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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161화 (161/300)

#   162-희망을 위한 찬가 - 아웃사이더(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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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침식은 도리어 간단하다. 마음의 침식은 돌이키기 어렵다. 나아지지 않는 상처는 무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진 채, 하나의 작은 바늘조각이 되어 어둠을 헤멘다. 외계의 현상이 그 바늘조각과 자석처럼 맞물리며 접합할 때 마다, 세계는 일그러진다. 음습한 현실. 음습한 고통. 무너지는 마음. 일어서지 못하는 절규. 그 가운데서 은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일그러짐은 나아지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이전과 완전히 같지만, 그들 현상에 부여되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쿠로사카의 얼굴이 보였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은 걱정에 굳어져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은결은 고마움과 추악함을 동시에 느꼈다. 은결은 스스로에 대해 놀랐다. 그리고서야 세계의 일그러짐이 멈췄다. 시계(視界)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

“(괜찮아.)”

“(정말이야?)”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쿠로사카가 되물었다. 은결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아?)”

“(그건-)”

쿠로사카가 어색한 얼굴을 했다. 오늘 사념체와의 싸움에서 은결이 보여준 모습에 불안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지금까지 은결이 그녀와 행동을 같이 할 수 있었을 리 없다. 오늘 은결은 사념체와의 싸움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다. 동작은 안정되어 있었고, 판단은 번개 같았고, 기술은 섬세하고 완벽했다. 그렇지만 쿠로사카는 역시 불안을 느꼈다. 그간 보아온 은결의 모습에서 그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란 게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결은 자신의 목숨을 하찮게 여길 줄 안다. 쿠로사카를 달래듯이 은결이 말을 더했다.

“(걱정하지마. 이제 괜찮아.)”

사랑하는 연인을 향하듯, 사랑하는 자식을 향하듯, 사랑하는 제자를 향하듯, 자상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쿠로사카는 이상한 수줍음에 볼을 붉혔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달리 더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도 조심해. 이상해 보이면 언제든지 돌려보낼 거야.)”

“(응. 나도 이렇게 대신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몸 조리 잘 해야지 언제 하겠어. 그러니까 네게는 고맙게 생각해.)”

“(흥.)”

쿠로사카는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렸다. 은결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갑자기 그녀처럼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 는 것이, 자그마한 감동이 되어 은결의 가슴으로 들이닥쳤다. 코끝의 시큰함과 동시에 세계가 다시 일그러졌다. ‘이런 감동은 왜 이다지도 드문 것일까?’ 감동은 슬픔이 되어 억겁 속으로 침잠한다. 수압을 받는 것 처럼 호흡이 어려워진다. 은결은 한 손으로 양 눈을 감쌌다.

“(왜 그래?”)

“(아니, 조금 어지러워서.)”

쿠로사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은결의 상태에 대해서는 지난번 만난 그의 할아버지에게서 어느 정도 들었다. 아마도 세계와 합일한 후유증 같은 것이리라고 한다. 은결이 어떠한 인식을 겪었을지 그녀는 상상하지 못한다. 그것은 고통이었을까? 기쁨이었을까? 슬픔이었을까? 소란이었을까? 정적이었을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떠난 다른 차원의 ‘무언가’였을까? 알 수 없다. 직접 경험한 그 본인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인지를 초월한 인식이니까. 단지 예측되기로는, 지금 은결이 보이는 이런 모습들은 당시의 이미지 같은 것이 무의식 가운데 침몰해 때때로 지금의 인식을 침범하고, 지금 이 순간의 인식을 그때와 비교하게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가 볼게. 내일 봐.)”

“(응. 내일 봐.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아, 출장 파출부노릇도 해 줄 수 있으니까 필요하면 불러.)”

은결은 장난스레 답했다. 쿠로사카는 언제나 그렇듯 “흥!” 하는 말만을 남기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유성처럼 몸을 날려 사라져 간다. 그녀야 말로 토리이의 이념에 어울리는 하늘의 사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홀로 남은 은결은 묵묵히 서서 한 손으로 다시금 눈을 감사고, 하아- 하고 숨결을 토했다.

“힘들구나...”

견뎠다. 이를 악물고 견뎠다. 그래서 훌륭하게 견뎌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념체의 근처에 접근하면, 마음이 침식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의 본체를 때리면, 마음이 범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의 중핵을 파괴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새삼스럽게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욕망과 배반과 슬픔과 괴로움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그 믿을 수 없음에 접근할 때 마다, 어둠 가운데서 자아는 기억나지 않는 환희를 기억하고자 한다. 순결하고 깨끗한 세계. 완전해서 고요한 세계. 들떠서 아름다운 세계. 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세계를 추억하고 기리고야 만다.

“......”

은결은 다시금 달을 올려다본다. 추억하려고 애썼던 세계를 더듬어 짚어본다. 역시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세계가 있는 것만 같다. 완전하고, 아름답고, 고요하고, 어디에도 타자(他者)가 존재하지 않는- ‘어디에도 없는’ 세계. 그것은, 그러니까 그것은-

-죽음, 을 열망하게 한다.

은결은 갈증에 메마른 침을 삼켰다.

수행은 타자를 치고 있었다.

-지난 화의 이야기로 드러났듯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상호 조화되는 개념이 아니다. 도리어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현대 민주주의는 내부에 폭탄을 품고 있다고 보는 쪽이 더 진실에 가깝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정치제제이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에 적용되는 자유주의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논해질 수 있다.

첫 번째는 이념적 자유주의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동시에 민주주의를 제한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민주주의란 다수의 지배를 말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다수의 횡포가 가능해진다. 민주적인 원리에 따라 다수가 소수를 모두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압류, 분배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를 설정이 필요했다. 그것을 위한 이념으로서 근대국가는 자유주의 이념을 도입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이 이념에 국가에 반영된 형태가 ‘헌법’이고, 통치원리가 ‘합헌주의’ 혹은 ‘법치주의’라 불리는 법에 의한 지배이다. 모든 개인은 다수의 판단이 아닌 법에 의해만 억압받을 수 있다. 다만, 법은 다수에 의해 제정된다는 구조다.

두 번째는 경제적 자유주의다. 이 경제적 자유주의를 다른 이름으로 바꿀 대, ‘자본주의’가 된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근대국가의 주된 원리가 된 것은 근대국가의 탄생과정을 살펴보아도 필연적이다. 부르주아의 경제해방에 대한 열망이 중세를 폐기하고 근대의 문을 여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이 원리는 동시에 이념적 자유주의를 요청하게 되는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좀 더 직관적인 표현으로 바꿀 시, ‘약육강식’이 되기 때문이다. 근대국가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을 통해 움직이고, 이 시스템을 경쟁을 기본으로 한다. 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선명하게 나누고 이익을 독식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승자는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다수가 지배하는 체제고, 다수의 패배자는 소수의 승리자를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통해 정당하게 권좌에서 내던질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자유주의 이념이 민주주의에 도입되는 것은 꼭 필요했다.

상술한 내용에서 추리할 수 있듯이, 현대 민주주의가 품고 있는 폭탄이란 다름 아닌 민주주의의 원리와 자유주의의 원리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시장과 민주주의의 충돌이라 말해도 상관없겠다. 복지국가는 ‘위험한 패배자’들이 정치세력화 하지 않도록 막기 위해, 즉, 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했다. 보수 정치인 비스마르크가 복지 개념을 국가에 도입한 최초의 정치인인 것은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폭탄의 존재는 현대 민주주의의 구조에 있어 핵심이며, 사실상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다. 갈등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다. 가능한 것은 양자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 최대한 안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 정도다. 이 안정 상태 유지의 핵심은 중간계급이 되도록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부의 분배 상태가 되도록 평등해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는 언제든 ‘다수의 폭력’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으며, 그러한 불평등이 ‘민족’ 혹은 ‘국가’ 개념과 결합할 때, 지난 사설에서 이야기된 국가들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철저하고 폭력적인 타자배제의 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 이때 민주주의는 ‘지옥’의 다른 이름이 된다.

때문에 IMF이후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는 한국에서, IMF이후 경제부분에 부여된 지나친 자유가 역설적으로 폭력적인 타자에 대한 억압으로 귀결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현재 한국 민주주의가 처해있는 위기의 문제이며, 이에 대한 장래의 전망이 지극히 어둡기에,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실패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까지 쓴 수행은 키보드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량은 채웠지만 자유가 억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대한 다른 종류의 분석을 참고하고 간략하게나마 언급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되었던 탓이다. 그의 사설은 엄격한 논문 종류의 글과는 달리 매우 널럴한 구조를 가지지만 그래도 다른 사설과는 달리 기획 연재의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은근한 언급은 글의 전체적인 연결을 부드럽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는 자신의 책장을 이리저리 뒤졌다.

“어디보자, 역시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고전적이겠지만-”

수행은 복잡하게 미간을 좁혔다. 고전적인 저술이기는 하지만 관념의 영향력을 너무 강조하는 글이라는 것이 조금 껄끄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 윤리’와 같은 고전적 책도 현재 학계에서는 이제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다. 프로이트의 분석에 너무 기대고 있다는 것도 걸리는 부분이었다. 프로이트의 분석은 무척 매력적이지만 사회현상 전체에 대입할 때 너무 도깨비 방망이 같은 힘을 가진다.

“음-”

하지만 더 매력적인 저술은 생각나지 않았다. 단점을 고려해도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보기 힘든 걸작이다. 적당히 가감해서 정리할 수밖에. 분량에 좀 더 여유가 있다면 이 문제에 관해 카프카, 그 가운데서도 ‘변신’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고픈 욕심도 있었지만 문학작품을 인용하면서 사회학적인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을 정도로 지면에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수행은 아쉽게 생각하며 책을 꺼낸 다음 근처의 연필을 쥐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며 참고할 부분을 빠른 속도로 체크해 넘기기 시작했다. 중간에, 뚝, 소리가 났다. 연필심이 부러진 탓이다.

“이런... 너무 뾰족하게 깎았군.”

수행은 혀를 찼다. 그리고 수행은 뭉툭해진 연필심을 바라봤다. 지나친 것은 다들 이렇게 쉽게 부러지고 만다. 연필도, 칼날도, 민주주의도. 심지어는 ‘선’도. 그런 당연한 생각이 무거운 무게감과 함께 수행의 뇌리를 방문했다. 수행은 묵묵한 얼굴로 연필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다른 필기도구를 찾았다.

*챕터 끝. 피곤해효.

*오타쿠가 고통받는 게 아니고 세상에 고통 받는 사람이 많다는 거죠.

*간단 상식, 오타쿠와 히키코모리의 구분법. 의외로 같이 취급하는 사람이 많던데, 간단히 구분 가능합니다. 오타쿠는 방에 틀어박히면 즐거운 사람들이고, 히키코모리는 방에 틀어박혀도 고통스러운 사람들입니다. 히키코모리의 경우는 주로 고립되기 싫지만 외부가 더 고통스러워서 도피한 사람들이죠. 오타쿠하고는 다른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오타쿠의 사회성 결여는 극도의 마이페이스 준수에 있지 물리적 고립에 있는 건 아닙니다. 양자를 병행하는 케이스라던가가 있기 때문에 저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물론 아닙니다.

*민주주의에 내재된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물론 있습니다. 대장은 하버마스. 그의 의사소통이론 같은 것이 이 지점을 노리고 있습니다. 너무 추상적이라 설득력은 별로 없지만. 상탈 무페한테 되게 까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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