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희망을 위한 찬가 - 그 꿈의 이름은 무엇인가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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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밤의 도시는 적적했다. 인적이 드문 도로변의 한산함은, 하지만 변함없이 많은 차량들이 채우고 있었다. 그들 차량의 느린 걸음에서는 때때로 초조함 같은 것이 엿보였다. 마음처럼 내리는 비 가운데서 은결은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허공에서, 비는 신경질을 내는 것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주변으로 튕겨져 나갔다. 은결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쿠로사카가 서 있었다. 그녀의 꼿꼿하고 정리된 자세는 오늘 밤에도 여전히, 하지만 독특하게 아름다웠다. 비오는 밤의 질척한 대기가 그녀의 선을 은밀히 숨기며,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은결이 시선을 돌려 쿠로사카를 바라봤다.
“(쿠로사카.)”
“(응?)”
“(가령, 가령 말야, 사귀자고 한지 일주일 만에 헤어지자고 하는 놈이 있으면 그 놈은 벼락 맞아 죽어도 마땅한 거겠지?)”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요상한 질문을 했다. 쿠로사카는 잠깐 황당한 표정을 보였다가 입을 열었지만, 곧 다물었다. 그녀는 ‘그야 당연-’이라 시작되는 간결한 답을 되돌릴 생각이었지만,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는 말하지 않기로, 살짝 두근거리는 심장과 함께 결정했다.
“(흠,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그럴까?)”
“(연애를 규정하는 것은 사랑이지 신뢰가 아닐테니까. 사랑이 없다면 굳이 신뢰를 지속해야할 필연성은 없는 것 같아. 그런 경우 도리어 헤어지는 것은 신뢰를 위한 방법일 수도 있겠지. 사랑이 없을 때의 연애는 단순한 기만이 될 테니까.)”
“(그도... 그런가. 응, 그래. 그런 것 같아.)”
은결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쿠로사카의 말이 옳았다. 사랑은 사랑만이 규정할 수 있다. 봉건적 세계관이 무너진 이후, 모든 종류의 전통은 의심과 반박의 대상이 되었다. 때로 그것은 인습이라는 이름이 붙어 버려진다. 이제 아무도 옛날에 그러했다는 이유로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 개인은 해방(추방)된다. 사랑도 해방된다.
“......”
사랑은 해방됐다. 아무 것도 사랑을 구속할 수 없다. 성별, 국가, 인종, 계급. 그래서 때때로- ...사랑과, 소통과, 해석과, 권력과, 폭력과- 사고가 끓어올라 사고를 막았다. 푸른 이빨의 말이 벼락처럼 그를 습격한다. ‘그러나 너는 그녀를 네 멋대로 재단했지!’ 불모감에 숨이 막혔다. 은결은 눈을 감았다가 한참 만에 숨을 내쉬었다. 비처럼 마음도 우울하다. 앞길은 아마도 구만리장천인데, 구만리장천이 새파랗게 개여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야, 언제는 맑았냐마는.
“......”
한편, 은결에게 충고를 하고 난 쿠로사카는 매우 짜증스런 기분이었다. 쓸데없는 말을 한 것만 같았다. 자기 자신을 향해, 무언가 섬연하고 고통스런 한 마디를, 더 없는 경멸 같은 것을 되돌리고만 싶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 굵게 떠오른다. 그래도 은밀한 기대 같은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층 짜증스러운 것이지만.
하늘은 말갛게 개였다.
은결은 약속 장소로 나갔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세연이 다소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먼젓번 만났을 때처럼 새하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여름의 빛을 머금는 것처럼 반사하며 바람에 나풀거리는 그녀의 옷차림은 매력적이었다. 얼굴이 타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다소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쓴 것도 특징적이었다. 종합적으로 조금 보기 드문 패션이었지만, 옷걸이가 워낙 좋아서, 사람들은 대게 놀란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고 지나가곤 했다. 은결은 도착한 세연을 맞이했고,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동물원으로 갔다.
택시 아저씨의 농섞인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입구 앞의 대로변에 내리자 평일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직 날씨도 더운데다 방학 중인 덕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주로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들로 보였고, 젊은 커플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 보였다. 두 사람은 동물원의 입구로 갔다. 수행이 은결에게 넘긴 티켓은 자유이용권이다. 동물원에서 하는 행사를 모두 무료로 참여, 관람할 수 있는 꽤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동물원 입구의 안내인에게 표를 내니 그는 팔찌 같은 것을 두 사람에게 건냈다. 은결과 세연은 각자의 팔목에 그것을 걸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우리 저기 가 봐요.”
한동안 정리된 동물원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세연이 은결의 팔을 잡고 한 쪽을 손짓했다. 그녀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에 조금 놀라면서 은결은 선선히 그녀의 요청에 응했다. 세연의 얼굴도 붉었던 것이, 그녀 자신의 자기의 행동을 의식했던 모양이었다. 살짝 헛웃음이 나왔다. 세연이 가고자 했던 곳에는 이미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행사 내용은 일정한 공간 내에 동물의 새끼들을 풀어놓고, 잠시간 사람들과 함께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강아지를 풀어놓고 있었다. 유료입장이었지만 두 사람은 물론 무료였다. 하나 강아지들에게 주기 위해 마련된 간식은 따로 비용을 내야 했다. 두 사람은 마른 쥐포 조각 같은 것을 하나씩 샀다.
두 사람은 안내원을 따라 순서를 기다려 잔디뜰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강아지들이 낑낑거리며 건강하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강아지들과 놀고 있었다. 세연은 얼른 쭈그려 앉아 이곳 안내원에게 산 먹이로 강아지들을 유혹했다. 곧 몇 마리의 강아지들이 다가와 그녀가 주는 간식을 먹으며 귀엽게 혀를 내밀었다. 맹랑하게 흔들리는 꼬리가 강아지들의 심경을 설명하고 있었다. 세연은 눈을 빛내며 즐거워했다. 은결은 그 광경을 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헤헤, 은결씨도 해 봐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세연이 수줍게 말했다. “그럼 저도.” 라면서 은결도 순순히 강아지들과 놀았다. 친근하게 기대어 오는 모습들이 귀여웠고, 쓰다듬을 때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털들의 간드러지는 부드러움도 기분이 좋았다. 부드럽게 웃으며 강아지들과 사귀는 은결의 모습을 빠진 듯이 바라보고 있다가, 은결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자, 세연은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다. 그녀는 겨우 균형을 잡고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성급하게 말했다.
“그, 그런데 언젠가 학교 친구가 시골 할머니 댁의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어미가 새끼를 물어 죽였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그건 흔히 개가 냄새로 세상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분만 후라면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일테고 새끼들도 약하니, 외부의 침입자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할 수 밖에 없는데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새끼들에게서 느껴지면 불안함에 의해 공격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결과적으로 새끼를 죽이게 됩니다.”
은결은 웃음기를 감추고 차분하게 답했다. 세연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냥 새끼 돌려주면 외부인 같은 거 전혀 안 보일 텐데 어째서 겨우 냄새 같은 거 가지고...”
“개에게는 후각이 인간의 시각만큼 중요합니다. 눈에 안 보이고 냄새로 느껴진다면 그들은 냄새를 신뢰합니다. 시각정보를 버리지요. 사람과는 반대로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합니다. 개들은 그렇게 진화되었습니다.”
돌아온 은결의 대답에 세연은 놀랍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개들이 후각 같은 믿을 수 없는 감각기관을 눈만큼 신뢰한다는 것이 어쩐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의 종아리 근처에는 여전히 강아지들이 오가면서 끙끙댔고, 몸을 부볐고, 코로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런- 왜 그렇게 이상하게 진화했을까요?”
“어미가 새끼를 물어 죽이는 것과 같은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후각에는 후각 나름의 장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개라는 종은 성공적으로 생존해 있지요. 가령 시각과 달리 후각은 장애물이 있더라도 상대를 어렵지 않게 추적하게 해 줍니다. 또 빛이 없더라도 사물을 판별할 수 있기도 하고요. 양쪽 모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은결은 가지고 있던 간식 하나를 다시 근처의 강아지 한 마리에게 주면서 세연에게 설명했다. 강아지는 기껍게 다가와서는 앙증맞고 성급하게 간식을 물었다. 근처에서 다른 강아지 한 마리가 다가와 간식의 다른 한 쪽 끝을 물었고, 두 마리는 서로 양쪽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세연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살짝 웃었다.
“그렇군요. 후후, 그럼 이렇게 새끼들이 귀엽게 느껴지는 것도, 귀여우면 무언가 이득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다들 귀여운 건가 보지요?”
“그건 아마 방향이 바뀐 말일 겁니다. 새끼가 귀여운 게 아니라 인간이 새끼를 귀엽게 보도록 진화했다고 보는 게 더 정답에 가깝겠지요. 새끼를 귀엽게 느끼게 되면 그들을 아끼게 되고, 보호하게 되니 결과적으로는 종의 유지와 번성에 기여하게 됩니다.”
“헤에-”
단박에 돌아오는 대답에 세연은 감탄했다. 은결이 무척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쪽으로도 그러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철학이라던가, 경제라던가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은결은 자신을 향하는 세연의 눈길에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머뭇머뭇 말했다.
“이, 이런 건 별로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냥 비용과 효율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동물들의 다양하고 독특한 모습 가운데 상당수는 몇 가지 주된 원칙이 변주된 결과 같은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물뿐만이 아니다. 세상에 나타나는 혼돈스런 무수한 모습의 구조를 살피면 사실 그것을 구성하는 주된 원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복잡성은 그런 단순함이 무수하게 겹친 결과 같은 것이다. 경제도, 사회도, 마침내 세계도- 은결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혼돈이 자신을 집어삼키려 들이닥침을 느낀다. 때문에, 때문에 연금술은- 아아. 어디에도 없는 세상. 자아는 무수한 타자가 겹치고 겹친 찌꺼기 같은 것이라 드러냄으로서 자아를 해체하는 세상. 철썩! 파도치는 혼돈이 자아를 잠식한다.
“-에, 괘, 괜찮으세요?”
세연의 목소리에 은결은 정신을 차렸다. “괜찮습니다.” 은결은 겨우 답했다. 이마와 손바닥으로 식은땀이 흥건하게 느껴졌다. 안타까움이 눈물처럼 가슴으로 올라오려 하는 것을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세연은 걱정스런 얼굴로 은결에게 말했다.
“강아지들 줄 간식도 다 떨어졌고, 이만 나가도록 할까요?”
“예. 그게... 좋겠군요.”
그리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행사장 밖으로 나갔다. 그제까지 두 사람 주변을 맴돌던 강아지들이 떠나는 뒤를 잠시간 끙끙거리며 쫒다가 멈추고 주변을 혼잡하게 돌아다녔다. 곧 다른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추천해 주신 무협지님께 감사. 저도 소싯적에 무협지 많이 팠습니다. 만화방 뒤지며 세로읽기로도 참 많이 읽었죠. 아아. 추억의 시절이여.
*은결은 수행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결은 수행과 같은 거인도 비극을 해결하는데 실패한 것에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서브라임은 몰라도 죽음의 한 연구는 정말 잘 사신 것입니다. 비록 어렵겠지만 충분한 시간을 들이고 꾸준히 읽을 가치가 있는 글입니다. 아니, 정정. 서브라임도 좋은 글입니다!! 음. 그리고 박상륭 선생이 소외된 것은 폄하된 결과가 아니라, 우러러진 결과입니다. 너무 대단한 글이라 다들 감히 평론하기 어려워했던 것이지요. 자신 있게 이해했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피서를 갈지도 모름. 몇년 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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