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희망을 위한 찬가 - 아웃사이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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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책을 읽는다. 사르트르의 구토, 다. 눈이 문장을 쫒는다. 기억은 문장을 관념 속에 고착시킴으로서 단절적 기표를 넘어 의미를 가진 기호로 성립시키고, 이해를 통해 의미로 환원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문장은 분절된 기호로서 약속된 의미를 담고 이해를 통해 저자의 관념과 독자의 관념을 연결시키는 매개체다. 양자의 연결에 ‘완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 연결은 절망적일 정도의 심연을 보여준다. 그래도 기호는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창이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합치된 형태. 뜻과 형상의 결합체다. 은결은 생각한다. 그런데 그 결합은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 걸까?
페이지를 넘긴다.
구토감 가운데서, 로캉탱은 말한다. 자기 가운데 어떤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그리고 구토감이 시작된다. 그의 구토는 언제나 사물과 함께 한다. 구토는 인식과 함께 하는 감각이다. 사물에 대한 로캉탱의 묘사는 치밀하고 지루하다. 그는 단절적인 기호로 사물을 잘라 말하지 않는다. 손이면 손, 입이면 입, 눈이 면 눈이라고, 잘라서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손이라 말하면서 인간 가운데 손이 나타나는 형태를 말한다. 입을 말하면서 인식의 틀 안에 입이 나타나는 형상을 말한다. 순수한 인식. 결국, 로캉탱은 기호가 인식 가운데 나타나는 현상을 철저한 순수함으로 바라보며 구토감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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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는 순수한 인식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으로 가득 차 있다. 로캉탱의 변화된 세계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순수한 인식을 시작했다. 책을 책이라 보지 않고, 나무 주름을 나무 주름이라 보지 않고, 문손잡이를 문손잡이라 보지 않게 됐다. 언어라는 범주를 통해 구획된 세계에서, 그는 한 발자국 밖으로 나갔다. 그는 일상적 삶에 매몰된 우리들과 인식을 공유하지 않는다. 구토는 거기에 따르는 결과였다. 인식이 모든 의견의 기초인 한, 그의 의견은 기초부터 우리와 다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모두가 윈도우xp를 사용하는 세상에서 그는 홀로 리눅스를 사용한다. 그는 그래서 철저한-회복 불가능한-아웃사이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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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눈을 스친다. 거기서 로캉탱은 말한다. ‘나는 이제 알았다.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것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은결은 구토에서 찐뜩한 현상학의 영향을 느낀다. 순결한 인식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 그것은 현상학의 특징이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정초했다. 그의 대표저작 ‘존재와 무’는 하이데거의 저작 ‘존재와 시간’에 대한 독해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후설의 가장 총애하는, 그래서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제자였다. 때문에 하이데거의 철학적 방법론은 현상학이었다. 현상학과 사르트르의 연결은 필연적이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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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이 현상학을 배운 것은 기호학에 대한 심화가 끝나고 나서의 무렵이었다. 수행은 은결에게 그간 배워온 기호이론 일반을 모조리 ‘폐기’하는 의미에서 은결에게 현상학을 공부하는 것이라 알려주었다. 처음에 은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공부를 시작하고 곧 수행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상학은 정말로 그간 배운 기호이론 전부를 ‘폐기’하는 공부였고, 그래서 기호이론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완결부적인 공부이기도 했다. 현상학은 기호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기호가 어떻게 기호가 되는지를 철저하게 궁구할 것을 요구한다. 모든 종류의 맥락을 제거하고, 인식 가운데 사물이 드러나는 것에만 그래서 집중하도록 한다. 그래서 현상학은 언어-인식-의 추상성이 개별 사물의 구체성을 난도질하고 그것의 특수성을 일반성으로 대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데서 시작하는 학문이다. 그것을 현상학에서는 ‘판단중지’ 혹은 ‘괄호에 넣기’라고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책이라는 사물을 보고 책이라 말하지만, 책을 책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책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이라는 개념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확실’하지 않다. 확실하지 않음으로, 현상학에서는 사물에 대한 즉각적인 개념적 판단을 거부하라고 요구한다. 이 인식에 필연적으로 관여하는 외부에 대한 거절이 ‘판단중지’이고, ‘괄호에 넣기’이다. 순수사물에 대한 직관. 기표와 기의가 결합해 기호가 되기 전에 사물을 ‘괄호’에 넣고 바라보는 작업이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기존의 기호를 부정하는 작업이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을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 걸까? 현상학은 일상적인 그 결합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다. ‘음미’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기호의 기초를 때려 부순다. 그때 세계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해석의 틀을 바꾸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 다르게 보이는 모습이, 사르트르의 구토에서는 ‘구토’라는 상태로 드러나고 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러, 은결은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대신에 눈을 감고 얼굴을 약하게 찌푸렸다. 속에서 다시 무언가 치밀어 오르려던 것을 어떻게 견디어 냈다. 밥통에서 삐- 소리가 났다. 뜸 들이는 작업까지 모두 끝났다는 ‘신호’였다. 그 역시 ‘기호’였다. 은결은 기호의 기초를 의문시하는 글을 읽다가 기호에 반응한다는 것에서, 마치 세계와 세계 사이를 오가는 듯한 이질감을 느꼈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우주가 뒤바뀌는, 고통스런 혁명적 전회였다.
“밥은, 잘 됐군.”
은결은 밥솥의 뚜껑을 열어보며 메마르게 중얼거렸다. 기름기를 품고 자글자글 소리를 내는 밥알들과 피어오르는 김. ‘하지만-’ 은결은 기왕에 생각해 본다. ‘‘밥알’이란, ‘김’이란 무엇인 걸까.’ 라고. 피식, 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가소로웠다. 그렇지만 단지 가소롭게만 넘어갈 수 없는 징징거림이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로캉탱의 ‘사물이란 보이는 그대로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은 그 자신의 역사연구 작업에서도 종래에 다가 온다. 문장을 적어 조립해 관념을 짜내는 활동. 역사는 세계 가운데 의미를 만들어내 위치시키는 가장 중요한 작업의 하나. 그래서 그는 거기서 강렬한 무의미를 느껴야 했다. 의미는 외부에서 오고, 판단중지는 외부를 거절한다. 주어진 의미로 새로운 의지를 조립하는 자가 주어진 의미를 거절한다는 충돌이 구토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기호를 괄호에 넣을 때, 남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의이다. 그는 구토감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은결은 기호를 읽고 그 기호를 해석함으로서 기호를 부정하는 작업을 느낀다는데 이중의 고통을 느낀다.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라고 크레타 사람이 말했다.’ 탈출 불가능한 러셀 역설의 이중구속에 걸려든 것만 같다. 러셀은 형식논리학을 통해 거기서 탈출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괴델이 파괴하고 만다. 러셀이 프레게의 형식논리학을 파괴했듯이. 그런 러셀의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제자는 비트겐슈타인이었다. 그는 괴델이 내부에서 한 작업을 외부에서 해낸다. 위대한 기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놀이하기 위한 규칙의 집합일 뿐’이다. 수학조차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토기가 치밀어 오른다.
은결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지럽다. 눈에 보이는 사물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금 모든 것이 변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눈앞의 모든 것을 조롱하고 부정한다. 탈출하고 싶다면 ‘어디에도 없는’을 찾아라. 그곳을 향해라. 괴델이 그러했듯이. 괴델은 수학의 기초를 자신만만하게 부정한다. 완벽한 기초? 그런 것은 증명 불가능하다. 그에게 수학의 기초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회의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수학은 그런 것이 필요 없는 위대한 것이었다. 수학은 완벽한 이데아였다. 괴델은 수학에 대해 너무나 순결한 플라톤주의자였기에 자신의 불완전성 정리에 고민하지 않는다. 신이 어디 증명되었기에 믿어지던가. 그는 진정한 수학의 ‘신도(信徒)’였다. 그는 도리어 수학의 기초를 증명하려는 불신자들이 탐탁지 않았다.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 것이다.’ 힐베르트는 말한다. 괴델은 부정한다. 그렇지 않다. 어떠한 논리체계도 우리는 완전성을 증명 불가능하다. 그러니 알 수 없다. 믿어라. 그저 믿어라. 하지만 은결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데아를 신뢰하기에, 세상은, 너무도, 너무도, 그러니까 너무도-
-많은 ‘고통’으로 충만해 있다.
은결은 새파란 얼굴로 입을 손에 가져다 댄다. 일그러짐은 어떤 극단을 향해 있다. 게워낼 것이 없기에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달칵, 소리가 나며 한 사람이 거실로 걸어 나왔다. 청량한 분위기의 중년 남자, 수행이었다. 은결은 침을 삼켰다. 고통과 토기가 함께 삼켜진다. 손과 얼굴에 흥건한 식은땀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것과 부엌 쪽은 창문이 좁다는 점에 기대해 볼 뿐이다. 은결은 얼른 안색을 정리하고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숙여 보였고, 약간 걱정스런 안색으로 말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더 주무시지 않고요.”
“괜찮다. 몸이 안 좋다고 뻗어 있기만 해봐야 별푼수 없이 좋지 않은 몸만 더 약골이 되는 거고. 좀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그나마 좋아진 몸이 좀 더 건강해 지겠지.”
“그래도...”
“녀석도.”
“-그보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무슨 일이 있었니?”
걱정스런 안색으로 수행이 물었다. 역시 아버지의 눈을 속이기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은결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아담의 언어를 상대했던 피로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피로, 라...”
수행은 씁쓰름하게 말꼬리를 늘이며 은결의 자기진단을 중얼거렸다. 무거운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을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그는 무얼 말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시선을 소파로 가져갔다. 소파에는 ‘구토’가 놓여져 있었다. 무거웠던 수행의 눈이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 책을 다시금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기를 기원할 뿐이다. 수행은 입을 열었다.
“구토, 를 읽고 있구나.”
“오랜만에 다시 읽고 있습니다.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도 그렇게 느꼈지만 이번에 새로 읽고 있으니 한층 그러했습니다. 구토는 꽉 막힌 사유를 시원하게 청소하는 힘을 가진 것 같습니다.”
은결은 웃으며 말했다. 수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상학에 기초한 인식의 문제를 기초로 깔고서 치밀하게 전개하는 글이니 그럴 법도 하겠구나.”
“현상학은 기호가 담지하는 권력의 문제를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엄밀한 학의 정초를 세우겠다는 후설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만, 세계에 대한 개인의 인식을 성찰하는데 그만한 힘을 가진 철학적 방법론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모든 종류의 의미가 지닌 권위를 부정하게 하는 힘을 가집니다.”
“그래. 그래서 나는 네게 현상학을 마지막에 가르쳤구나. 모든 확실성을 결국에는 의심할 수 있는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결국 외부에 좌우되지 않는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고정된 정신을 언제든지 환기하도록. 그러나...”
“......”
은결은 이어질 수행의 말을 기다렸다. 말꼬리를 흐린 수행은 잠깐 침묵을 두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가라앉던 어조를 평이하게 바꾸어 말했다.
“구토는 좋은 글이지. 너도 알겠지만 그 글이 정말로 좋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러한 의미의 부정 위에서 로깡탱이 끝나지 않았다는데 있단다. 글의 마지막에서 그는 본래적 존재가 되고자 하지. 사르트르가 단순한 관념적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 이상의 존재로서 프랑스의 비판적 지식인의 전통의 성립자이듯. 나는 구토가 그런 맹아를 담고 있기에 한층 훌륭했다고 생각한단다.”
“...알고, 있습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대답은 건조했다. 수행은 슬픔을, 아픔을 느꼈다.
*로이엔탈님과 the ark님이 추천을 주셨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의 응원에 힘입어 힘내서 글을 씁니다. 고로 요구사항은 지난화와 같아염!
*왜 이 글에서 저는 하필이면 사르트르의 구토를 경유해 후설의 현상학으로 들어갔던 것일까요? 그냥 후설로 직접 들어가도, 그게 아니라면 메를로 뽕띠라도 좋지 않았을까요? 왜 이글의 서두는 하필이면 그람시로부터 시작할까요? 낙관의 의지 자체는 장 크리스토프라는 소설에 기원을 두지 않던가요? 이 글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거인 두 사람은 누구일까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저는 왜 손과 노동을 연결해 설명했을까요?(맞춰낸 마셜님은 대단.) 그것들은 또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요? 저는 이런 것들에 대해 아무 것도 직접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해석의 여지는 이런 것을 통해 풍부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해석’을 말하실 분들은 우선 엄밀하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해석’이란 작업의 기초는 어설픈 인상이 아니라 엄밀한 독해이니까요.
*서비스. ‘보이밋 걸 로봇물’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있는 듯 하여 기획만 공개.
괜찮은 대학에서 훌륭한 학부졸업논문을 다 쓰고, 유학을 준비하던 유약하고 내성적인 인텔리 ㄱ군은 도서관에서 찌질대고 돌아오는 길에 절세미소녀를 만나는 겁니다. 그리고 주제도 안 되면서 도와주려다 그녀를 추척하는 정체불명의 무리들과의 싸움에 말려들게 되죠.
우와, 뻔하고 뻔해서 진력나는 보이 밋 걸이군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좋아하는데. 알고 봤더니 그녀는 이세계의 주민으로, 그 세계의 가장 강력한 로봇의 탑승자중 한 명으로, 그녀와 그녀의 로봇을 두려워한 마왕에 의해 여기까지 쫒겨 오는 겁니다. 사실 그 로봇에는 서브 파일럿이 필요한데 적합한 인재가 없었기 대문이지요! 물론 주인공이 그 서브 파일럿에 낙착! 그리고 주인공의 의사와 무관하게 두 사람은 이계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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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핵심은 히로인의 성격이 무척 호방하고 이론적인 것을 개무시하는 성품인데 반해, 주인공은 완전한 이론파라는 거지요. 그들의 성격은 사실 두 가지 학적 명제를 구체화한 것으로, 소녀의 경우, 포이에르 바하에 대한 체제 11번, 철학자들은 세계를 열심히 해석만 했네효. 하지만 뜯어고쳐야 되염. 이고, 주인공의 경우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녁에 날아염. 다 끝나고 정리하는거지 괜히 앞에 나서서 깝치는게 아녜염. 이라는 거지요.
결국, 두 사람의 갈등과 화해는 이 두 명제의 갈등과 화해가 되는 거고, 그 과정은 실천적 행동과 이론적 행위의 각 장단점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과정을 통해 다루어질 겁니다. 이 과정에서 가령 주인공은 로머가 개발하고, 에릭이 발전시킨 게임이론에 기초한 착취개념을 이계에 전파해 귀족정의 이념적 토대를 캐박살 내고 근대의 문을 여는데 일조하게 됩니다!
...쩝. 그래봐야 어느 천 년에 적겠습니까. 글로 밥 빌어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슬슬 글 쓸 시간도 한계에 도달 했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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