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희망을 위한 찬가 - 도스도예프스키를 읽는 소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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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
의자에 앉은 여우는 하품을 했다. 그는 졸린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익숙하지 않은 교실과 얼굴들이었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곳은 다니고 있는 학원의 논술 상급반이었다. 상급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논술을 잘 한다는 평가를 받는 아이들이 오는 곳이었다. 여우는 얼마 전까지는 중급반이었는데, 지난번 논술 테스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때 나왔던 문제는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과 현대 대중문화를 키워드로 삼아 자유롭게 서술하시오, 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여우는 그때 사람들이 명백한 복제품인 책이나 음반, 게임의 초회판에 집착하는 모습 같은 것을 보자면 예술작품의 아우라란 그것의 일회성(진품성)에 근거하기보다 인식주체가 그것은 다른 것들과 같지만 ‘다르다’고 생각하는 인식에 근거하는 것으로, 차이가 인지될 수 있다면 작품의 ‘아우라’는 어떤 방식으로도 지속될 것이기에, 그의 이야기를 현대 대중문화에 접목해 예술의 민주화를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논지의 이야기를 적었다.
그 글을 제출하고 여우는 ‘놀랍다.’는 평가를 듣고 이 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잘했다.’가 아니었다. ‘놀랍다.’였다. 평가자의 예상범위를 넘어서 있던 글이란 말이었다. 별로 영광은 아니었지만 모범논술로 앞에 나가 발표도 했다.
‘음, 은결 덕분이지만.’
여우가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은결 덕분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좋든 싫든 은결과 사귀게 되면서 주워들은 것이 많았다. 생각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관도 접했다. 벤야민에 대한 이야기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기에, 여우는 은결을 좀 더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성적은 자기보다 낮지만, 그가 보여주는 사고의 폭이나 정보량, 이해력 등은 여우가 아는 한, 또래 가운데 비교할만한 대상은 없어 보였다. 솔직히, 또래를 넘어서도 발견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여우는 왜 은결의 성적이 그 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예 작정하기라도 한 것일까?
‘말도 안 돼.’
여우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현직 고딩이 능력이 되면서 성적을 일부러 올리지 않는다니, 상상만으로도 불경하다. 그저 시험과는 별 연관도 없는, 그러면서 디립다 어려운 다른 책들을 열심히 읽는다고 학업을 소흘히 하게 된 것일 터였다. 여우는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적으로 그것이 옳았다. 하여간 내일이면 개학이다. 은결을 만나면 늑대, 고릴라와 힘을 합쳐 분노의 응징을 해야 하리라. 혼자 ‘우정의 오각형(solo’s pentagon)’에서 빠져 나갔으니 그만한 댓가는 지불해야 마땅했다. 그렇게 여우가 잡생각을 하던 사이 쉬는 시간이 끝났고, 교실에 학원 선생님이 들어왔다.
“조용히. 그리고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지난 시간 논술문 가운데 가장 잘 된 걸 하나 뽑아서 읽도록 하는데, 이번에는- 이리세(李理勢) 나와서 읽어보도록.”
이리세? 독특한 이름이었다. 여우는 지루하던 눈을 크게 뜨고 의자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명의 소녀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단발의 검은 머리가 보기 좋은, 귀여운 인상의 소녀였다. 하지만 쿠로사카나 미래와 같은 여자아이에 비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하기야, 두 사람에 비교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두 사람은 정말 굉장한 수준의 미소녀다. 미소녀라. 생각해 보니, 은결과 데이트를 하던 세연이라는 여자아이도 굉장한 미소녀다... 여우의 상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리세는 앞으로 나가 지난 시간이 자신이 적었던 글을 선생에게 받아 읽기 시작했다.
은결은 부드럽게 페달을 밟았다. 가을과 여름의 사이에 걸쳐선 대기가 자전거를 맞았다. 약간은 쌀쌀하고, 약간은 뜨거운, 융화되지 못한 열기와 한기가 하복을 넘어 피부 곳곳으로 느껴졌다. 기대는 기대대로,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끝난 방학에 대한 안타까움과도 닮은 날씨였다. 풍경은 여름이 가을이 되듯 흘렀다. 과거에 박살났다가 수복된 흔적이 뚜렷한 길목을 지나칠 때, 바람결에 날리는 머릿결을 한 손으로 쓸어 정리하며 미래는 말했다.
“오빠, 그러고 보니 요즘은 도로 박살나는 사건이 거의 없네. 그만뒀나 봐. 진상규명도 안 됐는데.”
“크, 큼. 왜, 그리워?”
순간적으로 은결의 심장이 두근, 뛰었다. 지금이야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예전,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불가피한 세금도둑 노릇을 드문드문 했다.
“그리울 것 까지야. 그냥 대체 무슨 수를 써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건지 정도는 알고 싶었으니까. 되게 신기하잖아. 하루 만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대규모 파괴를 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 의견, 이런 거 들어보면 고성능 폭탄이라도 사용한 것 같다고들 하던데. 그러니 이렇게 유야무야 묻히는 건 좀 아쉽지.”
“아쉬울 것도 많다. 평화로운 게 제일인 법이야. 암.”
과거에는 힘도 기술도 부족했다. 사념체를 없애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힘을 구사했다. 종종 도로를 파괴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짧은 기간 동안 은결은 부쩍 성장했다. 이제 어지간한 사념체를 없애기 위해 필요한 힘은 은결이 제어할 수 있는 에너지 용량에 비할 때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불가피한 파괴행위를 하지 않아도 된다. 만에 하나 과거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 결과는 ‘참상’이라는 단어로도 정리될 수 없을 것이다. 평화가 제일이다.
“뭐, 그건 그렇지만, 수수께끼를 향해 돌진하는 것 역시 인간의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아니겠어?”
미래는 아쉽게 은결의 말에 동의했다.
“수수께끼를 넘어 만나는 건 결국 수수께끼네요.”
“에- 오빠는 너무 패기가 없어. 나이에 안 맞게 말야. 맨땅에 헤딩하는 패기로 진보를 이루어내겠다는 각오 같은 거 없어?”
“음. 없어.”
남매가 가을바람을 타고 흘리는 대화는 햇살에 꿰이듯 이어졌고, 길은 하복 차림의 학생들로 점차 채워져 가고 있었다. 곧 성천 고등학교가 보였다.
“다들 오랜만. 방학은 잘 보냈어?”
교실에 들어선 은결은 자리에 앉으며 먼저 와 있던 동물원 삼총사에게 인사를 건냈다. 민성은 가방은 보이는 것이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고, 쿠로사카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크음...”
“음.”
“후.”
하지만 새학기 인사에 대한 셋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은결은 불길한 느낌을 받으며 셋의 상태를 살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얼굴이 하나 같이-”
‘짐승’ 같았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위안이 없기에, 은결은 순화해서 “...좋지 않다?”라고 물었다. 그러자 고릴라가 진중하게 양 손을 맞잡으며 은결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두텁게 굳어 있었지만, 가라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파리한 빛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비스의 입구를 여는 것 처럼 입을 열었다.
“...너 세연이라는 그 여자애하고 사귀고 있지?”
“!!!”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흥,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이로군. 그 정도로 눈치 채지 못할 줄 알고. 증거 자료도 다 있어! 이 배신자!”
늑대가 한 손으로 휴대폰을 잡고 흔들며 울부짖듯 말했다. 은결은 겨우 여자 친구 있다고 해서 배신자 소리를 듣는 것도 부조리한 일이라고 여겨졌지만, 일단은 쓸데없는 소문을 막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습이 안 되어 골치가 아픈데, 소문까지 널리 퍼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미래에게 알리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진지하게 사귀는 거라면 몰라도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세연은 외모는 물론 주변 상황이 주목을 끌기에 딱 좋다. 구설수에 오른다면 소문은 바퀴벌레 새끼 까듯 확장될 것이다. 푸른 귀신에 대한 원한만이 무럭무럭 건강하게 성장했다.
“응? 니들 모여 앉아서 꿀꿀하게 뭐하냐?”
그때, 민성이 쿠로사카와 함께 들어오며 말했다. 집중되었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 쪽으로 옮겨갔다. 그는 가방을 하나 쥐고 있었는데, 자신의 자리에 이미 가방이 있는 걸 생각하면 쿠로사카의 가방일 터였다. 개학 첫 날부터 대단한 정성이었다. 그림 같이 보기 좋은 장면이기도 했다. 제목은 ‘공주와 하인’ 정도가 어울릴 터였다. 고릴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변을 향해 다 들으라는 듯이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아, 그게 말야, 이 배신자 녀석이-”
다급하게, 은결은 손을 뻗었다.
“잠깐. 잠깐!! 바라는 게 뭐야?”
고릴라의 표정이 솜사탕처럼 풀어졌다. 그리고 도저히 어울리지 않은 태도로 몸을 꼬면서 말했다.
“그, 거- 네 동생과 어떻게 만남의 장을-”
“음, 그러니까, 어떻게 새끼 좀 쳐줘라!”
늑대가 고릴라 말 꼬리를 자르고 먹이를 낚아채는 것처럼 말했다. 둘 다 곤혹스런 요구조건이었다. 은결은 두통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을 맛보며 이번에는 여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담백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나는 됐어. 이미 네 덕 본 것도 좀 있고, 어차피 너 놀려 먹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처음 표정이 아주 멋졌으니까 나는 그걸로 만족.”
“음. 고마워.”
부담을 덜었기에, 은결은 여우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여우도 어차피 공범이긴 했지만 저 욕망의 화신 같은 두 짐승에 비하면 선량하고 천사 같았다. 어느새 곁으로 와 있던 민성은 “무슨 일인데?” 하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고, 말을 돌리던 은결은 쿠로사카와 눈이 마주쳤다. 은결은 쿠로사카의 시선이 여름과 가을 사이의 날씨를 닮았다고 느꼈다.
*인의검사님의 추천에 감사! 성원에 힘입어 여성 캐릭터가 추가 되었습니다.(뻥) 꼽사리 추천해 주신 음양삼님도.
*은결의 성은 모종의 사정으로 ‘박’입니다. 모종의 사정이 뭔지 아시는 분은 저와 우정의 악수!(ㅋㅋㅋ) 하여간 좋은 책을 추천 받았군요. 음, 꼭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사요나라 갱들이여, 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추천하지 않습니다. 문체, 캐릭터, 내러티브- 거의 모든 면에서 기존의 소설작법을 이어받지 않은, 기괴한 소설입니다. 그냥 읽을 때, 이 소설은 그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일체의 부정성이 집중되는 지점은 결국 ‘사요나라, 갱들이여’라는 제목의 의미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이 소설을 무척이나 슬픈 이야기가 됩니다.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부서진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의 끝’이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압도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은결은 ‘역사의 끝’을 체험한 세대가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그에 준하는 사태를 겪었습니다. 아버지의 몰락입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은결은 그때 대문자 GOD를 거세당했습니다. 그래서 은결이란 캐릭터를 결정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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