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87화 (187/300)

#   188-희망을 위한 찬가 - 도스도예프스키를 읽는 소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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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반투명한 기호 위를 스치듯이 움직인다. 기호는 그 손길에 따라 위치를 바꾼다. 그곳에는 다른 기호가 이미 대기하고 있었고, 기호와 기호가 겹쳐진다. 또 손길이 그 곳을 훑으며 두 기호의 각도를 바꾸었고, 레고의 조각처럼 맞물리며 기호는 다른 기호로 전환되었다. 전환된 기호는 밝은 푸른색을 내며 안정적으로 허공에 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거기서 멈췄다.

“후.”

은결은 숨을 내쉬었다. 바람이 맞은편에서 불었다. 그의 눈동자 가운데 봉인진식의 모습이 뚜렷하게 비치고 있었다. 절반을 훨씬 넘는 부분이 이미 해석되었다. 남은 부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방학 전의 작업 진행 속도를 생각하면 설명하기 힘든 빠르기였다. 그렇다고 방학 때 이 일에 전력을 닿나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푸른 이빨에게 몸을 빼앗기고 정신적인 혼란을 겪는 등, 작업 시간만을 생각하면 더 적었다.

‘역설적이군...’

그럼에도 이렇게 빨리 작업을 진척시킬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정신적인 혼란이 영혼을 엄습한 덕분이었다. 아담의 언어를 통한 직접적인 만물일여의 체험이 가져다 준 거대한 혼란이, 도리어 은결의 기호에 대한 이해를 훨씬 더 깊은 것으로 만들었다. 기존의 모든 이해를 산산이 부정하고, 그 부정을 통해 다시 의미를 쌓아올려 건축하고, 건축된 것을 다시 모래알처럼 바스라뜨리는 일련의 과정이 연속되면서, 기표와 기의, 그리고 기표와 기의가 결합된 기호라는 것에 대한 은결의 이해는 훨씬 더 깊은 곳 까지 다가간 것이다. 은결은 어째서 모든 기호가 결국 손바닥으로 집중되는 것인지, 이제 진정으로 알 것 같은 기분을 때때로 맛본다. 손, 만물일여, 아담의 언어---

---이어지던 생각 가운데 은결의 등골로 소름이 흘렀다. 아담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 여전히 정확한 정체를 알지 못하는 그들의 힘은 경이적이다. 아버지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 했지만 말해주지 않았다. 은결은 다만 그들이 구사한 아담의 언어는 가짜에 불과하고, 위험부담이 크니 쉽게 다시 그 힘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만 들었다. 그렇다 해도 그들은 극히 강하고 위험하다. 구사하는 결계의 수준, 사용하는 아티팩트의 수준을 생각하면 확연한 일이다. 과거의 수행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다시 그들과 부딪혀야 할 것이란 점이다.

라이칸 슬로프, 뱀파이어, 세뇌, 혹은 관념 주입형 사념체, 거대 바퀴벌레-- 일련의 경험을 종합할 때, 그들이 노리는 것이 은결 자신인 것은 명백했다. 그리고 노리고 있는 이유는 아버지와 관계되어 있을 것임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꺼낼 수 있는 자신의 카드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런 면에서 푸른 이빨의 힘을 절반 이상 용해해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아담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호문클루스라도 투입하지 않는 한, 이 힘으로 어떻게든 맞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생각을 흐름을 끊고, 이어지려는 사고의 흔적을 지워내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봉인진식에 의식을 돌렸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작업을 완전히 완료할 수 있겠군.’

은결은 진을 바라보며 그렇게 예상했다. 지금 속도로 작업을 한다면, 사실 한 달이란 너무 넉넉하게 잡은 기간이다. 어쩌면 이주 안에 결판 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세연의 몸에서 푸른 이빨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른들에게 이제까지의 사정을 설명할 수 있을 테고, 그들의 동의하에 그녀의 기억을 문제없이 조작할 수 있게 되리라. 그러면 세연에 관계된 문제는 모두 정리될 수 있다. 소문이 커지는 것은 이때를 대비해서도 막아야 한다. 그것이 자신은 물론, 그녀에게도 우선은 최선인 결과라고, 은결은 생각했다. 만에 하나 그러고도 그녀와 다시 인연이 닿게 된다면 그때는, 그래, 그때는---

“(-얼마 남지 않았군.)”

은결은 고개를 돌렸다. 키리야미를 쥔 쿠로사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결은 웃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아, 응. 얼마 남지 않았어. 세연양은 물론, 너도 곧 푸른 이빨과의 지겨운 인연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야.)”

“(그래.)”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결은 이어서 웃는 얼굴로, 그러나 웃음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쓸쓸함을 담고 말했다.

“(푸른 이빨 문제가 해결되면 넌 한국을 떠나는 건가...)”

“(...그렇겠지.)”

두근, 하고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쿠로사카는 느낄 수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화’에 가까운 미묘한 마음이 널을 뛰듯이 치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쿠로사카는 은결에게 무슨 말을 돌리면 좋을지 혼란스러웠다. 은결이 먼저 말했다.

“(음, 솔직히 좀 아쉬운걸.)”

“(......)”

표정의 변화 없이, 쿠로사카의 볼이 붉어졌다. 들뜬 간지러움 같은 것이, 쿡쿡 몸속을 찌른다. 그것을 말로 바꾸기는 어려웠다. 한편 은결은 자신이 한 말을 되새기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수정했다.

“(아냐. 많이 아쉬울 것 같아.)”

쓸쓸하게 은결은 말했다. 쿠로사카는 휘몰아 닥치는 복잡한 감정의 조류에 혼란을 느끼면서, 은결을 바라봤다. 어떻게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걸까? 창피하지 않은 걸까? 쿠로사카는 다시 은결을 알 수가 없다고 느꼈다. 기뻐하며 받아들일 수도, 냉정하게 내칠 수도, 어느 쪽을 택하기도 어려웠다. 쿠로사카는 건조한 목소리로 어렵게 말했다.

“(-안, 떠날 수도 있어.)”

“(헤, 그래?)”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쿠로사카는, 그 목소리가 ‘기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금세 다른 감정의 탁류에 용해되며 원래의 색체를 잃었다. 본래 색을 잃은 그 감정은 주로 ‘당혹’이라는 단어로 설명되곤 한다. 쿠로사카는 은결의 시선을 흘깃 피하면서 말했다.

“(지난번 해변에서 상대했던 이들은,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였으니까 이세에서 한국을 지원할 가능성은 높아. 그렇다면, 다른 사람보다는 이미 와 있는 내가 동원될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

“(그렇군. 마냥 반가워할 일은 아니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렇게 되면 좋겠는걸.)”

은결은 약간 쓰게 웃었다. 쿠로사카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냥 마음의 혼란을 털어내기 위해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결도 더 말하지 않고, 다시 기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쿠로사카는 잡념을 모두 떨쳐낼 수 없었다. 드물게도, 그녀는 검을 휘두르며 복잡한 생각을 했다.

그 복잡한 생각은 휘몰아치고, 휘몰아쳐서, 결국은 한 권의 소설로,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으로 귀결되었다. ‘마음’이라고? 은결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그 책은 이상하게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박혀 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아는 것은, 그저, 그때- 아득한 마음이 고개 돌리지 못하고 어둠을 바라보았을 때를, 그 때를, 기억나게 한다는 것 뿐이다.

여우는 자리에 앉았다. 교실에는 빈 좌석도 있었고, 아닌 좌석도 있었다. 조금 썰렁했다. 논술 상급반은 소수정예를 지향하기 때문에 인원이 많지 않은 편이었고, 그래서 모두 출석하더라도 휑한 느낌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여우는 가방에서 어제 받은 프린트 물을 꺼내 읽었다. 작년 k대학에서 제시한 논술지문을 설명하고, 그 지문의 출처가 되는 원전을 요약 설명하고 있는 글이었다.

제시된 지문은 리처드 도킨스라는 사람이 쓴 ‘이기적 유전자’라는 글의 일부였다. 인간은 유전자 운반기계에 불과하다 운운하는, 반론할 능력은 없지만, 꽤나 짜증을 느끼게 하는 주장의 일부였다. 논술선생님은 이 책 외에 ‘이중나선’이니, ‘종의 기원’이니, ‘도덕적 동물’이니 하는 책도 직접 읽어볼 것을 어제 권했다. 여기에 관련된 사업규모도 매년 성장하고, 국수주의와 정직성 논쟁으로 한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기 논문 사건도 연결되어 올해 논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질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라고 했다. 어제 채 못다한 이야기가 많았으니, 오늘도 아마 이 프린트로 수업을 할 터였다.

“안녕.”

여우가 멍하니 프린트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우는 아직 여기서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그는 깜짝 놀라며 옆을 바라봤다. 낮선 얼굴의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잊으래야 잊기 힘든 특이한 것이었으니까. 그녀의 이름은 ‘이리세’였다. 어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글을 읽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만만했다. 아마 공부를 매우 잘하는 모양이었다. 우등생 특유의 아우라 같은 것이 느껴졌다. 논술도 좋았던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에게는 무슨 볼일일까.

“아, 아아. 안녕.”

“옆 자리에 앉아도 괜찮아?”

이리세는 명랑하고 대담하게 청했다. 여우는 뻘줌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세는 그의 옆에 앉았고, 가방을 책상위에 올리고는 수업할 준비물을 꺼내들었다. 여우는 그녀를 쳐다봤다. 빛이 닿지 못하는 가방 안의 어둠으로 희미하게 책이 보였다. ‘까르...’이외의 제목은 보이지 않았다. 이리세는 곧 준비물을 모두 꺼내고 가방을 닿아 책상에 걸쳤다.

“네가 쓴 벤야민 논술문을 읽어봤거든. 아주 멋졌어.”

“아, 응. 고마워.”

“다만, 문장이 너무 평이한 게 흠이었어. 나는 네 문장이 좀 더 수사적이었으면 더 좋은 글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

“뭐 할 말만 제대로 전달되면 되는 거지.”

“후후. 그건 그렇지만, 벤야민의 글을 거기까지 이해한 사람이 쓰는 문장치고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어설프게 대필한 것 처럼 말야. 그 이해를 현실과 연결하는 방법도 멋졌고. 나라면 프레이져와 접목했을 테지만. 그래서 이질감이 좀 느껴졌달까. 혹시 그게 '아우라'를 극복하기 위한 수사학의 한 방식이라면 정말 대단한 거겠지만.”

여우는 가슴 한 구석이 뜨끔, 하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가 썼던 논술은 은결이 골격이 모두 다 잡고, 여우는 살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살 부분이 어색하단 말을 들었으니 마음 한 구석이 거북하지 않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동시에, 여우는 이리세라는 소녀에 대하여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은결종 은결속 은결과 은결목 은결강 은결문 은결계’의 희귀동물이었다!

“하여간 앞으로 잘 지내.”

“아, 응.”

소녀가 웃으며 청해오는 악수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특별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뭐 나쁜 기분도 아니었다. 곧 전자음의 종이 치고 선생님이 들어왔다.

*아이구요, 빠뻬포 님의 추천에 감사! 이런 추천해 주시는 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글 쓰는 거지 뭐 달리 있겠습니까. 샤미쿠타님의 추천에도 물론! 그러니 다른 분들도 성원!

*유감입니다. 은결의 성이 ‘박’인 것은 제가 박씨인 것과 거의 연관이 없었습니다. 껄껄. 뭐 십 중 하나 정도는 연관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대문자 갓은 잘라 말해 서구에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게 거세당했다는 것은 절대적인 기준, 믿음, 세계관, 하여간 개인을 이루는 존재의 근저를 파괴당했다는 것을 말하죠.

*이번 챕터 끝나면 외전을 쓸까 생각중입니다. 주인공은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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