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희망을 위한 찬가 - 그 꿈의 이름은 무엇인가_(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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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 기울지 않는 여름의 햇살은 느긋한 이들의 마음을 재촉하는 일 없이 걸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물원 안의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었고, 점심을 먹은 다음에는 몇 가지 행사에 참여했다. 낙타를 타 본다던가, 돌고래의 코를 쓰다듬어 보고 먹이를 던져 준다던가 하는, 일상적으로는 해보기 어려운 일들을 체험해 보는 행사였다. 세연은 황홀한 눈을 하고 그 행사를 즐겼다. 은결은 세연에 비하면 조금 차가웠지만, 충분히 들뜬 마음으로 그런 행사들에 참여했다. 그리고 느긋한 마음이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을 즈음은, 이미 돌아갈 시간이 되어 있었다.
“헤헤.”
동물원의 출구를 나서는 세연의 얼굴은 밝았다. 함박꽃처럼 피어있는 소녀의 얼굴은 여름의 열기와는 다른 열기를 품고, 가끔 곁눈질을 하며 동행을 살폈다. 은결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채면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희미한 웃음의 이면에서 그는 들끓는 마그마와 같은 고뇌를 품고 있었다. 후회는 원시 시대 지구의 대기처럼 잔인하게 내리고, 회한은 막 생성된 지구의 표면처럼 뜨거웠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는데! 행복한 세연의 얼굴을 보자면 한숨 외에 구멍 뚫린 마음에서 새어나갈 것이 없었다.
동물원을 나선 두 사람은 올 때 그러했던 것처럼 택시를 타고 돌아왔고, 만났던 곳에서 내렸다. 그리고 세연은 다른 택시를 한 대 잡고는 거기 타면서 은결에게 말했다.
“저기, 오늘 즐거웠어요. 돌아가서 전화할께요.”
“음, 기다리고...”
사실 기다리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는 않다. 세연이 보내오는 문자라던가, 전화를 받을 때면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그래서 은결은 말을 하면서 스스로 고뇌했다. 어차피 다른 말을 할 재주도 없는 주제에 자기 말에 자기 스스로 껄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이중으로 껄끄러운 일이다.
“...있겠습니다.”
역시 다른 말을 할 재주는 없다. 세연은 되돌아온 말에 방긋 웃었다. 웃음의 순결함만큼, 은결의 마음에는 구멍이 푹푹 뚫렸다. 소녀를 속인다는 죄책감이 상황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고난과 엮어져 이루어내는 아름답지 못한 이중주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비하면 이것은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존댓말 쓰는 거, 그만 두는 게 어떨까요? 저기, 생각해 보면 나이도 같고, 이, 이렇게 사귀고 있기까지 하는데, 계속 경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상하잖아요?”
“......”
은결은 침묵한다. 세연의 말은 옳았다. 옳았기 때문에 그는 침묵한다. 두 사람의 나이를, 그리고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서로 간에 경어를 계속해서 사용해 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독특한 일이다. 그리고 이제 그 독특함을 해소하자는 세연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무척이나 온당했다.
“...그렇군요.”
“그러면?”
사막에서 꽃이라도 피어나게 할 것 같이 건강한 기대로 충만한 미소를 보여주며 세연은 묻는다. 그 활기찬 양기에 고통마저 느끼며, 은결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로 세연에게 말한다.
“앞으로는, 경어를 쓰지 않도록 하- 지.”
“응.”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돌아왔다. 은결은 그 대답은 들으며 마음 한 구석이 휑하니 슬펐다. 뭐라고 해야 할까, 무언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은 넘어버리고 만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어디선가 ‘웰컴 투 더 헬!’ 이라고 낄낄대며 속삭이는 것 같다. 그 목소리가 푸른 이빨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세연에게 경어를 쓰지 않으니 입안이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껄끄러웠다. 은결의 속내는 모르고 세연은 즐거워하며 말했다.
“그, 그럼 갈께!”
“그래.”
허무한 미소를 입가로 베어 물리며 은결은 말한다. 그리고 세연은 택시의 문을 닫았다. 텍시는 은결에게서 멀어져 갔다. 멀어져 가며, 세연은 차 뒤쪽 창문으로 계속 은결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은결은 거기 맞춰, 허전하게 손을 흔들었다. 곧 택시는 길을 따라 모퉁이를 돌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얼음처럼 굳은 공허한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은결은 중얼거렸다. 그야 빌어처먹을 퍼런 귀신 덕분이다.
“(얼굴이 왜 그래?)”
기적이 비일상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이 말은 기적이다. 경이가 비 일상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이 말은 경이다. 현실이 소설보다 기이하다면 이 말은 현실이다. 어쨌거나 이 말은 지금, 있을 수 없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비현실의 한 극치와 같은 모습을 했다.
“...!!!”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소녀는 순간적으로 충격에 굳었다. 소년은 창백하게 얼굴을 굳힐 뿐, 다른 말을 건내지 않는 소녀의 모습에 한층 걱정을 느끼고 다가섰다. 그는 걱정 어린 눈매로 소녀에게 물었다.
“(어디 아파?)”
“(아니, 아프지 않아. 그냥 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소녀는, 쿠로사카 유리에는, 그 말을 소년에게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얼굴이 왜 그래?’라고 하면서 천날 만날 우울하던 은결에게 말을 건내던 것이 자신이라고 해도, 도리어 자신이 그에게 그런 말을 들은 데서 충격을 먹었다고 설명을 하는 것은 역시 무례한 짓이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좀 우울한 일이 있었어.)”
“(우울한 일?)”
“(그래. 우울했지.)”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녀가 오늘 은결에게 ‘얼굴이 왜 그래?’ 따위의 개벽같은 말을 들어야 했던 이유. 은결은 호기심과 걱정이 뒤섞인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음, 너도 알지, 그러니까, 네가 전에 도와주기도 했던...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근처의 아이 말야.)”
은결은 쿠로사카의 말에서 즉각적으로 한 어린 아이를 떠올린다.
“(아, 그 아이? 임대 아파트 단지에 산다고 다른 단지 아이들에게 왕따 당하던?)”
“(그래.)”
“(그런데 그 아이가 왜?)”
“(오늘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떤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봤거든. 그러지 말라고 말리긴 했지만, 마음이 좋진 않군.)”
은결은 마음의 한 구석이 굳는 것을 느끼며, 쿠로사카에게 자신의 희망을 되돌린다.
“(그냥- 단순히 싸우고 있던 거 아냐?)”
“(아냐. 물어봤어. 여러 말을 하긴 했지만, 결국 아무런 핑계도 되지 않았지. 그냥 정리하면 그 아이를 괴롭히던 이유는 ‘마음에 들지 않아.’였어. 더구나 괴롭힘 당하던 아이는 동남아시아 계열의 혼혈로 보이던걸.)”
그러나 쿠로사카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 냉정한 대답이 말하고 있는 것은 명료했다. 가난한 지역에 살고 있다고 괴롭힘을 당하던 그 아이는, 가난한 지역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를 괴롭히고 있다는 말이다.
“(......)”
“(네가 내 얼굴이 우울하다고 느꼈다면, 아마도- 오늘 내가 겪은 그 일 때문이겠지. 역시 웃으면서 넘어가기엔, 쓴 사건이었으니까.)”
쓰게 웃으며 쿠로사카는 그렇게 말을 정리한다.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그 아이와 과거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했다. 아이는 외국에서 오는 이들을 싫어한다고 했다. 그 아이가 외국에서 오는 이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그 사람들은 엄마의 일자리를 뺏아 간다고 한다. 증오의 논리는 간단했고, 간단한 만큼 설득하기 어려웠다. 서글픈 이유였다.
은결은 생각에 잠긴 쿠로사카를 바라본다. 그녀의 고고한 자세는 우울함에 젖었다. 그래서 그녀가 느낀 쓴 감정의 파도는 금세 은결을 덮쳐 물들이고, 오래 도록 섞어 고인 물의 냄새처럼 마음에 달라붙어 나간다. 추악한 악취에 꽁꽁 묶인 마음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하도록 한다. 입을 열면, 그 악취가 몸 밖 어디론가 빠져나갈 것 같다.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군.)”
차게 웃으며, 쿠로사카는 마음을 자른다. 키리야미의 날 처럼 사태를 전환하는 그녀의 말에 은결도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음, 아냐. 아마 그런 건 모두가 생각해야 하는 문제일거야.)”
“(뭐 그렇겠지. 너무 모범적인 대답이라 재미는 없지만.)”
힐난하듯 쿠로사카는 은결의 말을 긍정했고, 옥상의 끝머리에 발을 대었다. 빌딩의 벽을 타고 올라온 여름의 바람이 한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은 높이 올렸다.
“(가려고?)”
“(이만큼 순찰해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오늘은 아무래도 나오지 않을 것 같잖아.)”
“(그럴 것 같아.)”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요리 하다가 모르는 게 생긴다면 나중에 연락할게.)”
“(응.)”
그리고 쿠로사카는 발을 박차고 허공을 가른다. 치솟아 올라가는 유성처럼 곧은 그녀의 유영은 아름답다. 곧 홀로된 은결은 한동안 쿠로사카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고개를 든다. 시선 가득히- 달이, 들어온다. 가만히 손을 들어, 저 달을 한 손에 쥐어 본다. 공허만이 손에 닿고, 공허만이 손에 쥐어진다. 한동안 그리고 가만히 서 있던 그는 굳은 표정으로 심호흡을 했다.
“후우-”
그리고 은결은 역장을 형성해 허공에 섰다.
*죠와님의 추천에 감사!
*인류를 비참하게(꿈에서 깨어나게) 한 지식은 따로 언급할 필요 없이 이 글에서 언급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 그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가령 불완전성 정리라던가. 그리고 그들 지식은 지성사 같은데서 보편적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특별한 출전이 있다기 보다는.
*지석님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enzime님과 aliel83님이 답변하셨으니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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