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희망을 위한 찬가 - 그 꿈의 이름은 무엇인가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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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책 위에서 손끝을 움직인다. 시선이 아니라 지문으로 글을 읽는 것 같은 모습이다. 낡은 표지 위에는 영어로 굵게 타이틀이 찍혀 있다. ‘seven pillars of wisdom' 그 영어를 한글로 해석하면 ‘지혜의 일곱 기둥’이 된다. 그의 옆으로 인영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몸을 기대는 인영을 느끼며 그는 시선을 책 위에서 떨어뜨리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이야기를 한다. 시를 읊는 것 같은 어조로, 자식을 부르는 것 같은 감정을 담아.
“(얼마 전에 전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쓴 것을 보았다. 거기서 그는 현실과 진실을 분리된 개념으로 다루고 있었다. 현실은 구성된 것이며, 진실과는 다르다고 말이야. 참으로 그러하지. 현실은 진실이 아니고, 진실은 현실이 아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영지를 위한 첫 걸음이기도 하다.)”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현실과 진실을 구분해 인식하는데서 인식을 넘어서는 인식이 가능해 진다. 인식을 넘어선 인식을 할 때, 현상을 영혼을 침범하지 못한다. 영지가 혼에 머물러 세계를 조율하도록 허락한다. 현실을 진실로 생각할 때, 그는 거짓된 신과 그가 만든 추악한 세계의 노예다.
“(비를 위해 신께 기도하고, 해를 위해 신께 기도하고, 수확을 위해 신께 시도하고, 병충해를 위해 신께 기도하던 시절의 한 농부를 상상해 보거라. 어느 날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문득 생각한다. 비는 왜 오는 것일까? 왜 해는 뜨는 것일까? 왜 병충해는 생기는 것일까? 모두가 그저 신에게 기대어 농사를 지어 삶을 이어가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하늘을 생각하고, 땅을 생각하고, 곡물을 생각한다. 그것들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지 궁구(窮究)한다. 하지만 아무리 궁구해도 답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는 겨우겨우 그것들의 원리를 하나하나 알아가지만 그래서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농사는 엉망이 되고, 먹고 사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문제를 탐구하는데 정신이 팔린 그를 주변에서는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굶주림과 조소 가운데 신을 믿지 않는 그에게 남겨진 길은 아마도 파멸뿐이다.)”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책을 덮는다. 그리고 뒤표지를 드러내 보인다. 하얀 색의 표지 위에는 글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인쇄되어 있다. 해석하면 이러한 내용이다.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꿈을 향해 행동한다. 그렇다. 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 그는 그 구절을 눈으로 훑고는 한번 싱긋이 웃어 보인다. 이어, 그는 그림자를 향해 정다운 시선을 주며 묻는다.
“(너라면 이 꿈의 이름을 무엇이라 붙이겠느냐?)”
은결은 역장을 박찬다. 응축된 에너지가 역장을 치는 순간 그는 대기의 벽을 돌파한다. 마하를 넘어선 그의 몸은 중력을 무시하는 것 처럼 곧은 직선을 그리며 사념체를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에 은결의 눈앞으로 연기처럼 뭉클거리는 사념체가 들이닥친다. 은결을 막기 위한 사념체의 공격은 어느 것 하나 통하지 않았다.
일초가 영겁처럼 긴 극단의 시간 가운데 그는 마음을 굳히고 술식을 전개한다. 그리고 허리를 돌려 주먹을 휘두른다. 그의 주먹 끝에는 역장과 술식이 복잡하게 얽혀 부정한 것을 소멸시키는 힘을 담는다. 사념체는 자신의 몸을 겹쳐 은결의 공격을 막고자 한다. 그리고 충돌이 일어났다.
-쾅!
일대에 펼쳐진 마법적인 힘이 강대한 에너지를 포용하며 부드럽게 해소한다. 하지만 방금 은결이 내뻗은 주먹의 힘을 완전히 소화해 낼 수는 없었다. 공간이 흔들리며 폭음 같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사념체의 방어도 허무하게, 은결의 주먹은 사념체의 몸 정중앙을 향해 파고들어 있었다. 은결은 기합을 외친다.
“하앗!”
동시에 그의 주먹에 펼쳐졌던 술식이 반응하며 강력한 빛을 낸다. 그 빛은 사념체의 존재본질을 분해한다. 시커먼 구름 가운데서 햇살이 뻗어 나오는 것처럼, 사념체의 몸 곳곳에서 굵고 가는 빛줄기가 눈부시게 뻗어 나온다. 빛의 창이 넓어지며 안개를 메말려 버리는 햇살처럼 사념체를 흩어버린다. 해체해버린다. 소멸시켜 버린다.
-!!!!!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처절한 비명 같은 사념을 주변으로 널리 흩뿌리며 사념체는 은결의 술법 아래서 해체 당했다. 아픔과, 질투와, 시기와, 열등감과, 초조함과, 좌절감과, 아득함과, 슬픔과, 조임과, 공포와, 경멸과, 우월감과... 규정된 언어로 그 사념이 담은 감정의 종류를 모두 표현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음의 결이 결국 이루어내는 미세함의 종류만큼 사념의 종류는 다양했고, 그 결은 언제나 언어가 이루어내는 규정을 뼈대 삼아 멀리까지 뻗쳐간다.
머지않은 곳에서, 차분한 눈동자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의 차분함이 이면에 담고 있는 것은 차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침묵하는 눈길은 사태를 직시하고, 차갑게 식은 손길은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지만, 눈동자가 직시하는 것은 한 사람의 모습이었고, 그 사람은 안타깝게 불안해서, 싸늘하게 굳은 마음으로만 그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그 시선의 주인은 소녀였고, 그 소녀의 이름은 ‘쿠로사카 유리에(黒坂百合絵)’다.
“......”
말없이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은결은 허공에 생성시킨 역장 위에 발을 올리고 천천히 주먹을 내렸다. 곧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후우.” 무미건조하지만 만족스러운 한숨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먹을 쥐락펴락 하며 바라봤다.
‘성공... 했군.’
다행스런 일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마음을 타고 흘렀다. 방금 그가 시전 했던 술법 중에서는 사념체를 구성하는 사념의 조각들이 자신에게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종의 소형 결계를 자기 자신에게 쳐서 사념체의 네거티브 웨이브가 의식에 관여하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완전하지 않았지만 견딜만한 수준까지 영향력을 억제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앞으로 전투를 수행하는데 큰 지장은 발생하지 않으리라. 기술 자체도 쉽지 않았지만, 전투 가운데서 다른 여러 술법과 복합적으로 시전해야 하는 술법인 만큼 푸른 이빨의 힘을 얻기 전 까지는 묘기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은결은 역장에서 내려 옥상에 안착했다. 쿠로사카가 그를 맞이했다.
“(괜찮아?)”
“(응. 괜찮아.)”
“(그런 것 같군. 오늘은 평소보다 움직임이 훨씬 더 좋았어. 혼자 싸우도록 해 달라고 말했을 때는 좀 걱정스러웠지만.)”
은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쿠로사카를 대하기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푸른 이빨에게 몸을 빼앗겼던 것을 비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우려됐다. 쿠로사카의 완고한 성격상 경우에 따라서는 당장 세연을 죽이려고 들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지금의 푸른 이빨은 충분히 강하니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위험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었고, 그래서 섣불리 대화를 교환하기는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어딘가 부드러운 쿠로사카의 태도는 은결에게 미묘한 불길함을 느끼게 했다. 그 빌어먹을 귀신새끼는 설마 그녀에게도 무언가 수작을 부려놓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
쿠로사카는 말없이 속앓이를 하고 있는 은결을 힐끗 바라봤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결의 내면이야 어찌되었든, 익숙하고 완고한 장면이었다. 주저없이 염원하는 것만을 바라보며, 불안하게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시선. 은결의 시선에서는 쿠로사카는 그러한 것을 느껴왔다. 그녀는 그 시선이 자신을--
단호하게 마음을 끊고, 쿠로사카는 얼마 전 은결에게서 들었던 ‘마음’의 감상평을 떠올렸다. ‘시선을 직시함으로서 시선을 견딜 수 없게 된 이의 이야기.’ 그는 그렇게 이야기 했다. 어제 쿠로사카는 ‘마음’의 완독을 끝냈지만, 은결이 말했던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과거 읽었을 때 보다, 그녀의 마음에 소세키의 소설 '마음' 은 훨씬 더 깊은 흔적을 새겨 놓았다.
그녀는 그 책을 읽으며 얼마 전 해변가에서의 싸움을 떠올렸었다. 그때 그녀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싸웠다. 텅 빈 공허를 향하는 것처럼, 그녀는 싸웠다. 싸움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승리하는 것이 목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피로할 뿐인 행위였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승리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키리야미를 들었고, 항거했었다. 그저. 그저.
“......”
그때의 자신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어째서 마음을 읽으며 그때의 자신을 떠올렸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은결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까? 먼지 낀 안경을 닦는 손길 같이 쿠로사카는 말했다.
“(그러고 보면, 이제 곧 여름 방학도 끝이네.)”
“(아아. 그러고 보니 이제 일주일이면 끝나는군.)”
먼 곳을 향하던 은결의 시선이 쿠로사카를 향해 돌려진다. 여름의 습기와 열기를 품던 바람이 잔잔하게 숙여가는 것을 피부가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가깝지는 않지만, 잔기침을 하며 걸음을 걷는 가을을 은밀하게 느낀다. 쿠로사카는 살짝 웃으며 도천시를 바라봤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이렇게 오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뭐 나쁘진 않았지?)”
“(...그래.)”
잠깐 침묵한 다음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침묵은 이곳 생활이 좋았다던가 아니었다던가 하는 것을 가늠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침묵의 사이로, 좋았던 것들이 떠오르도록 자기 자신에게 여유를 주었을 뿐이다. 은결은 그녀의 대답에 기쁘게 말했다.
“(나도 덕분에 친구가 한 사람 더 생겨서 좋았어. 특히 나와 같은 영역에서 활동하는 친구는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 역시 너와 알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이곳 생활을 대체로 마음에 들었군.)”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늘하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은결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
“(앞으로도 잘 지내.)”
좌절감에 무너진 은결의 표정을 보며 쿠로사카는 드물게 맑고 유쾌하게 웃었다. 은결을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괜찮았다- 라는 대답은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정말이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불편한 것들을, 슬픈 것들을, 안타까운 것들을 몰라도 좋았을 테니까. 그래서 손을 뻗어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을 테니까. 그 손이 닿을 수 있을지 의혹을 가지지 않아도 좋았을테니까.
“(음.)”
은결은 약간 불만어린 기색으로,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생각의 초점을 다시 세연에게로 맞췄다.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온다. 푸른 이빨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 하다.
*추천이나 감상은 원래 부담 없이 하는 것! 비평은 좀 품을 들여야 하지만요. 하여간 성원은 대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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