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78화 (178/300)

#   179-희망을 위한 찬가 - 은결 되기(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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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에서 은결은 글을 읽는다.

-여기까지 나는 45년 이후의 자본주의와 한국 민주주의의 진행 과정,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상관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들 이야기가 종국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간단하다. 민주주의의 성숙, 혹은 발전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의 중산층 확대에 기반 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성찰을 위한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이야기를 바꾸면 양극화가 심화되어 중산층의 몰락이 심해진다면 민주주의 자체가 몰락하고, 그 결과 참혹한 세계가 성립될 거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참혹한 세계의 이름은 ‘파시즘’이다.

사실 파시즘이란 개념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파시즘에 대한 긴 시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합의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시즘에서 일관된 정치원리를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런 위험을 딛고서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철저한 타자의 체계다. 그것은 칼 슈미트가 일찍이 주장했던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극단까지 확장해 실천한다. 파시즘은 ‘우리’와 ‘너희’를 구분해 우리를 주장하고 너희를 불길하게 바라본다. 그 세계에서 초대받지 않은 모든 외지인은 공포스런 ‘적’이 된다. 거기서 소수는 모든 것을 다수에게 양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그들은 언제나 ‘동지’에서 ‘적’이 되어 척결의 대상이 된다.

파시즘의 최대 지지세력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회의 ‘약자’다. 인간은 진실의 세계에 살지 않고, 현실의 세계에 산다. 현실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그가 바라보고 인식되는 세계의 모습은 해석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현상이라도 바라보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있어 인간이 보이는 경향성은 언제나 ‘이기’적이다. 현상을 해석함에 있어 확고한 정의관을 기준에 세우기보다 자기의 편리함과 이해관계를 우선시하고 그것에 정의로움을 덮어씌우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이 해석의 이기적 경향을 극복하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장기간의 교육을 거친다고 해도,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에 대해 비판적 성찰 능력을 갖추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특히 약자의 입장에 있는 이들, 삶에 허덕이는 이들이 차분하게 사안을 고민하며 자신에게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 즉 현실의 진실성을 검토해 봄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쉬운 일이다. 그러한 성찰은 언제나 많은 시간과, 여러 개념적 도구를 활용한 정신적 노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약자’에게 세계는 피상적 인식에 기초한 신비적이고 압도적인 것의 압박이고, 공포와 무력감의 대상으로 나타날 뿐, 반성의 대상이 되기 어렵고, 여기서 기대되는 것은 ‘구원’이지 진취적 개선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이 진실이 아니라 현실의 세계에 산다면, 그리고 다수인 ‘약자’의 현실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초가 되는 것이 피상적 체험에 비롯한 무력과 공포, 그리고 ‘언어’라면, 강자의 입장에서 민주주의는 아주 수월한 통치의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즉, 강자는 사회의 주류담론 일반을 조종(지배)함으로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춰진 현실을 만들어내 그것을 다수의 현실로 바꾸어 낼 수 있다. 이 현실의 구성과 전파, 다시 말해 ‘헤게모니’의 장악을 위해 가장 간단한 방법론은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희생양’을 내세우고 그것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그럴듯한 언어를 사회 전체의 것으로 전파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좋은 ‘희생양’은 약자들의 삶 가운데 피상적이지만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그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외부인이다. 그것은 가령 외국인 노동자이고, 가령 외국이고, 가령 여성이며, 가령 외국의 자본이며, 가령 소수 민족이다.

‘약자’는 피상적 체험 가운데 그들에게 피해를 입었고, 강자가 구성한 현실은 그들의 고통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한다. (강자의 책임은 제시되지 않거나 거짓으로 포장되어 민족과 국가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제시된다.-즉, 자신들을 ‘메시아’로 치장한다.-) 개념적 도구의 취득은 물론, 인식을 반성할 정신적 노동을 보장하지 못하는 생계의 문제에 처한 약자들이 인간 인식의 (공포와 무력감에 물든)이기적 경향성과 함께하여 그러한 구성된 현실로 세계를 인식할 때, 지극히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완성된 민주주의를 일거에 파시즘의 우파 독재체제로 전락시킬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은 이러한 메커니즘에 알몸으로 노출되어 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이는 한국의 정치체제가 특정한 경제시스템에 완恍?복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민주주의를 알몸뚱이로 벌거벗긴 경제시스템의 이름은 ‘신자유주의’다...

은결은 종이를 접었다. ‘그래서 ‘약자’에게 세계는 피상적 인식에 기초한 신비적이고 압도적인 것의 압박이고, 공포와 무력감의 대상으로 나타날 뿐, 반성의 대상이 되기 어렵고, 여기서 기대되는 것은 ‘구원’이지 진취적 개선이 아니다.’ 오늘 아버지의 글 가운데서는 이 부분이 가슴에 박히는 것 처럼 아팠다.

“...후우.”

아픔을 뜨거움과 섞어 외부로 흘러보내는 것 처럼 그는 길게 숨을 쉬었다. 눈앞에 펼쳐진 도심의 세계는 형형의 욕망이고, 형형의 욕망을 쫒거나 형형의 욕망에 쫒기며 많은 이들이 어둠에 젖은 길에서 네온사인의 빛에 기대어 걷고 있었다. 카프카가 생각났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 버린다. 그의 다른 소설 ‘심판’에서, 주인공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죄로 인해 사형을 받게 된다. 그의 다른 완결되지 않은 소설 성에서, 주인공은 관료체제의 사소한 실수로 인해 올 이유가 없는 마을에 측량을 위해 간다. 그들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 상황을 타개하는데 있어 완전하게 무력했다. 그들은 그저 압도적으로 거대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상황에 억눌려 발버둥 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카프카의 소설은 보는 관점에 따라 종교적이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에 인간 스스로가 억압된 채,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도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압박하는 것은 그저 거대했고, 그저 잔인했고, 그저 부지런했다. 개미처럼 깔린 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소설에서 현상의 타개는 도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인간이 고통에서 구원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적인 존재의 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은결은 브레히트의 혐오감을 이해한다. 그는 이런 이유로 인해 카프카의 소설이 유대적 파시즘을 성립시키는데 일조했다고 불쾌해했다. 벤야민은 그 해석에 반대했지만 은결은 브레히트의 분노에 더 많은 공감을 느낀다. 카프카의 소설은 구원자를 염원하게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러한 억압하는 강대한 체제에 대해 인간이 찾을 수 있는 구원자의 현실적인 형태는 ‘정치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가는 인간이며, 욕망하는 자고, 자신의 당파성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런 존재에게 구원을 기대하게 될 때, 그것은 최악의 억압으로 귀결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의 목표는 심지어 구원이 아니고, 유권자들이 자신에게 구원을 갈망하게 하는 것이다. 카프카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의 소설은 그러한 결론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의 글은 읽는 이에게 항거할 수 없는 재앙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은결이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은 ‘정치가(메시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강대한 체제의 억압에서 신비를 벗어내는 것이다. 이해하게 되면 두렵지 않게 된다. 신비와 두려움이 사라진 억압은 분노가 된다. 분노하는 자는 바꾸기 위해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마치 신적인 것으로조차 보이는 체제의 복잡성에 대항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간의 저열한 인식을 넘어서서 좀더 확고한 지식을 취득하는 것이다. 세상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충만해 있지만, 체제가 구사하는 억압의 모습은 많은 부분 ‘말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일 뿐,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은결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역설이다. 약자이기 때문에 세상을, 자신을 억압하는 힘을 신비롭게 바라보고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세상에서 개개인이 신비를 벗겨내야 약자는 약자를 벗어날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키게 됨에도. 그러니까 탈출은 기대하기 어렵다. 약자는 약자를 벗어나야 약자를 벗어날 수 있는 최소 조건을, 신비에 기대지 않는 정신을 배울 수 있다니. 그 역이 성립하는 경우는 희소하다.

이건 마치 함순의 소설 ‘굶주림’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처한 역설 같다. 그는 글을 쓴다. 하지만 글을 쓰려면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 그러나 먹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 그는 굶주려서 글을 쓸 수가 없고, 글을 쓸 수가 없어 한층 굶주리게 된다. 지독한 구속이 죽음의 얼굴로 주인공을 엄습한다. 차이가 있다면 굶주림의 주인공은 스스로 자청한 것에 가깝고, 구속된 약자의 역설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다. 그리고 굶주림과 구속을 벗어나는 방식은 양자 모두 비슷하다. 굶주림의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그는 그가 머물던 도시(세상)를 떠나버릴 뿐이다. 신비에 억압당한 약자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무력과 구원을 넘어서는 위대한 ‘전체(민족, 국가, 신)’에 몸을 기탁하는 것이다. 굶주림이라는 소설에 이미 드러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 있지만, 실제로 크누트 함순은 이후 파시스트가 된다.

파시스트 돼지들!

-지독한 감정이 은결을 엄습한다.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올린다. 어둠이 무너지며, 어둠의 가면을 쓴 지독한 감정들이 그의 심장을 찌른다. 그것은 말이 아니지만, 그 말이 아닌 것이 무엇에 닮은 표현인지는 알 수 있었다. 죽어버려라. 그 감정들은 삶을 저주하고 있다. 그래서 그 아픔은 결국, 푸른 이빨의 모습을 닮아 있었- 다. ...아니야.

“...굶주림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말하는 약자라기보다는 나와 닮았군.”

은결은 고통의 감정을 갓길로 흘려보내는 도랑을 파내듯이 흘려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굶주림의 주인공이 격는 고통은 사실 동정 받기 어렵다. 그가 겪는 굶주림은 자청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그런 상태로 몰아갔다. 그가 굶지 않아도 좋은 상태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주변을 증오하며 무너져 내린다.

마치, 그래 마치, 내가 그러하듯이.

은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을 떴다. 눈뜬 그는 버스 밖의 흔들리며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 중얼거린다.

“나도 이런 현실도피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후...”

수줍게 웃는 세연의 아름다운(공포스런) 얼굴이 떠오른다. 은결의 미간에 골이 패인다.

*piENarA 님과 유혹의 제왕님의 추천에 감사!

*챕터 끝났습니다.

*이 글이 제공하는 퍼즐조각을 맞춰내는 독자 분들을 때때로 보면 기쁨을 느낍니다. 그런 조각들을 맞춰 제가 말하지 않은, 하지만 글을 지배하는 것들 까지도 후에는 발견해 내시면 기쁘겠습니다.

*느낌만 따지면 한 열권 적은 것 같은데 분량 따지면 5권을 아슬아슬하게 넘길까 말까 한 정도... 왠지 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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