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희망을 위한 찬가 - 은결 되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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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요리는 완성됐다. 돼지 두루치기를 메인으로 해서 여러 잔 반찬이 곁들여진 먹음직한 식단이었다. 푸른 이빨은 상을 들고 거실 쪽으로 나갔다. 가는 길에 힐끗, 쿠로사카의 방이 보였다. 그녀의 방에는 반듯하게 개어진 이불과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책상 위에는 한 권의 책이 펼쳐져 있었고, 다른 몇 권의 책이 쌓아올려져 있었다. 잠깐, 푸른 이빨의 눈으로 이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쿠로사카의 “이타다키마스” 소리가 있고, 식사가 시작됐다. 사기그릇에 젓가락이 부딪히는 달칵 달칵 소리가 이어졌다. 푸른 이빨이 물었다.
“(맛은 어때?)”
“(음, 맛있어.)”
쿠로사카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느낀 것이지만, 역시 은결의 요리솜씨는 무척 뛰어났다. 그녀는 은결이 만든 음식만큼 맛있게 조리된 음식을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문득, 삶은 예술이어야 한다던 은결의 말이 기억났다. 소외됨 없는 자기실현. 그러하기에 은결의 요리 실력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섬세한 조리를 할 수 있는 몸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뛰어난 요리를 만들 수는 없으리라, 고 쿠로사카는 생각했다. 돌아온 대답에 푸른 이빨은 안도와 다정함을 담아 푸근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너도... 다행이야.)”
쿠로사카는 그의 웃음을 힐끗 보고, 시선을 다시 돌리면서 흘리듯이 말했다. 푸른 이빨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응? 뭐가?)”
“(요즘 많이 혼란스러워 보였는데, 지금은 괜찮아 보이니까. 아니, 혼란스럽기 전 보다도 훨씬 나아진 것 같아.)”
“(아아. 뭐, 네 조력 덕분이지. 아마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극복하기 어려웠을거야.)”
“(......)”
쿠로사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은결의 대답에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냥 식사에 집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푸른 이빨은 속으로 낄낄대며 웃었다. 때리고 부수고 찢는 것 말고도, 이런 것 방식의 ‘공략’ 역시 예상을 넘어서는 상당한 재미가 있었다. 이쪽의 진심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만 주목해 거기서 의미를 읽어내 진심으로 해독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정보의 불균형과 그것을 통한 우위의 장악은, 다른 방식의 ‘지배’인 것 같아 좋았다. 어차피 기표와 기의는 일치하지 않거늘! 그 불일치가 가져다주는 여분, 혹은 초과를 이용한 의미조작! 그 소통을 통한 세계의 조작! 그 권력! 명료한 쾌감이었다. 푸른 이빨은 이 이후로도 이런 걸 종종 이용해 먹어야 하겠--
다시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압도적인 힘이 파편화된 상념을 이어 의식으로 진입해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시계가 어지러워지며 본래의 질서를 잃어갔다.
그러나 푸른 이빨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것을 견뎌냈다. 그는 단지 젓가락을 쥔 손을 미미하게 떨었을 뿐이다. 곧 현상이 본래성을 회복했다. 방금 있었던 혼란은 마치 없었던 것인양 자연스럽게, 푸른 이빨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책을 읽고 있던 모양인데.)”
“(아, 봤어?)”
“(응. 뭘 읽고 있어?)”
“(그냥... 일본 문학. 요즘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고 있어. 전에 읽었던 것이지만 그때하고 지금은 달리 읽힐 것 같아서.)”
서늘하게 마음을 침투하던 한 마디 속삭임을 기억하며, 쿠로사카는 그렇게 답했다. 아득한 절망과 공포 가운데서 외계에 두려워 떨던 마음의 희미한 흔적. 그 어둠을 기억하는 일은 언제나 두려웠다. 은결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쿠로사카는 등골이 섬칫하다. 그녀는 속삭임의 흔적이 마음에 침투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 곧장 다른 문장을 이어 물었다.
“(나쓰메 소세키, 읽어 봤어?)”
“(일단 그의 작품은 모두 읽어 봤어.)”
푸른 이빨은 답했다. 사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푸른 이빨은 나쓰메 소세키를 읽은 적이 없지만 은결은 모두 읽었다. 대답을 듣고 쿠로사카가 표정에 흥미의 기색을 띄며 물었다.
“(헤에- 그래서 감상은?)”
“(그는 천재지.)”
담백하게, 푸른 이빨이 말했다. 쿠로사카는 살짝 기쁨을 느꼈다. 어쨌거나 일본인인 그녀로서,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가 호평을 듣는 것에 나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녀 개인으로서도 나쓰메 소세키는 좋아하는 작가에 들어간다. 한편, 푸른 이빨이 이런 쿠로사카의 심리를 고려해 한 대답인가 하면 물론이지만, 그가 ‘천재’라는 것은 꼬맹이의 사심 없는 대답이기도 했다. 푸른 이빨은 이 화제를 좀 더 이었다.
“(특히 좋아하는 작품은 지금 네가 읽고 있는 ‘마음’이야. 나쓰메 소세키는 그 작품을 자신이 직접 광고하면서 ‘마음’의 문제를 치밀하게 탐구한 작품이라고 이야기 했었다는 데, 정말로 그렇지.)”
“(죄책감의 문제를 치열하게 다루고 있어서?)”
쿠로사카가 물었다. ‘마음’은 연애사건으로 인해 친구를 죽음에 몰아넣은 이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소설을 일본판 ‘죄와 벌’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푸른 이빨은 고개를 흔든다. 읽어보지도 않은 글이 어쨌든 알바 없지만, 꼬맹이가 그 소설에 감탄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푸른 이빨은 ‘마음’에 대한 꼬맹이의 감상을 간결하게 말했다.
“(죄책감은 부차적인 문제지. 소세키의 ‘마음’은 시선을 직시함으로서 시선을 견딜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니까. 죄책감의 근원으로서의 시선이라고 할까.)”
푸른 이빨의 말이 쿠로사카의 마음을 찔렀다. 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직 ‘마음’이 어떻게 은결의 감상과 연결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은결의 감상 자체는 그녀 본인과도 지근거리에 있는 것이었다. 쿠로사카는 희미하게 말을 흘렸다.
“(...그런, 가.)”
좋지 못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푸른 이빨은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짜증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얼른 점수를 회복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다른 화제로 옮기기로 했다. 이번에도 책이었다. 꼬맹이답기도 하고, 책에서 책으로 화제로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푸른 이빨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라면 여기서 카프카의 ‘심판’을 읽을 거야.)”
“(심판?)”
“(이곳 분위기가 ‘심판’을 읽기에 좋거든.)”
“(잘... 모르겠는걸.)”
푸른 이빨도 잘 모른다. 그냥 꼬맹이가 여기서 라면 ‘심판’을 읽기 좋겠구나, 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는 기억을 뒤져 말을 이었다. 그물처럼 이어진 정보가 기억의 한 궤를 따라 우수수 들고 일어나 폭포수처럼 연속되었다.
“(카프카의 작품군을 관통하는 중심적인 개념은 ‘소외’ 혹은 ‘소여’지. 그리고 이 아파트 단지는 그런 무력함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잖아. 높고 큰 건물이 사방을 메우고 있는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왜소함을 느끼게 하니까. 카프카의 작품이 흔히 담는 중심적인 문제의식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사태의 결과물이 사람에게서 떨어져 사람 그 자체를 그들의 의지와 부관하게 처리해나가는데 대한 공포와 무력감이지. 심판은 정확히 거기 부합되는 작품이고. 그래서 유명한 좌파 예술가 브레히트는 카프카를 싫어했다고 해.)”
“(브레히트가? 몰랐는데.)”
“(뭐 따지고 보면 당연한 거야. 카프카의 소설은 부조리에 대한 공포와 무력감으로 점철되어 있으니까. 브레히트는 소외의 결과로서 그런 공포와 무력을 제시하고, 그 너머를 말하지 않는 카프카를 인정할 수 없었겠지. 그가 생각하기에, 소외의 결과는 분노여야 했고, 민중의 승리여야 했으니까. 보편적 소외가 보편적 공포와 무력에서 끝날 때 등장하는 건-)”
‘-파시즘’이다. 그러나 푸른 이빨은 말을 잇지 못한다. 말하려고 했지만, 치미는 감정이 말문을 막았다. 압도적인 슬픔과 회한이다. 부정할 수 없으나 갈 곳이 없고, 행동해야 하나 말할 수 없었다. 푸른 이빨은 애써 평정을 가장했지만 결국 두 눈에서 눈물이 끓어올랐고, 볼을 타고 뜨겁게 흘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잠시 화장실 좀 쓸게.)”
“(응.)”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이빨은 화장실로 향했다. 은결의 등을 보면서 쿠로사카는 과거, 그와 함께 영화를 보았던 것을 생각했다. 그는 그때 ‘역사의 끝’을 이야기 했다. 분한 표정으로, 그러나 슬프게. 근거 잃은 분노는 슬픔으로 전화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은결은 얼마나 많은 분노를 품에 품고 있었던 것일까? 은결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가 닿을 수 있는 말을 아무 것도 모른다. 어떤 말도 쓸데없는 허언이 될 것이다. 은결은 언제나 치열하게 반성했고, 반성하고 있으니까. 그녀의 어떤 말도 이미 그 반성의 그물 안에 들어가 걸러진 다음일 테니까. 그럼에도 위로할 수 있다면, 아마 세연이라는 아가씨 정도에게 그 자격이 있으리라.
입안이 무거워서 쿠로사카는 젓가락을 더 움직이기 힘들다고 느꼈다.
아파트에서 나오는 푸른 이빨의 표정이 좋지 않다. 식사 도중에 치미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카프카니 브레히트니 하는 걸 말하는 것이 꼬맹이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해체되어 사고의 조각만이 남아 있는 지금도 때때로 이런 민감하고 강렬한 반응을 보이는지 푸른 이빨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 꼭 나빴던 것만은 아니지만’
목덜미를 긁으며 푸른 이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후 쿠로사카라는 계집이 묘하게 상냥하게 굴었다. 과정에 혼란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점수를 벌어야겠다던 애초의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상황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에 머물러여 했다는 것은 결과와 무관하게 불쾌했다. 육체의 장악도를 더욱 높여서 이런 사건이 없도록 노력해야 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응?”
내려가는 길에, 문득 눈을 끄는 것이 있어 푸른 이빨은 그쪽을 바라봤다.
*추천해 주신 만년음양삼님께 감사~ 이런 응원 받으며 힘내어 글을 적습니다. 음음. 그러니까 댓글을 많이 답시다.
*야리코미는 거칠게 하면 ‘몰두’정도로 번역 되겠지요. 그렇다고 ‘몰두 요소’ 뭐 이런 표현은 참 껄끄럽습니다만. 좋은 게임을 위해서는 야리코미 요소의 사용이 무척 중요하지만, 판매를 위해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물 건너 동네의 10만 이하 시장에서는 ‘모에’가 훨씬 더 강력한 세일즈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양자 모두 해당사항 없습니다만.
*게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추가. 내년에 폴아웃3가 나온다고 합니다. 얼마 전 게임 스팟에 베데스다 기사가 실렸더군요. 리얼타임 전투형식을 섞은 턴제라던데, 좀 불안하긴 해도 걔들도 못지 않은 명인들이니 저는 그저 하악하악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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