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희망을 위한 찬가 - 은결 되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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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는 패스트푸드점의 한 좌석에 앉아 열심히 휴대용 게임기를 하고 있었다. ‘터치 제너레이션’을 주창하는 게임기였다. 지금 여우가 플레이 하고 있는 것은 그 ‘터치’의 특성을 아주 잘 살려서 만들어진 리듬 게임이었다. 액정을 펜으로 쿡쿡 누르는 맛이 일품인 그 게임은 한국에서도 무척 인기가 있어서 적지 않은 이들이 이미 해 보았다고 한다. 여우는 얼마 전 마지막 고난이도 모드에 돌입했고, 지금은 클리어와 점수 벌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감상은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이 바닥은 지옥이야!’ 정도였다.
“으음...”
지금도 순간의 실수로 펜을 잘못 놀려 스테이지 클리어에 실패한 여우는 짜증스런 얼굴로 얼굴을 들었다. 이런 황홀한 난이도를 버스타면서 최고 등급으로 클리어하는 ‘굇수’들이 세상에는 많다고 하던데, 믿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밥 먹고 액정만 누르고 살았거나 자신과 같은 올드타입과는 신경체계가 다른 뉴타입이지 싶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자기 주변에는 손위에서 펜을 자유로이 빙빙 돌리는 굇수도 한 마리 있긴 하다.
여우는 일단 게임기를 품에 수납하고 시계를 살폈다.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 고릴라와 늑대가 오지 않았다. 세 사람은 오늘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다. 민성도 꼬셨지만 ‘여성진 없이 영화보러 가는 취미는 없다!’ 라며 평생 극장영화를 보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은결에게도 연락할까 했지만 세 사람은 바캉스 중에 만났던 세연이라는 소녀를 떠올리고 당분간 배신자와는 놀지 않기로 결의했다.
“허-ㄱ?!”
약속한 인간들이 이제오나 저제오나 초조하게 이리저리 살피던 여우는 놀라운 장면을 보고 그만 헛숨을 들이켰다. 문에서 상당히 떨어진 창가 쪽 자리에, 은결이 있었다. 하지만 은결만 있다면 놀라기보다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은결 앞자리에는 소녀가, 그것도 매우 아름다운 소녀가, 눈에 익은 미소녀가, 그러니까 세연이 있었다. 놀랄 수 밖에. 아는 척 해서 판을 깨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계속 말도 없이 바라보고 있기도 껄끄러워서 여우는 조심스럽게 가게 밖으로 나갔다. 습기를 머금은 짜증스런 열기가 그의 전신으로 달라붙었다. 여우는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일당에게 연락했다.
“아, 아쉽구만.”
고릴라는 툴툴거리며 소란스런 상영관 출구를 빠져나왔다. 인파에 섞여 뒤따라 나오던 늑대와 여우가 입을 모다 반론했다.
“왜? 괜찮았잖아.”
“나도 꽤 좋던데. 재밌었잖아. 특히 돈으로 바른 덕분에 특수효과가 멋졌어.”
고릴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영화 말고, 니가 은결이놈을 봤다고 했잖아. 그것도 세연이라고 하는 아가씨와 함께 있는 걸. 현장을 급습해 초를 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거지! 5분 늦은 것이 이런 천추의 한이 될 줄이야. 뭐, 영화는 나도 괜찮았다고 생각해.”
늑대가 한 손으로 가슴을 쥐어 잡으며 아픈 표정을 지었다.
“크으, 아 속 쓰려. 역시 물을 좀 더 많이 먹였어야 하는 건데. 손속에 인정을 남겨 두었던 것이 천추의 한!”
여우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며 입바른 소리를 했다.
“성질들 하고는. 남의 연애 사업 방해할 생각 말고 그냥 만들면 될 거 아냐.”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럴 재주 있으면 남자 셋이서 영화 보러 오는 짓을 왜 해!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멋진 구경거리잖아. 적어도 오늘 영화보다 더 볼만했을걸. 휴대폰에 찍어두기라도 했으면 두고두고 은결 그 녀석 놀려먹을 재료가 되는 건데. 아쉬워라.”
늑대가 외쳤다. 여우는 앞의 발언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뒤의 것은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은결은 어쩐지 웃어도 웃는 것 같지 않은 기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범접’하기 어려운 무게를 품은 아우라 같은 거였다. 그러니만치 그런 사진으로 놀려먹는다면 확실히 재밌을 것 같기도 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하며 극장을 빠져 나왔다. 습한 열기가 작열하는 태양과 함께 그들을 맞이했다. 최악이다. 고릴라가 제안했다.
“뭐 시원한 거 하나 마시러 가자.”
두 사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근처의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세 사람은 적당히 마실만한 음료수를 하나씩 고르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근처 서점에서 적당히 잡지라도 보며 놀자고 생각하며 길을 가던 도중에 늑대가 “어!”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고릴라가 물었다.
“왜?”
“저기 은결!”
“에! 진짜!”
여우가 확인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같은 곳을 향했다. 확실히 거기에는 은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열하는 여름 태양 속에서 화사한 하얀색으로 전신을 감싼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은결도 좀 칙칙한 속 내용을 모르고 바라보면 괜찮은 외견이라서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것은 가히 그림 같았다. 늑대가 질투에 이를 갈았다.
“크으-!”
“계획 변경! 가자!”
고릴라가 외쳤다. 여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뭐, 뭘 어쩌려고?”
“그야 미행이지 미행. 한 장면 찍어서 개학하면 놀려먹는 거야. 데이트 초 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응징의 의미를 담아 결정적인 한 장면을 획득하겠다는 건데, 이런 정도는 정당하지 않아?”
“정당하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고릴라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늑대도 가세했다. 작게 ‘파이팅’ 하는, 무척이나 쪼짠한 의기투합이 이어졌다.
웬 놈들이 미행하고 있었다. 푸른 이빨은 방금 전부터 거슬리는 기척을 감지하고 있었다. 인원은 셋. 키도 부피도 ‘대중소’로 차례대로 나뉘는 질서정연한 집단이었다. 육체의 운신하는 방법을 볼때, 틀림없이 하찮고 짜증나고 지루하고 평범한 인간이었다. 나이는 20이하. 미행이랍시고 뒤를 졸졸 따라오지만 은결의 육체를 사용하는 푸른 이빨의 오감을 피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쫒아보낼까 싶었지만 이내 그들이 이 꼬맹이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인은 그들에 대해 ‘친구’라는 말을 붙이길 어려워하고 있지만, 푸른 이빨이 보기에 틀림없는 친구였다. 친구 사이에 비밀 있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역시 이상한 꼬맹이다. 그래서 푸른 이빨은 그들을 무시하고 하던 일이나 하기로 결정했다.
“재밌었습니까?”
“예. 재밌었어요.”
“다행입니다.”
푸른 이빨은 부드럽게 웃었다. 세연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푸른 이빨은 생각했다. 점심도 같이 먹었고 영화도 봤다. 시간은 좀 이른 듯 하지만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루한 인간들의 교미 의식에 언제까지 질질 맞춰주는 것도 푸른 이빨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어차피 이 계집의 태도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굳이 더 이런 일을 할 의미는 없어 보였다. 걸리는 것이라면 ‘좆병신 답게’ 행동한다는 기준에 맞는가 하는 것인데, 사실 좆병신 꼬맹이의 행동패턴은 상궤에서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을 한다 해도 특이할 것 같지는 않았다. 특이한 놈이 특이한 짓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음, 역시 그렇지.’
내심 이런 저런 생각을 하여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푸른 이빨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푸른 이빨의 옆모습을 수줍게 흘깃흘깃 바라보던 세연은 그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을 보면서 내심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은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세연은 궁금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근처에 쓸데없는 꼬리를 달고, 양광을 피해 멀지 않은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로 들어갔다. 그 뒤로는 분수가 설치되어 있어 시원한 물줄기를 높이 쏘아 올리고 있었다.
갑작스런 바람이 두 사람을 탐했다. 세연의 모자가 날았다. 세연은 당황하며 모자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푸른 이빨이 그 모자를 잡았다. 그리고 세연에게 그 모자를 돌려주며, 부드러운 미소와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얼굴을 붉히고서 푸른 이빨이 건내주는 모자를 받으며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이빨은 쑥스러운 듯 잠시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세연 쪽으로 향하며 싱긋- 청량하게 웃었다.
“정식으로, 세연 양에게 교제를 신청하고 싶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울린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그들의 말소리에 뒤섞여 혼탁하게 콘크리트의 정글을 채운다. 새로 개업한 어느 가게 앞에는 선정적인 차림을 한 아가씨들이 시끄러운 노래에 맞춰 훈련된 목소리로 광고를 하고 있고, 짙은 초록의 잎으로 햇살을 담뿍 빨아들이는 나무에 매달린 매미는 7년의 기원을 담아 운다. 그래도, 세상은 정지한 것 처럼 조용하다.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를 바람이 뜨겁게 쓸었다. 한 여름의 낮. 태양의 열기를 가소롭게 만드는 뜨거움이 몸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끼며, 세연은 이런 소란 가운데서도 정적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푸른 이빨.
*푸른 이빨에 대한 독자 호응도가 예상이상 이군뇨.
*소울블루 님이 또 그림을 그려 주셨습니다. 감사.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의 세네리아 폰 볼드윈 양(대마왕)의 그림도 받았습니다. 이건 겨울바른 님의 활약이 컸다고 합니다. 음음.
*영전 서드도 왔는데, 각종 성원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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