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희망을 위한 찬가 - 은결 되기(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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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킁.”
푸른 이빨이 집으로 돌아오자 미래가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얼굴을 묘하게 찌푸리며 어울리지 않게 코에 주름을 세웠다. 푸른 이빨은 당혹한 은결을 연기하며 이어질 소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내 의혹을 담아 소녀가 말했다.
“오빠, 향수 냄새 난다. 그것도 여자 향수 냄새.”
“아, 세연 양을 좀 만날 일이 있었거든. 그때 묻었나 보지.”
느긋한 대답이 이어지자, 순식간에 미래의 눈초리가 사납게 변했다.
“그 여자하고는 무슨 일로?”
푸른 이빨은 이 요상한 꼬마 계집도 참 독특하다고 생각하며 건성으로 꾸며 대답했다. 그 자신이 짜증스런 일이 달라붙는 것을 싫어하는데다가 그렇게 말하는 쪽이 꼬맹이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짜증스런 꼬맹이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이 미래라는 계집애는 세연을 무척 싫어하는 것 같았다.
“별건 아니고, 그냥, 이야기 할 게 좀 있었던 것뿐이야. 바캉스 때 별장도 빌려 줬겠다, 제대로 인사를 못했으니까. 도리어 그쪽에서 찾아왔었잖아. 한 번 이쪽에서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하는 게 예의지.”
“음, 그야 그렇지만...”
푸른 이빨의 말은 논리적이어서 의심스러운 구석은 없었다. 하지만 역시 미래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푸른 이빨은 작게 웃어 보이며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녁에 시간 비면 놀아줄게 삐지지마.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시간이 좀 비니까.”
“후훗! 삐지긴 누가!”
놀아준다는 말에 미래는 금세 표정을 밝게 바꾸고 강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푸른 이빨은 정겹게 웃었다. 물론 속으로는 다 큰 처녀가 완전히 애라고 혀를 쯧쯧 찼지만. 곧 수행의 방문이 열리며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외출에서 돌아온 아들을 보며 자상하게 웃었다. 푸른 이빨은 바싹 긴장했다.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괴물에 대해서는 공포와 경외를 느낀다. 이제는 병신이 되어 있음에도. 이 병신은 병신인 주제에 카미를 우습게 가지고 논다. 만일 병신이 아니었다면 어떤 괴물이 되어 있었을까? 그것을 생각하는 일은 두렵다.
“아, 은결 왔느냐.”
“예. 돌아왔습니다. 조금 있다 저녁 할 테니까 기다려 주세요.”
“그래. 그런데 진경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오늘 세연 양과 만났던 모양이구나.”
“예. 방금 헤어지고 오는 길입니다.”
수행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고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저런 인간이라도 새끼들의 접붙이기에는 관심이 있는 모양이구나, 하고 푸른 이빨은 다소 신기하게 여겼다. 미래는 그 모습을 작은 불안감을 품고 불쾌하게 바라봤다.
곧 저녁 시간이 되었다. 푸른 이빨은 능숙하게 요리를 했다. 레시피는 꼬맹이가 다양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칼질은 몸에 많이 익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완벽하게 꼬맹이의 요리였다. 요리를 하면서 그는 이 꼬맹이는 남자 주제에 별 희한한 걸 다 한다고 생각했다. 답다면 답지만, 덕분에 이런 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자니, 그것도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간단한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 그리고 김치 외 여러 반찬을 마련한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그러고 보니 구토는 다 읽었느냐?”
“예. 얼마 전 완독했습니다. 역시 기존의 모든 위치지정을 거절하고 본래적 존재가 되기로 결정하는 로캉탱의 심적 여정을 현상학을 통해 훌륭하게 표현한 걸작이었습니다.”
갑작스레 주어진 질문에 푸른 이빨은 기계적으로 답한다. 수행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물음을 던졌다.
“그렇구나. 그런데 네가 생각하기에, 로캉텡이 이후 선택하게 될 ‘본래적 존재’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본래적 존재란 결국 ‘앙가주망’일 것입니다. 본질보다 앞서는 실존으로, 외부를 통해 주어지는 자신에 대한, 타인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모든 ‘타인의 시선’을 재고하고 자신의 본질을 자신이 결정해, 그 실존을 사회 가운데 실천하는, 그것이야 말로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본래적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니 로캉텡은 그러한 앙가주망의 길을 걷겠지요.”
이번에도 푸른 이빨은 기계적으로 답했다. 꼬맹이의 기억을 읽어 그 문장을 꼬맹이의 성격에 맞춰 읽는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만, 푸른 이빨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겨우 논리의 맥을 이어나가볼 뿐이다. 그 말을 끝내고, 무언가가 다시 치민다. ‘그러나-’ 그것은 이후로 이어져야할 무수한 말의 입구였다. 거대한 감정이 기호의 가면을 쓰고 넘실거린다. 푸른 이빨은 경이적인, 가히 신적인 정신력으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그 치밀어 오름을 견뎌낸다.
“좋은 해석이구나. 조금... 불안했었는데, 안심했다.”
“안심이라니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수행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푸른 이빨은 고통 가운데 안도한다. 저 인간과 대화를 하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목구멍을 간질이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더 할 말이 없다면 그것이 최선이다.
“두 사람이서 암호놀이 하지 말고, 나도 이야기 할 수 있게 대화를 해요!”
이야기를 듣던 미래가 약간 화난 얼굴로 투덜댔다. 수행과 은결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옆에서 듣기에는 확실히 암호놀이다. 그거야 어떤 영역의 것이든 전문적인 것으로 들어가면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듣기에는 다 암호처럼 들리기 마련이지만. 수행은 미래에게 멋쩍게 웃어 보였다.
“하하, 미안하구나.”
“흥! 응? 오빠, 왜?”
수행에게 새침하게 말을 돌리던 미래가 푸른 이빨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물었다. 푸른 이빨은 간결하게 “잠깐 화장실.”이라 말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화장실 안에 들어가 술식을 펼쳐 소리를 막고는 변기를 잡았다. 그리고 속의 것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술식을 거두고 물을 내렸다. 쏴아아- 그는 이어 세면대에 섰다. 창백한 얼굴의 꼬맹이가 거울에 미친다. 으드득! 푸른 이빨은 분노에 이를 갈면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지지 않는다. 결코 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지는 것은 신의 운명이 아니다. 죽음이 신의 운명이 아니듯, 패배 역시 신의 운명이 아니다.
다음 날, 밤의 대기를 가르면서 푸른 이빨은 핸드폰을 켰다. 액정이 떠오르며 거기에는 방금 전송된 문자 메시지가 떠오른다. 이모티콘의 조합이 귀여운 얼굴을 만들고, 그 밑에 몇 마디 말이 적혀 있다. 세연이 보낸 메시지다. 푸른 이빨을 지루한 눈길로 그것들을 읽는다.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시시껄렁한 잡담이다. 무엇이 재밌었고, 무엇이 독특했고, 그 따위 걸 알게 뭐라고 꼬박꼬박 보내온단 말인가.
하기야 어제 저녁의 전화도 그러했다. 남은 쓰레기 같은 관념의 찌꺼기들과 사투하며 육체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데, 팔자 좋게 전화나 하며 영양가 없는 말들만 죽어라고 했다. 그것들은 물론 은결에 맞추기 위해 그녀 나름의 선정한 화제들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푸른 이빨은 은결이 아니고, 은결이었다고 해도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연애라고 하는 행위의 정석인 모양이니, 무어라 할 것인가. 싫어도 좋다고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수 밖에.
“후. 인간들이 보험에 대해 꼬박꼬박 내는 보험료라 생각하지.”
푸른 이빨은 중얼거리며 간단하게 지금부터 일해야 한다고 메시지를 보내고는 휴대폰을 껐다. 작은 칸을 눌러 문자를 조립하는 것도 다소 짜증스러웠다. 일련의 행위를 마쳤을 무렵 그는 목적했던 빌딩의 옥상을 눈앞에 둘 수 있었다. 오늘도 소녀가 먼저 와 있었다. 밤이 무척 잘 어울리는 늘씬하고 차가운 분위기의 소녀, 쿠로사카였다. 푸른 이빨은 그녀가 쥐고 있는 검을 볼 때마다 가슴에서 타오르는 열기를 느낀다. 저 빌어먹을 검 때문에 겪었던 수난! 지금 당장이라도 천만 조각으로 부셔 마셔 버리고 싶지만, 현재는 감정에 쓸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때는 아니다.
“(오늘은 괜찮아?)”
은결을 보고 쿠로사카는 물었다. 평정을 가장하고 푸른 이빨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준 덕분에. 네게는 정말 감사하고 있어.)”
“(별 것 아냐.)”
“(그렇지 않아. 너는 벌써 내 목숨을 몇 번이고 구했는걸. 지난번 바캉스 때도 그렇고 요즘 겪고 있는 문제에서도 네 도움이 없다면, 견디기 더 가혹했겠지.)”
“(음.)”
쿠로사카는 얼굴로 치미는 열기와 함께 말문이 막혔다. 요즘 들어 은결은 이상하게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해 오는 것 같았다. 물론 전에도 충분히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딘가 단절된 호의였다. 가 닿을 수 없이 독립된. 그 호의로서 도리어 접근하지 말아야 하는 경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 같은. 하지만 지금 은결이 보여주는 태도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함께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는 지금 그가 겪고 있는 혼란의 탓일까? 그렇다고 하면... 쿠로사카는 곤혹 가운데 은밀한 기쁨을 느낀다. 그녀는 시선을 돌린다. 은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당혹의 뒤를 당혹이 친다. 그녀는 그 시선의 뒤에서 푸른 이빨이 음습한 미소를 속에 품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하, 하여간 오늘은 네게 이야기 해 줄게 있어.)”
화제를 돌리기 위해 쿠로사카는 성급하게 말했다.
“(뭐지?)”
“(푸른 이빨에 관해서야. 오늘 이세에서 연락이 왔어.)”
푸른 이빨의 얼굴이 굳었다.
*후우 쓸쓸해라. 좌절감~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를 쓸 때, 다 쓰고 보니 전혀 생각하지도 않게 칸트가 등장했습니다. 놀라웠죠. 그렇다면 이 글은 혹시 다 끝나고 나면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들뢰즈라도 등장하게 되지 않을까요? 요즘 때때로 그런 우려와 기대가 섞인 생각을 해 봅니다.
*이 글은 200화는 넘길 것 같고. 250화전에는 완결이 이루어질 듯 합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 글의 엔딩이 저는 참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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