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74화 (174/300)

#   175-희망을 위한 찬가 - 은결 되기(13)

#

푸른 이빨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아파트 단지의 공동놀이터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수목의 근처에 모여 있던 몇 명의 아이들이었다. 상당히 먼 곳이었다. 한 명의 아이를 다른 여러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고, 한 아이가 전면에 나서 국면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요컨대, 여러 아이가 한 아이를 왕따 시키고 있었다.

푸른 이빨은 같잖다고 생각했다. 그는 왕따 당하는 놈도, 하는 놈도 다 병신 같다고 생각한다. 왕따 하는 놈은 얼마나 자신에게 자신이 없으면 집단으로 몰려가서 ‘우르르 시끌벅쩍 꿀꿀꿱꿱’ 거리겠느냐 하는 것이 그의 논지고, 왕따 당하면서 괴로워하다가 자살할 거면 주도하는 놈 목줄기라도 물어뜯어 죽여버리면 될 것이지 뭐 하러 자살 따위의 염병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진정 강한 자는 주변의 찌질거림을 모두 무시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며, 길바닥의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 자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집단에 자신의 정체성을 맡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나 처럼.’

참고로 나머지는 다 그냥 좆병신이다. 푸른 이빨은 자리에 서서 계속 그 아이들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쪼다새끼들’이라 한 마디 흘리고 그냥 지나갔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괴롭히는 아이들 가운데 앞에 나선 놈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푸른 이빨은 은결의 기억을 뒤졌다. 순간적으로, 아이에 대한 기억을 떠올랐다.

“허.”

어이없음에 웃음이 나왔다. 꼬맹이는 굉장히 저열한 놈이었다. 꼬맹이는 과거 은결이 도와준 적이 있는 놈이었다. 그때 꼬맹이는 지금과 정 반대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괴롭힘 당하던 놈이 이제는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 앞에 나서서, 주변을 이끌고, 기꺼이, 기꺼이. 주먹질을 하고, 침을 뱉고, 욕설을 하고- 욕도 아주 한심했다. 니 애미가 어쩌니, 니 애비가 어쩌니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때를 안 밀어서 피부가 새카맣다는 종류의 말도 섞여 있었다. 물론 왕따 당하고 있는 아이는 더러운 게 아니라 그냥 피부가 검을 뿐이었다. 당하던 아이가 억울한 듯 울음 섞인 말로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면 귀를 내밀며 한국어로 말하라고, 안 들린다고 놀리며 웃기도 했다. 하지만 괴롭힘 당하는 아이의 말은 명료한 한국어였다.

“잘 논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마디 흘리고, 푸른 이빨은 그냥 가던 길을 갔다. 인간은 언제나 그랬다. 지금도 하나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하찮고 추악하고 더러웠다. 사랑이나 용기나 우정이나 이상을 언제나 말하지만, 그것들이 승리하는 경우는 없었다. 승리하는 것은 언제나 욕망이었다. 푸른 이빨이 기억하는 인간의 모습은 그러했고, 지금도 변함은 없는 것 같다. 진보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고로, 역사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시작되지 않은 역사는, 때문에 종언을 울린 적도 없었다. 그냥 인간은 멸망할 때까지 찌질할 뿐이다.

“우...”

푸른 이빨은 한 손으로 얼굴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감정의 덩어리가 치밀어 오른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금방 제압할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당당한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 까지 갔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올 때 버스가 멈춰섰던 곳에 이르러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여전히 그곳에는 여러 현수막이 다양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다양한 것들이었다. 돈을 향해 집중된 다양성이었다. 그래서 사실 그 다양성은 다양성이 아니었다. 하여간 찌질했다. 푸른 이빨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버스 안에서 어떤 소녀가 푸른 이빨을 힐끔힐끔 바라봤지만, 그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좆병신은 상판이 무척 괜찮은 편이기 때문에 평소 행실을 들키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여자들에게 인기있을만한 타입이었다.

미래는 오늘 친구들이랑 만나 악세사리도 좀 구매하고, 옷도 좀 사고, 영화도 구경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는 학원에 안 다니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친구들 쪽이 시간이 없을 뿐이었다. 다들 2학기를 대비한답시고 여러 학원을 오다니는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는 탓이다. 누구는 탱자탱자 집에서 놀면서 집안일도 하나 안 하는데 전교 일등이고, 누구는 매일 바쁘게 학원을 오다녀도 성적을 유지하기에 버거웠다. 역시 세상은 부조리하다.

“늦어!”

막 패스트푸드점의 문을 열고 한 소녀가 부리나케 매장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미래가 노성을 내질렀다. 달려온 소녀는 손을 들어 보이며 애교섞인 미소와 함께 “미안, 미안. 버스가 막혀서.”라고 말했지만, 남자친구도 아닌 여자친구 일동에게 애교 섞인 미소라 해봐야 ‘아무런’ 효과도 없다. 미래는 엄숙한 얼굴로 선고했다.

“징그러우니까 그만두고, 지각한 값으로 디저트 값을 충당할 것!”

미리 와 있던 다른 여자아이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대 다의 국면에 접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소녀는 “웃.”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벌칙을 수용했다. 아이스크림 값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고, 그런 정도는 부담할 수 있었다. 소녀가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 여기 오면서 미래 오빠 봤다.”

“에? 우리 오빠를? 어디서?”

미래는 오빠탐지 센서라도 달려있는 것 처럼 귀를 쫑긋 세우며 반응했다.

“버스 안에서. 거기 어디더라, 아파트 단지 많이 보여있는 곳 있잖아. 거기서 타던걸. 친구라도 만나고 오는 길이던가 봐.”

“아, 그렇지 않아도 오늘 친구 만나러 간다고 했었어. 그거겠지.”

미래는 반색하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미래 너랑 별로 안 닮은 것 같더라. 음, 뭐 꽤 멋있어 보였지만.”

“후훗. 오빠는 아빠를 닮았다는 평판이거든. 나는 엄마. 뵌 적은 없지만.”

은결에 대한 칭찬에 미래는 우쭐해 져서 별로 크지도 않은 가슴을 내밀며 기뻐했다. 그녀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여자아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미래에게 게임기를 빌려 주었던 그 소녀였다. 사족인데, 덕분에 그녀는 동생이랑 좀 싸웠다.

“아, 그러고 보면 미래 아빠가 정말 멋있다. 너희 본 적 있어?”

“아니. 본 적은 없는데. 멋있는 분이야?”

“응. 용모도 용모지만, 그런 것 보단, 분위기가 뭐랄까- 음, 하여간 말로 설명하기 힘드네. 굉장히 차분하고 지적이고, 하여간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신 분이거든. 장래 나이 먹으면 나도 미래 아버지처럼 그렇게 됐으면 좋겠더라. 아, 할아버지도 멋있어. 미래 아버지가 나이 들면 그대로 할아버지처럼 되겠더라. 도인 같아.”

“헤에.”

다른 소녀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들었다. 미래는 갑자기 화제가 자기 가족으로 옮겨간데 대해 조금 부담을 느꼈지만 주로 호평이라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미래네 가족은 오빠 빼고는 다 독특하네.”

“그렇게 되나.”

“우리 오빠가 평범해?”

미래가 의혹과 불쾌가 뒤섞인 얼굴로 눈썹을 굽히며 반문했다. 주변의 친구들은 그녀의 오빠에 대한 애착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을 조심하며 의견을 이었다.

“평범하다곤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독특해 보이진 않는걸. 그리고 그 독특한 부분도 그렇게 긍정적인 부분인 것 같지는 않고.”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 학교에서 은결은 그렇게 눈에 띄는 편이 아니고, 인식되는 방식도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주로 ‘재수 없다.’는 쪽으로 정리된다. 그 재수 없다는 말 이면에 의외로 싸움을 아주 잘한다던가, 운동에 능한 것 같다던가 하는 그런 희미한 말들이 있긴 해도 거의 이야기 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로서는 무척 불쾌한 말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집에서 제일 독특한 사람은 우리 오빠야.”

“너희 오빠가? 음, 상상이 좀 안 되는데.”

미래의 친구는 조금 애매한 얼굴로 그녀의 말에 답했다. 미래의 말은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명백한 ‘가재는 게편’의 한 변형 양태 같았다. 미래는 그런 의혹을 떨쳐내려는 듯이 강렬하게 선언했다.

“일단, 나는 아빠 빼고 오빠보다 똑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에?”

당혹이 주변을 휘감았다. 공부도 안 하는 부조리한 전교 일등이 하는 소리니 대놓고 반론하기 어려운 종류의 말이었다. 하지만 워낙 난공불락의 성적을 자랑하는 사람의 오빠인지라 은결의 성적은 드물지 않게 조사 대상이 되곤 한다. 그리고 그녀들이 알기에 미래의 오빠는 학교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다. 미래는 니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안다는 듯한 표정과 자세로 거만하게 말을 이었다.

“성적을 보면 생각하기 어렵겠지만, 하여간 우리 오빠는 무지무지 똑똑해. 솔직히 오빠에 대면 내가 바보 같아서 싫어지던 때도 많았는걸. 더구나 요리도 얼마나 잘 한다구. 우리 오빠가 만든 밥 매일 먹으면 어디가서 사 먹을 용기가 안 날걸! 먹을 만한 데는 엄청나게 비쌀 거고! 더해서 얼마나 부지런한데. 집안일이란 집안일을 오빠가 다 해. 그리고 게임도 잘 해. 또, 또-”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는 미래를 보며 여자아이들은 또 브라콘이 폭발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때때로 미래는 자기 오빠가 엮이면 말과 행동이 풍성해진다는 것은 체험을 통해 잘 알아온 사실이다. 물론 평소에서 풍성하지만, 거기서 두 단계 정도 더 버전 업을 한다. 그런 미래를 제지하듯, 옆에서 날카로운 질문이 들이닥쳤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생각난 건데, 그럼 넌 집에서 뭐해?”

미래는 침묵했다. 집에서 뭐 하냐니! 먹고 자고, 놀고, 책 읽는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안 한다. 요리는 도우면 엉망이 되고, 세탁도 도우면 엉망이 되고, 청소도 도우면 엉망이 된다. 특별히 미래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은결이 뛰어난 탓에 상대적으로 전부 엉망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빠는 온갖 집안일을 하는데 집에서 놀고먹는다고 말하기는, 미래로서는 역시 어려웠다.

“나, 나는 집안의 마스코트!”

결국 그렇게 답했다. 주변의 눈길이 차가웠다. 지금 미래의 말에 대해서는 코멘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른 소녀가 화제를 바꿨다. 반짝이는 눈빛이 지금 자신이 꺼낼 이야기에 아주 대단한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문득 생각났는데 말야,”

“뭐가?”

“그, 미래 오빠네 반이 일본에서 온 예쁜 언니 있는 데잖아.”

“응. 그리고 오빠가 통역 비슷하게 옆 자리라고도 들었어.”

미래가 말했다. 몰랐던 몇몇 아이들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게 외국어에 능통하다면 어쩌면 미래가 말한 것 처럼 똑똑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꺼냈던 소녀가 중요한 비밀을 이야기 하듯 몸을 앞으로 쭉 내밀며 이어서 말했다.

“그 언니 사는 데가 그 아파트 단지 어디에 있다고 하더라. 혹시-”

그리고 소녀들은 은밀하게 눈을 맞추며 입술을 그어 올렸다. 금세 그녀들의 미소는 봄날 만개하는 꽃처럼 활짝 펴지며 “꺄르르-”하는 풍성한 웃음소리가 되었다. 꽃잎같은 웃음은 널리 퍼졌다. 다만 한 사람, 미래만이 경직된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당황스럽게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좋지 않았다. 아주 좋지 않았다.

*정체성의 문제는 클라우스 학원에서 지극히 니체적인 방식으로 깨끗하게 정리했기 때문에 더 다루지 않을 겁니다. 거기서 데일은 정체성의 문제를 ‘르상티망’에서 ‘아모르파티’로 전환하는데 성공했지요. 이것은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푸코가 발굴한 표현을 빌리면 ‘자기 인식’에서 ‘자기 배려’로 넘어갔다고 말할 수 있고,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제 입장이 거기서 더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다루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정체성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 쪽을 권합니다. 재밌습니다.(슬쩍 광고) 솔직히 자아정체성 운운은 지겹기도 하고. 뭐 크게 보면 해석의 문제를 중요하게 삼는 이 글의 문제 역시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고는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몇몇 연결 부분이 충분히 부드럽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주인공과 대등한 입장과 지력을 가진 캐릭터를 넣던가, 완전히 주인공의 내면으로 침잠해 글을 쓰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게 최선이었지만, 전자는 글의 내용이 너무 어려워질 우려가 있고, 후자는 은결 이외의 캐릭터가 죽어버리기 때문에 둘 다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간 완결 이후에 그런 부분들은 손 보아서 최대한 부드럽게 만들 생각입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