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희망을 위한 찬가 - 아웃사이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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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쿠로사카가 걱정스런 안색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은결은 전신주를 붙잡던 손을 떼고 겨우 몸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창백한 안색으로 미소 짓고 있는 은결의 모습이 도심의 불빛 가운데서 처연하다고, 쿠로사카는 느꼈다.
“(아무 것도 아냐.)”
“(아무 것도 아니긴, 너 며칠 전부터 쭉 이상했어.)”
쿠로사카는 눈썹을 올리면서 말했다. 그녀는 ‘아무 것도 아냐.’ 라는 종류의 대답이 품고 있는 배려를 가장한 은결의 배제가 싫었다. 싫었기에 그녀의 그 배려(배제)를 단번에 걷어차 버리고 물었다. 쓸쓸하던 은결의 미소가 다정하게 변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이런 게 아닐텐데, 라고, 그런 생각을 했었을 뿐이니까.)”
“(이런 게 아니라니?)”
쿠로사카는 되물었다. 은결의 다정했던 미소가 메말라갔다. 쿠로사카가 어쩐지 견디기 힘든 갈증을 느끼고 침을 삼켰을 때, 은결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사념체를 보면서 문득 생각했어.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을까, 하고. 아무도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 텐데, 왜 저렇게 고통 받는 사람이 많을까, 하고. 고통받기 위해 이런 거대한 것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 텐데, 왜들 저렇게 슬퍼하고, 아파하고, 비참해하고, 질투하고, 욕망하면서, 결국 사념체와 같은 괴물까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까 하고 말야.)”
“(그건...)”
너무나 은결다운 생각이지만, 너무나 은결답기에 쿠로사카에게는 돌려줄 말이 없었다. 단지 그녀는 은결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 두 번 사념체와 싸우는 것도 아니면서 그는 사념체의 사념에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답하지 못하고 있는 쿠로사카를 바라보는 은결의 표정이 공허해졌다. 그는 시선이, 오감이 접을 수 없는 저 너머 세계를 아득하게 그리워하는 듯한 눈빛으로 혼탁하여 추악한 도심의 밤을 바라보며, 아무런 별빛을 눈동자에 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세계의 본래적 모습은, 그런 게 아닐 텐데. 사람의 세상은 기호로 충만해 있어. 아니 사람의 세상은 기호의 조립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말해야 하겠지. 차이라면 기호의 세분화 정도일까. 칸트와 후설은 인간에게 기호가 드러나는 방식에 대한 가장 심오한 연구의 하나야. 학문은 세상이 편재한 그들 기호를 읽어내기 위한 노력이고. 그래서 기호는 질서지. 질서는 미래를 현재화 하는 힘이기도 해. 미래를 현재화해서 그들은 무엇을 하려는 거였을까? 다들 행복해지려고 했던 거겠지? 적어도 한국은, 그러한 노력이 현실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고 성공적으로 성취된 국가의 하나야. 덕분에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목숨을 위협을 느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이 나라에서는 예외적이야. 그런데도 너무도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세상의 본래적 모습은, 이런 게 아닐 텐데도. 그렇다면 의미를 담지한 기호는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걸까? 누가 그런 기호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런 생각을 하니까, 견디기 어려운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게워 올렸지. 그, 뿐이야.)”
“(......)”
이번에도, 쿠로사카는 돌려줄 말이 없었다. 그녀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공허하고 쓸쓸하게 말하는 은결의 모습은 금간 도자기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해 결국 부서질 운명이 예고된 금간 도자기. 여느 때에도 흔히 그러했지만, 지금은 한결 더 위태로웠다. 손끝이 공허했다. 은결은 보름달처럼 환히 웃어보였다.
“(이것 봐. 아무 것도 아니잖아. 한심하고 하찮은 생각이잖아. 이야기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말이잖아. 애당초, 본래적 세계의 모습 따위가 있을 리가 없잖아. 자아가 타자의 구성물이라면, 모든 본질 역시 타자의 집합이 만들어낸 하나의 환상이고, 본질이 환상이라면 세상의 본질은 세상을 구성하는 자들에게 있을 뿐이니, 본질이 있다면 결국 원래부터 고통에 충만한, 그런 것이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런 생각은 아무 것도 아니야. 정말로 무가치하지.)”
가장 가혹한 자기부정. 쿠로사카는 안타까움과 분함을 느꼈다. 그를 위로해 일으키기에 쿠로사카는 은결이 말하는 사안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은결을 부정해 일으키기에 이미 그는 자기부정의 끝을 갔다. 그래서 부정도 위로도, 그녀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은결은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홀로 있었다. 쿠로사카는 말했다.
“(...너, 좀 쉬어.)”
“(나는, 괜찮아.)”
은결은 고개를 저었다. 쿠로사카는 울분을 담아 버럭 화내며 외쳤다.
“(쉬어!!)”
압도적인 성량에 주변이 덜덜 떨렸다. 결계가 해체되어 있었더라면 엄청난 소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녀의 기백에 압도된 은결이 멍청한 얼굴로 “으, 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일부터 한 동안은 내가 담당할 테니 너는 쉬어.)”
그렇게 잘라 말하고 쿠로사카는 높이 뛰어 은결의 시야로부터 사라졌다. 홀로 남은 은결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바라보다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한심하군...”
방학이지만 은결의 일과에 큰 차이는 없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일찍 일어나 씻고, 간단히 운동을 하고 돌아온 다음 아침밥을 준비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정리했다. 평균 기상 시간이 10시 30분인 어떤 소녀와는 입장이 많이 다른 것이다.
‘시장 봐오고 저녁 짓고 나면 8시 정도인가. 그럼 10시 정도에 집을 나서면 오늘 도천시 순찰도... 아, 오늘부터 한 동안은 쿠로사카가 맡기로 했지.’
아침밥을 준비하며 오늘의 일과를 정리하던 은결은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우울한 얼굴을 했다. 본인도 자기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요 며칠간 때때로 엄습하는 거대한 감정이 있고, 거기에 휘말리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무언가가 내부에서 ‘근본적’으로 변해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개인의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지진을, 가장 거대한 해일을 만난 듯한 감정이다. 우습게도 그것은 환희와 닮았다.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말 것 같은, 말 할 수 없이 거대한 환희. 하지만 문제는 그 환희가 ‘지금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아마도 거기서 발생한다. 가슴이 답답하다.
“후.”
은결은 쌀뜰물을 버리고 새로 물을 담은 다음, 밥솥에 통을 담았다. 그리고 몇 개의 버튼을 눌렀고, 밥솥은 밥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시간의 공백이 생겼다. 시간의 공백은 마음의 공백으로 이어졌다. 마음의 공백 사이며 밀려드는 것은 잡다한 생각이었다. 은결은 조용히 소파에 앉아 천정을 바라봤다.
그래. 정말로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고통이 있다는 것, 어떤 발전도 그 고통을 없애지 못하고 있다는 것. 심지어 그런 발전들이 새로운 고통을 낳는다는 것. 결국 타자는 극복되지 않는 다는 것. 이룩된 것은 거대한 타자의 체계일 뿐이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그런 것들을 알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어렸을 때,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접하며 은결은 세상의 그러한 모습을 알았고, 사념체와 싸우며 끊임없이 재확인했고, 아버지의 몰락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고통스럽지만 그것들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사념체와 싸우면서, 너무도 새삼스럽게 그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메워버렸다.
-세상은 본래 이렇지 않을 텐데.
그 가소로운 생각이 갑자기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말았다.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던 마음을 한 순간에 허물어 버렸다. 가장 거대한 환희와 닮은 그 생각은 지금 이 세계가 보여주는 모든 추악의 면면들을 못 견디도록 만든다. 너무도 아름다운 여성을 옆에 두고 있기에 추해 보이는 여성을 바라보는 것처럼, 세계는 그 환희에 대비되어 한갓 더러운 오물처럼 느껴진다. 어리석은 그 생각은 깊은 확신처럼 가슴에 붙박혀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생각은 끊임없이 이 세계를 부정하게 하고 저 세계를 속삭인다. 사실 ‘어디에도 없는(nowhere)’은 있다고, 그렇게 말한다. 은결은 팔을 들어 올려 천정을 바라보는 시야를 막았다. 인식을 부정하듯, 현상을 부정하듯.
“......”
은결은 깊은 숨을 쉬었다. 칙, 칙칙칙- 밥통은 뜨거운 김을 내뿜기 시작했다. 견디기 힘든 감정에 다시금 짓눌린 은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고, 자신의 책장을 뒤져 책을 한권 꺼냈다. 그가 쥔 것은 사르트르의 문학작품 ‘구토’였다. 그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겨나갔다.
*은결이 요 꼴이 될 거란건 지난 챕터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의문스레 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군요.
*후, 완결내고 싶어라. 계산했더니 앞으로도 상당히 남았네요. 이걸 끝내야 다른 것도 써 볼 텐데 어느 천 년에. 보이 밋 걸의 액션 로망 로봇 활극물! 이라던가. 으음.
*빠른 연재를 원하시면 그만한 보상을 돌립시다. 댓글이라던가 감상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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