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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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이 날아온 패를 잡았다. 그는 한동안 그 패를 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패를 밑으로 내렸다.
“이건 정말로 의외군.”
그는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당혹감을 듣고 주변에서는 경악했다. 그가 당혹하다니. 이제 만상(萬象)을 손에 넣기까지 한 걸음밖에 남지 않은 그를 당혹하게 할 것이 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니.
“다만, 비의(秘儀)의 왕께 경배를.”
그는 말했다.
하얀 시간이 흘렀다. 잴 수 없는 시간이었다. 길었던 것인지, 짧았던 것인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멀거나 가깝다는, 그런 개념들이 해체된 시간이었다. 한없이 짧아서 흘렀다는 것을 인지하기 불가능한 시간인 것 같기도 했고, 일억의 우주, 천억의 세계를 여행한 것 같은 긴 시간이기도 했다. 자기마저도 인지하지 못한 것 같은 순간이었고, 무수한 세계를 다시 구성해 낼 수 있을 것처럼 많은 이들을 만나본 시간이기도 했다. 제논이 쏘아낸 화살 같은 시간. 그렇지만 포근하고 따스한 시간이었다. 세상은 하얀 시간 가운데서 감동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일까? 떠오르는 모든 물음표에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그저 물음표뿐이었다. 압도적인 존재의 일체감을 잠시간 맛보았던 것 같았지만, 무수한 세계를 여행 한 뒤의 피로감 같은 것이 남아 있었지만, 그런 것은 부차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뇌리를 확실하게 장악하는 감각은 텅빈 공허였다. 희미한 쿠로사카의 기억은, 볼 위에 떨어진 물방울의 감촉에 그 공백과 함께 점차로 선명해 졌다.
쏴아아- 쏴아아-
먼 곳에서 걸어온 발자국 소리처럼 파도 소리가 선명해졌다. 그녀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주변은 아직도 어두운 밤이었다. 달은 희미하게 떠 있고, 별은 드문드문 보였다. 밤바다의 표면은 희미한 빛을 받아 그것들을 부드럽게 쪼개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청해도의 해변이었다.
‘성공했구나...’
불가능한 작업 같았는데, 이렇게 성공했다. 실패했다면 일동이 청해도로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도감과 함께 쿠로사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물먹은 솜처럼, 몸은 무거웠다.
“(아, 아직 일어나지마.)”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를 제지했다.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쿠로사카는 시선을 돌렸다. 한 소년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은결이었다. 그의 눈은 완전히 정상을 되찾고 있었다. 맑고, 슬픈, 말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은 눈동자. 쿠로사카는 새삼 안도했다.
‘(아...)’
한데 그의 눈은 습기에 젖어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던 것일까? 멍한 사고 가운데, 쿠로사카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볼 위로 떨어졌던 차가운 물방울의 느낌은 그의 눈물이었던 것일까? 왜? 쿠로사카는 그제서야 자신의 머리를 포근하게 받치고 있는 것이 은결의 허벅지라는 것을 알았다.
“(다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걸. 너도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닐 거야. 그러니 그냥 이렇게 있어.)”
왼쪽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은결은 그렇게 말했다. 역시 그는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쿠로사카는 힘없이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은결이 말한 것 처럼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은결도 아마 몸은 어떻게 일으켰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는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가만히 있었던 것이겠지. 쿠로사카가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은결은 다시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왜, 울고 있어?)”
그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어서, 쿠로사카는 물었다. 아직도 완전히 각성하지 못한 탓에 정신의 빗장에 헐거워졌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묻자 은결은 갑자기 양 눈에서 주르륵 눈물을 흘려냈다. 복받친 감정을 참아내지 못한 것 처럼.
“(미안. 쿠로사카 미안.)”
“(네 잘못이 아냐. 그리고 나만 힘들었던 것도...)”
쿠로사카가 힘없이 말하는 와중에 은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게 아냐. 그것도 물론 미안하지만, 그걸 미안하다고 하는 건 아냐... )”
“(그럼?)”
쿠로사카는 의아하게 물었다. 그게 미안한게 아니라면 은결은 대체 왜 이렇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저런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은결은 그녀의 의문과 무관하게 조용히 말을 이었다.
“(미안. 나는... 정말로 몰랐어.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정말로, 정말로 몰랐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인걸...)”
무슨 말일까? 와 설마?! 라는 상반된 생각이 동시의 그녀의 뇌리를 강하게 엄습했다. 휘광에 감싸여 정신을 잃었다 차리는 가운데 느꼈던 완전한 존재의 일체감이, 기억났다. 은결은 말을 이었다.
“(너는, 언제나 당당하고 굳세어 보여서, 나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어. 나는 오히려 너의 그 당당한 모습을 부럽게 생각했는걸. 네가, 나에 대해서 소외되어 있다는, 그런 감각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어...)”
“(......!)”
쿠로사카는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것은- 여기 와서 그녀가 은결에게 줄곧 말하고자 했지만, 초조와 망설임, 그리고 뜻하지 않은 방해 사이에 우물쭈물거리다 결국 말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제, 이제 겨우 다시 말해보고자 마음을 다잡고 있던 내용이기도 했다. 한데 은결은 어떻게 그를 알고 있던 것일까?
“(그러니까 미안. 나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러면서 나는 네게 승리를 원하느냐고, 승리를 통해 누군가를 슬퍼하도록 하고 싶어하느냐고 말했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네가 원했던 건 그런 게 아니니까. 너는 단지, 단지... 미안.)”
뜨거운 감정을 다 토해내지 못하고, 은결은 한숨을 쉰 다음 미안하다는 말로 다시 그의 말을 끊었다. 당혹과 창피함에 뒤엉킨 가운데 쿠로사카는 그의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사과가 거짓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위로해 주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은결의 사과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과 별개로 그의 눈물은 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았다.
“(쿠로사카, 정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 같아. 그렇게 많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 가장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마음조차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이의 마음조차, 이해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밖에 못했어. 나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
호소하듯이, 은결은 말했다. 은결의 양 눈으로 주륵주륵 눈물이 흘렀다.
“(도리어, 그 책들을 통해 세상을 판정하고, 그 판정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바라본 세계를 다시 책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확인하고 판정했어. 결국 그러한 판정의 외부로 넘어서지는 못했어... 너무, 한심해.)”
은결은 눈가의 눈물을 훔치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닦아내고, 다시 닦아낸 다음에도, 눈가로는 눈물이 맺혔고, 곧 흘러내렸다. 은결의 눈물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쿠로사카는 그의 우는 얼굴을 보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처럼, 자신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 너무도 절실했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은결은 결코 벽을 쌓기 위해 읽던 것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지라도, 그는 그렇지 않기 위해 읽었다.
“(정말이지, 아무런 쓸모도 없어... 아무 짝에도, 아무 짝에도... 책은 그저 책이고, 세계는 그저 세계인 것 같아...)
책은 책이고, 세계는 세계였다. 기표가 기표이고, 기의가 기의일 뿐이듯. 그리고 은결은 말을 끊었다. 말을 끊으며 은결은 눈을 감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쿠로사카는 안쓰럽게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은결의 볼을 쓰다듬었다. 눈물에 젖은 그의 볼은 미끄러웠다. 곧 그는 감았던 눈을 떴고, 쿠로사카를 내려다 봤다.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은결은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쿠로사카, 하지만, 하지만 말야, 그래도 나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의 웃음은 희미하지만 강했고, 눈가로는 다시금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볼두덩에 이미 생겨난 선명한 눈물선에 달빛이 내려앉아 빛을 머금고 있었다. 쿠로사카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슬프게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마치, 수면위에 찰랑이는 은결처럼 말이다.
쏴아아- 철썩. 쏴아아- 철썩.
파도소리가 깊다.
*드디어 다음화면 길었던 챕터도 끝. 초반의 갈등을 결론부에 정리해내면서 의미의 확장까지 해 내는데 성공해서 만족스럽군요. 후훗.
*성원을 합시다!!! 그나마도 없으면 현재를 무슨 재미로 하겠습니까! 큼! 그렇다고 ‘성원’달지는 말고. 자꾸 이러심 제가 러셀 역설 끌고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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