식하는 방식이기도 하니까, 벤야민의 이야기와 연결될 수 있겠지. 연예인들의 사소하고 일상적인 공산품 따위가 고가에 거래되는 것과 같이 말야.”

“음. 알겠어.”

“하지만-”

여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애매하게 운을 띄웠다. 주변에서는 은결이 어떤 신기한 소리를 할까, 하고 약간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다. 그러나 이내 은결은 표정을 풍고 고개를 설래설래 내 저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냐. 밥이나 먹자.”

주변에서는 약하게 투덜대면서 식사로 돌아갔다. 다시 식판의 식지 않은 음식에 젓가락을 가져다 대면서, 은결은 이야기 하려다 만 자신의 생각을 돌이켰다. 왜 하필이면 프레이저- 였을까? 비교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한에야, 서로 다른 학과 학을 연결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기 마련이다. 아니다. 부담을 넘어, 특별한 이유 없이 학과 학을 연결하는 것은, 낭비고 악덕이고, 하찮은 오만이다. 문체의 효과에서 벤야민의 아우라를 연결할 정도의 소녀라면 그 정도를 모르지는 않으리라. 하물며 황금가지라니, 비슷한 점이 있다고는 해도 상당히 무모한 연결이다.

그럼에도 연결했다는 것은, 그 연결을 통해 도출해 내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모해 보이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황금가지’를 연결해 그 소녀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일단 은결은 그것이 결국 벤야민의 이야기를 부정하는 것이 되리라 생각했다. 황금가지를 통해 인류는 태고적부터 이렇게나 ‘차이(차별)’에 집착해 왔다는, ‘아우라’에 집착해 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집착은 ‘복제’를 통해 쉽게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타자에 대한 갈구는 권력과 함께 끊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차이와 아우라에 대한 집착으로 벤야민을 부정하면 무엇이 남을까? ---- 한 가지 예상이 마음을 가로지른다. 은결의 표정은 씁쓸해진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사고를 가로지르는 자신의 예상에 은결은 고개를 젓는다. 자신은 그 소녀를 모른다. 벤야민을 프레이저와 연결하려 했다는 이야기에서, 그런 것 까지 예상해 내는 것은 역시 비약일 것이다. 차라리 그 무모한 연결을 하나의 지적 허영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답에 가까우리라고, 은결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신에 대한 갈구가 끊어지지 않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기는 했다.

“(그건-)”

그녀는 날았다. 압축된 시공 가운데서, 쿠로사카의 움직임은 가장 화려한 춤을 보는 것 같은 부드러움과 베일 것 같은 예리함을 동시에 품는다. 은결은 날아드는 그녀의 몸을 보며 한 호흡 가운데 담았던 기를 손으로 보내며 발을 물리고, 상완을 들어 역장을 형성했다. 키리야미의 날이 날아오려는 지점에 한결 강한 기를 집중시키고, 대지에 뿌리박히는 발에는 의지를 담아 거대한 나무처럼 자신의 지지한다. 그리고 충돌!!

“(-지나친걸.)”

충돌의 다음, 잠깐 주어진 시간 가운데, 쿠로사카는 차갑게 웃으며 말한다. “(-그렇지?)” 은결은 뿌리박혔던 발을 들어 높게 올렸다가 앞으로 그것을 움직이며, 다시 대지와 육체의 연결을 회복시키고, 물렸던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술식으로 공간을 장악한다. 쿠로사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움직임을 면밀히 분석해 예측하고, 한발을 물려 몸을 뺌과 동시에 다른쪽 발을 축으로 허리를 돌렸다. 하복의 스커트가 부드럽게 휘돌았고, 유려한 다리가 환상처럼 움직이며 쿠로사카는 은결의 뒤를 잡았다. 키리야미가 그의 목을 노리고 일직선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은결은 등 뒤로 막대한 열기를 뿜음과 관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처럼 몸을 돌려 그 검을 역장으로 방어해 낸다. 쿠로사카는 어쩔 수 없이 은결과 거리를 둔다. 쿠로사카의 얼굴을 보면서 은결은 볼멘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여자 은결이라니, 너무 하잖아. 남의 이름 가지고 말야.)

“(아니, 내가 너무 하다고 한 것은 그 여자아이에게 ‘은결’이란 형용사가 지나치게 무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걸. 여성에게 쓰기에는 너무 음침하잖아?)”

웃으며 말하는 쿠로사카에게 은결은 좌절하고 무너졌다. 쿠로사카는 마지막 점을 찍듯, 은결을 보며 깔끔하게 “흥.”하고 웃어 준 다음 검을 갈무리했다. 좋은 대련이었다. 여전히 몸 상태는 최상이었고, 그간 검을 다루는 능력을 비롯한 술식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등도 부쩍부쩍 늘었다. 한국에 있던 짧은 기간 가운데 이룬 성취는 지난 몇 년간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 같았다. 이유는 그녀 자신도 잘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명료한 적이 예비 되어 있는 이상 고민에 앞서 기뻐할 일이다.

“(그런데, 너도 상당히 몸놀림이 좋아진 것 같군. 처음 너를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음, 솔직하게 기뻐하기 힘든 평가로군.)”

은결은 여전히 볼멘 얼굴로 투덜거렸다. 쿠로사카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미소를 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이면에 그늘을 품고 있었다. 은결은 투덜거리지만, 쿠로사카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열등감을 품고 있는 것은 ‘자기’쪽이라는 점을 그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만 해도 은결이 전력을 다 한 것 같지 않았다. 아주 교묘하고 능숙했지만, 그는 보여준 이상의 힘을 어딘가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사실 없다. 있다고 한다면 이제까지 은결이 보여주었던 ‘저력’이라 할 만한 것들 이지만, 실은 어느 것 하나 은결 자신의 힘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쿠로사카를 더욱 당혹스럽고 분하게 하는 것은, 그 ‘열등감’이 사실은 단순한 ‘열등감’이 아니라는 점, 그러니까 그 열등감 자체가 달리 노리고 있는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

역시 짜증스러웠다. 이 짜증스러움을 해소할 방법은 찾기 어려웠다. 맞은편에 서 있던 은결이 갑자기 시선을 바지주머니 쪽으로 돌리며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곧 그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펼쳐 보고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 곤란한 얼굴을 보고 쿠로사카의 짜증은 한결 더 해졌다. 누가 연락했던지 예상 할 수 있었다. 은결은 곧 한숨을 쉬고는 더듬거리는 손길로 휴대폰을 눌렀다. 싸울 때는 그렇지 않은데, 이럴 때 보면 은결은 되게되게, (여기서 한 숨 쉬고) 되게되게되게 맹해 보인다. 알면서 쿠로사카는 물었다.

“(세연이라는 아가씨야?)”

“(으, 응. 점심 맛있었냐고.)”

곤란한 얼굴로 은결은 답했다. 손이 간지러웠다. 쿠로사카는 한 대 때려주고 싶다고 느꼈다.

*마셜님과 瀏亮님의 추천에 감사! 마셜님의 추천은 역시 후덜덜하네효. 글이 더 찌질해 보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겟습니다. 류량님의 추천에는 열심히 써서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희여니님의 추천에도. 그러니 성원!

*한계에 대한 도전은 드물지 않게 신비로 이어집니다. 운동이든 학문이든 예술이든, 한계에 도전하는 이들 가운데 ‘신’을 말하는 이들은 드물지 않지요.

*출판사에서 다음에 게임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게 잘 나간다고 하는군요. 놀라워라. 한국에 온라인 게임 인구가 많긴 많은 모양입니다. 쓰고 싶은 글은 달리 있지만, 게임 소설이랍시고 간단하게 생각해 본 것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걸로-

왕따 소년이 어떤 게임의 베타테스터로 뽑힙니다. 다 합쳐도 10명도 뽑히지 않은 게임입니다. 알고 봤더니 그 게임은 최신의 나노 테크를 이용해 가상현실을 접속해 게임을 하도록 하는 오버테크놀러지의 게임이고, 베타테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비밀을 말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합니다. 사실은 기계 자체의 나노봇이 뇌에 간섭하기 때문에 맹세를 어기는 것은 불가능하죠. 하여간 게임을 함으로서 소년은 우울한 현실을 잊을 수 있게 됩니다. 점차 게임에 열중하고, 결국 은둔형폐인으로 진화합니다. 그러던 가운데 NPC소녀(미소녀!!!)를 만납니다. 그리고 소녀는 그녀와의 교류를 통해 현실과 마주해 나가며 성장할 수 있게 되며, 찌질왕따에서 벗어납니다. 그녀를 통해 이 명백한 오버테크놀러지의 게임이 실은 어떤 목적을 위해 개발되어 나간 것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줄줄줄)

...이런 게 있다면 재밌겠다고 생각은 해 봤었죠. 중심축은 소년의 성장과 연애. 의미론과 실재론의 사이의 논쟁. 소녀의 정체와 게임 자체가 품고 있는 비밀. 중심 주제는 ‘버추얼리얼리티가 역으로 현실을 복구할 수 있는가?’ 정도? 이건 역으로 현실의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전화될 수도 있겠죠. ‘현실이란 무엇인가?’ 랄까. 음. 왕도적 SF군뇨!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