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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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이 그렇게 시끄러운 가운데, 푸른 이빨은 자신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안도하고 있었다. 역시 그 짜증나는 꼬맹이의 아비는 인간이라고 믿기 힘든 힘을 지니고 있었고, 섣불리 정체를 드러냈다거나 하다면 최선의 경우라도 지금쯤 자신은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이래서는 이쪽에서도 움직이기 좋지 않군.’
푸른 이빨은 아쉽게 중얼거렸다. 무엇보다 세연이라는 계집의 몸을 그 꼬맹이의 아비가 전개한 진식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지금 막 이 계집의 몸에 들어온 카미를 한 순간에 소거시켜 버릴만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힘을 은결에게 남겨둔 자신의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두고 보는 수밖에.’
어둠에 본질을 숨기며, 푸른 이빨은 중얼거렸다. 한 순간, 한 순간을 노려야 했다.
일그러진 세계 가운데서 쿠로사카는 강하게 검격을 날린다. 위맹한 힘의 집중이 물화되어 날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은결처럼 보이는 것의 앞에 이르러 근원으로 복속되고 만다. 표정 없는 얼굴이 그녀를 향해 느릿하게 움직이는 모습만이, 그 공격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것이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자신은 언제까지 이런 행위를 반복할 수 있을까? 몸은 이미 한계에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데-
옆에서는, 세연이라고 하던 소녀의 몸을 입은 카미가, 마땅치 않다는 표정을 한 채, 자신이 한 것 처럼 은결을 공격하고 있다. 그녀가 손을 뻗으면, 그 끝에서 낮은 진동음 같은 것이 들림과 동시에 주변 세계의 모습이 일순 일그러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공간 자체가 진감하며 그 엄청난 힘의 통로가 되고 있었다. 쿠로사카의 어떤 공격도 카미가 내붐는 일격에 비할바가 되지 못했다. 물론 그렇게 강력한 공격이라도 은결처럼 보이는 것의 근처에 다가가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은결은 세계였고, 세계는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 내의 모든 행위들이 일어나고 돌아가는 장소였으며, 그 행위들이 가능하도록 하는 질서의 지지대이자 질서 그 자체이기도 했다. 쿠로사카도 카미도, 결국은 세계 내의 존재에 불과했다. 어떤 강함도 세계의 법칙이 용납하는 한에서 가능한 행위에 불과했다.
단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공격이 그렇게 강한 만큼 그의 공격은 자신의 공격보다 은결의 반응을 강하게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카미의 공격은 쿠로사카보다 훨씬 더 강했지만, 은결처럼 보이는 것에게서 이끌어내는 반응은 오히려 훨씬 더 적었다.
-(역시 본질이 카미로 대체된 것은 설령 그 껍질이 친인이라고 해도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것 같네. 하기야 지금의 은결은 세계를 현상(appearance)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으니 육신을 빌린 카미를 세연양이라 인식할 리가 없겠지.)
지친 숨결을 고르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쿠로사카에게 팔찌를 통해 익숙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맥의 굴강한 고요를 담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수행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이곳에 오고 나서 그녀가 맨 처음 한 일을 은결을 죽이고자 시도한 것이었다.
-(카미에게 최대한 도우라고 말해 뒀지만, 이래서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군.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쿠로사카는 어렵사리 답했다. 수행은 어쨌거나 그녀에게 구름 위의 존재다. 그는 한때 위대했고, 사실 지금도 위대하다. 그리고 그 위대한 사람과 자신은 그의 아들을 죽이려 했다는 행위로 매개되어 있다.
-(큰 부담을 떠넘기게 되어 미안하네. 지금 은결에게 유효한 외계로서 작동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대뿐인 듯하니. 하지만 조금만 더 버텨준다면, 반드시 은결은 원래대로 돌려놓도록 하겠네.)
-(예.)
-(그리고, 나는 이제까지 심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은결이는, 자신의 이야기는 통 하지 않는 아이라서 말이야. 우리 은결이와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네. 쿠로사카 양.)
쿠로사카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진식을 전개하면서, 수행은 그녀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은결과 자신 사이에 이제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지 이제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그런 웃음으로 보였다. 쿠로사카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아무 말도 돌리지 않고, 은결을 향한 공격이 집중했다.
-어린아이를 놀리는 것은 그쯤 하도록 해라. 그 보다,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할아버지가 쓰게 웃으며 수행에게 말했다. 수행은 머쓱하게 웃어 보인 다음 진지한 얼굴로 돌아갔다.
-이미 세계를 격리해 근원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중입니다. 일원에 가까이 돌입할수록 은결이 원상태로 돌아올 가능성도 높아지기에, 다소 무리를 할 생각입니다. 가능하다면 중력이 승리하기 이전의 우주와 접속하려고 합니다. 은결이 자기 형체를 유지한다는 것은 현재 우리 세계의 법칙에 아직 종속되어 있다는 것일 테니까요. 우리 세계 법칙 이전의 우주라면, 지금 은결의 접속은 끊어질 것입니다.
-자칫하면 이 곳의 모든 이들이 일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그 정도의 제어는 상시 해 두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때까지 은결이 버텨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요소의 저의 통제 아래 놓여있습니다. 관건은... 아마도 쿠로사카 유리에라는, 저 소녀입니다. 저는 처음에 카미의 힘을 지닌 세연양으로 은결에게 외계를 부여하고자 했습니다만, 역시 현상에 현혹되지 않는 자에게, 육신은 무의미합니다.
-그런 것 같구나. 이세에서 온 아이에게 이런 도움을 받게 되리라고는. 나는 저 아이와 은결이 적대적인 관계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유감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은결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것 같아 조금 쓸쓸하구나.
-저도 아버지처럼 생각했었고, 그래서 조금은 쓸쓸합니다. 은결이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언제나 혼자 고민했고,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아이였기에, 억지로 그것을 공유하고자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성장이란 그러한 것이겠지요. 부모가 모르는 곳에서 아이는 성장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기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너도 그랬으니까.
염파를 통한 부자의 대화는, 갑작스런 신음으로 인해 끊어졌다.
“크윽!”
쿠로사카였다. 그녀는 막 검격을 쳐내며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특별한 외상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모습은 위태로웠다. 그러나 은결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녀를 바라봤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바라본 수행은 순식간에 사태를 파악하고 심각한 얼굴을 했다.
-더 이상 키리야미의 힘을 수용하기에, 저 아이의 몸이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거늘, 어떻게 수단이 없겠느냐?
할아버지가 안타깝게 물었다.
-카미의 힘을 그녀에게 보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힘의 변환 매개체가 되어 주십시오.
-그럴려면 내가 이 진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혼자서, 괜찮겠느냐?
할아버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수행이 기호를 다루는 능력은 경이적이지만, 모든 힘을 잃은 그의 육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그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엄연한 물리적 한계에 복속되어 있고, 그러한 한계 가운데 이룰 수 있는 작업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되기 힘들다. 자신이 진에 포함되어 아들의 작업을 보조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수행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진 안에서 모든 요소는 제 통제 아래 있습니다. 진식을 시동한 초반이라면 몰라도 이미 작업은 종국에 도달했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20초면 됩니다. 아버지께서 빠지시더라도, 우려할만한 수준의 영향은 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지금 쿠로사카 양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위험합니다.
-알겠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진에서 빠져나가 대지로 떨어져 내리는 쿠로사카를 받아들었다. 지치고 상처 입은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할아버지의 품에 잠겨들듯이 안겼다. 할아버지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이내 얼굴을 굳히고 수행을 바라봤다. 수행은 할아버지의 눈빛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고, 카미를 향해 명령했다. 카미는 수행의 명령에 따라 두 사람을 향해 무시무시한 힘의 덩어리를 쏘아냈다. 허공에서, 복잡한 진이 발생하며 그 힘을 받아들여 변환시켰고, 그것은 한줄기 번개처럼 변해 할아버지를 맞췄다. 그는 그 힘을 쿠로사카에게로 전달했다. 힘을 받음과 동시에, 쿠로사카는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의 전신을 감싸는 친절한 힘을 느꼈다.
-부탁한다. 앞으로 조금이면, 20초면 된다.
쿠로사카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키리야미를 쥐었다. 그리고 은결을 향해 막대한 힘을 담은 검격을 날렸다. 앞으로 조금, 앞으로 조금이라고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매개체로 자신의 힘을 전달하는데 전력을 다하던 카미는 점차 힘의 부족을 느꼈다. 그만큼 이 인간들이 운용하는 에너지는 엄청났고, 사용하는 술법은 상상을 초월해 있었다.
-크으으... 정말 뭐가 뭔지 모를 인간들이로군.
그의 영적 본질 뒤에서, 음습하게 눈을 뜨는 푸른 존재가 있었지만, 그는 눈치 채지 못했다.
쿠로사카는 방금 공격에 따라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은결을 보며, 초조하게 다시 공격을 날렸다. 검의 궤적이 그리는 선은 선명하고 아름다웠지만, 그것을 마음에 담을 여유는 전혀 없었다. 20초! 20초! 단지 20초라는데, 그 20초가 너무도 길었다.
...수행은 땀범벅이 되어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의 육체를 보조해주던 할아버지의 기운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고, 온전히 인간의 육체로서 모든 기호 연산을 해야만 했다. 그러니 아무리 그가 천재라고 해도 지치지 않을 리는 없었다. 수행의 기맥은 이미 한번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카미의 힘을 변환해 자기를 보조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행과 같은 류인 할아버지나 은결의 힘이 정밀한 기의 3차원적 지도를 인지하고 운행하지 않으면 수행에게는 최악의 독을 푼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하지만, 이제 그 작업도 끝이다.
수행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우주처럼 펼쳐진 기호의 가운데를 찍었다. 탈진한 수행은 쓰레기처럼 쓰러졌다. 할아버지는 힘의 변환을 중단하고 수행에게로 달려 나갔다. 쿠로사카는 막 은결을 공격하던 차였다. 그녀의 검과, 은결과, 카미가 일직선에 놓였고, 한 가지 힘으로 연결됐다.
수행이 손을 찍은 곳에서부터 빛이, 그러나 모든 빛과 다르고, 모든 존재와 격리된 아인소프와 같은 빛이 번쩍였다.
*그라나르 님과 ari님께서 추천해 주셨습니다. 감사의 뜻을 전하며, 앞으로도 좋은 글을 적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벤야민의 말을 금언으로 삼아 글의 주제와 상관없는 내용은 철저히 배격하는 글쓰기를 기본으로 하는데, 그로인해 비판을 듣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 참 신선하게 여깁니다. 참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루님의 꼽사리 추천에도 감사드립니다.
*아인소프인지 엔소프인지 에인소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인소프가 인기 있는 거 같아서 그냥 따릅니다.
*제가 세상에 물들었는가, 하는 글이 있던데, 그렇게 보였다면 도리어 꽤 기쁜(?)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건 그럭저럭 팔릴만한 스타일의 글을 적고 있다는 소리가 될 테니까요. 언제까지 글을 적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길게 가긴 힘들 것 같은데, 만일 글이 잘 팔려준다면 그 기간이 조금 더 연장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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